00017 그림자를 밟고 다니는 자(4) =========================
건물 안에 몇 명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기척으로 보건대 적은 숫자는 아닐 터였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자가 누구인지, 그가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카시야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뎌 그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문을 잡고 있던 젊은 남자는 다시 주변을 살핀 후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밖에서도 느꼈지만 건물은 언뜻 허름해보여도 나름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다. 벽과 계단을 뒤덮은 화려한 장식은 창문으로 새어들어오는 오전의 햇빛에 어색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밤에는 노란 조명에 더없이 화려해보이리라.
젊은 남자는 카시야를 지하의 어떤 방 앞으로 안내했다.
"툴라 님. 그 분을 모셔왔습니다."
"들어오세요."
문 밖으로 새어나온 허락의 목소리는 분명 젊은 여자의 것이었다.
젊은 남자가 문을 열자 그 안에는 더없이 훌륭한 응접실이 펼쳐졌다. 붉은 카펫이 깔린 바닥,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벽, 폭신한 소파와 화려한 문양의 테이블, 장식장 안에 가득한 은제 식기들, 그리고 긴 카우치에 비스듬히 앉아 카시야를 바라보는 붉은 머리카락의 풍만한 미녀….
카시야는 별 인사도 없이 그녀 맞은편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앉으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제 자리를 찾아 앉은 카시야를 보고도 붉은 머리의 미녀는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왜 나를 보자고 했나요?"
툴라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문가에 서있는 시종에게 턱 끝을 살짝 끄덕거렸고, 시종은 곧 그들 앞에 차를 내왔다.
툴라는 시종이 따르는 찻물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자신의 찻잔을 먼저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셨다.
"독은 들어있지 않으니 안심하고 드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옥구슬이 은쟁반 위를 또르르르 굴러가는 소리와 닮았달까, 굉장히 간드러지면서도 낭랑한 목소리였다.
카시야는 찻잔을 집어 차를 조금 입에 머금어보았다. 마비되는 느낌도 없고 독특한 맛과 향도 없다. 그제야 찻물을 목으로 넘겼다.
"후훗. 마지막 카드라더니, 정말 철저하시군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자신이 여기에 온 것을 타셀 측으로부터 전해들은 자라고 확신했다. '마지막 카드' 운운하던 것은 미하일이었으니까.
"내가 여기 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죠?"
"다 아는 방법이 있답니다."
"나를 보자고 한 이유는?"
"새로운 멤버를 확인해보려고요. 섀도 워커의 새 멤버는 아주 오랜만이거든요."
"당신은… 피엔 지역의 간부급인가 보군요."
"섀도 워커 내에서 계급은 없어요. 섀도 워커는 한 명, 한 명이 독립된 존재들이니까. 당신도 그렇잖아요?"
"나야 자세한 얘기를 듣지 못해서 그런 건 잘 모릅니다. 여하튼, 얼굴 보고 인사나 하자고 부른 건가요?"
여전히 건조한 카시야의 말투에 툴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문가의 시종에게 나가보라고 손짓한 뒤 한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 때문에 바쁜 분을 모셔왔을 리가 있나요. 물론 뵙게 되어 반갑긴 하지만요."
그녀는 다시 차를 마시고고 카시야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카리나 궁에서 새로운 소식이 도착했어요. 제 1황자 쪽 사람이 카리나 궁을 몰래 드나든다고 해요. 그리고 엘레나 황비 마마의 거처가 서쪽 별궁에서 동쪽 끝에 있는 탑으로 옮겨졌다는군요. 탑 꼭대기에 갇혀 계시대요."
"폐비도 안 된 황비를 대하는 자세가 아주 독특하군요."
"후훗. 망할 놈들이죠. 끊임없이 2황자 전하와 엘레나 황비 마마를 핍박하면서도 전하께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짐을 얹어주고는, 이번엔 적과 내통을 하고 있어요. 반란의 대상이 직접 말이죠. 황제는 미쳤어요."
아까까지 더없이 간드러지는 여우같던 툴라의 표정이 금새 흉흉해졌다. 그녀의 눈에서 빛이 새어나올 것 같을 정도였다.
"만약 엘레나 황비 마마를 빼내는 데 실패하고 쫓기게 된다면 무조건 마을로 도망치세요. 피엔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건물 출입구 옆 벽돌 중 검은 색 벽돌이 섞여있다면 아무 곳이나 문을 두드려서 '흑포도주를 얻으러 왔다'고 하세요. 곧바로 당신을 숨겨줄 거예요."
"그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죠."
무심하게 답하는 카시야를 향해 툴라가 간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제발요. 제발 성공해주세요. 황성 근처의 도시들은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수도와 먼 지방으로 갈수록 엉망진창이에요. 황제가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니 귀족들이 제멋대로 영지민들을 수탈하고 있어요. 반란군이 지나간 지역은 먹을 게 부족해서 굶어죽고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아직 어린 남자아이들까지 병사로 끌려가요. 저 미친 황제를 끌어내야 해요! 그렇다고 1황자가 제정신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거든요. 제 아비와 똑 닮은 전쟁광일 뿐이에요. 엘레나 황비 마마를 빼내올 수만 있다면, 2황자 전하께서 일어나실 수 있겠죠."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툴라는 진심으로 타셀이 이 나라를 장악하길 바라고 있었다.
카시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찻잔에 남은 차를 한 번에 다 들이켰다.
"어제 식당에서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황제에게 전설의 검이 있는데, 이 검을 갖고 있는 한은 어떤 전쟁에서도 패하지 않는다더군요. 혹시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네. 실재하는 검이에요. 저도 저희 가게 고객인 늙은 귀족에게 들었어요. 황제가 들면 신비로운 빛이 새어나오면서 엄청난 힘을 선사했다는군요. 그 검 때문에 황제가 이제까지 한 번도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다고 해요.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검이 보이지가 않는다는 게 이상한 일이죠."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여기 와 있는 건 어떻게 아신 건지, 정말 말씀해주실 생각이 없는 겁니까?"
카시야의 물음에 툴라는 다시 문 주변을 살피더니 아예 카시야의 옆으로 다가와 앉아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2황자 전하께서 알려주셨어요. 그 분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마법을 사용하실 줄 아십니다. 지금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그분은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제게 알려주실 수도 있고요. 2황자 전하께서 마법을 사용할 줄 아신다는 걸 황제가 알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어릴 때부터 비밀로 지키고 있었던 거죠. 아니, 그것 외에도 타셀 전하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뛰어난 자질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분이예요."
툴라는 타셀이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건 절대 비밀로 지켜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다. 그가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건 엘레나 황비와 섀도 워커 중의 일부만 알고 있다고 했다.
카시야는 툴라에게 다시 한 번 제발 엘레나 황비를 무사히 탈출시켜 달라는 부탁을 들으며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방문에서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아까의 그 젊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정중하게 카시야를 건물 밖까지 안내해주었다.
다시 번잡한 마을 중심부로 걸어 나와 든든하게 식사를 한 카시야는 육포를 좀 더 구입한 뒤 카리나 궁을 향해 출발했다. 단 하룻밤이지만 편히 쉰 육체는 다시 속력을 내기 시작했고, 카리나 궁이 있는 소도시 아르테비엔에는 3일 후에 도착하게 되었다.
아르테비엔은 피엔보다는 훨씬 작았지만 조용하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어딜 가나 꽃이 흐드러져있고 도심지 곳곳에 나무가 많아 싱그러워보였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도 여유롭고 편안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서로 서로 인사를 나눴고 어딜 가든 친절했다. 거리에서 파는 빵이나 음식들도 정갈해 보여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에서는 피엔에서처럼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외부인에 대한 감시자의 눈에 띌 위험은 무릅쓰지 않는 게 좋았다.
카시야는 우선 타셀에게 들었던 마부 회관으로 향했다.
거기서는 마부들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타셀이 말한 '한 쪽 다리에 나무 의족을 댄 흰머리의 마부'를 찾아 "오늘밤 카리나 궁에 여자를 배달해야 하니 엘론 성(星)이 뜰 때쯤 카리나 궁 남쪽 아셀 숲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전하고는 숙소를 잡기 위해 길을 나섰다.
피엔에서와는 달리 외곽 쪽의 조금은 허름한 여관을 잡아 가격도 흥정하지 않고 방의 침대에 짐을 던져놓은 뒤 창문 옆에 비스듬히 서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관의 주변에 수상한 자는 보이지 않았다.
카시야는 방문을 잠그고 침대 위에 짐을 풀어 가져온 무기와 독과 폭탄을 늘어놓았다.
이제 결전을 준비해야 했다.
입고 있는 옷을 전부 다 벗어놓고 팔목과 발목 부분에는 아대처럼 붕대로 솜씨 좋게 감싸놓고는, 가방에서 꺼낸 검정색 옷을 꺼내 입었다. 전생에서 입던 신축성 좋은 전투복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가지고 온 옷도 펄럭이지 않을 정도로 몸에 붙어 움직이기 불편하지는 않았다. 바지에는 자그마한 주머니가 몇 개나 달려 있어 작은 단검과 표창을 집어넣을 수 있었고 그녀가 부탁한대로 만들어진 조끼에도 여러 무기와 독을 채워 넣기 위한 주머니가 꼼꼼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카시야는 제 손이 닿기 좋은 부분부터 중요한 무기와 독을 채워 넣었다. 그녀가 전생에서 꺼내 쓰던 순서로 정리해놓으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총이 없는 것은 역시 아쉬웠다. 활을 쏘지나 않는 이상 원거리 무기가 없다. 하지만 활을 휴대하고 다닐 수 없으니 원거리에서 그녀를 노린 살수가 있다면 그녀로서는 상당히 불리했다.
'운이 좋길 바라야지.'
전생에서부터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대비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저 '운이 좋길 바라야지'라고 생각하고는 넘겨버렸다. 아무리 걱정하고 고민해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게 그녀를 더 대담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은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공격에 위축되곤 했지만 그녀는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정면돌파했다. 물론 몇 번인가는 정말 죽을 뻔한 적도 있었지만, 그걸 대비한다고 머뭇거리거나 포기할 수는 없던 일들이었다. 그녀로서는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다.
차분히 준비를 마친 그녀는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남은 짐은 가방에 챙겨두었다. 그것들은 전부 버려도 상관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새벽에 여관을 나서며 적당한 곳에 버려둘 생각이었다.
나무 바닥에 정좌하고 앉아 기감을 넓히며 오감을 예민하게 끌어올렸다. 바닥의 진동을 통해서는 여관 사람들의 움직임이 느껴지고,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거리의 소리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냄새의 입자가 청각과 후각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곧 무아의 경지까지 자신을 몰고 갔다. 전생에서 받았던 훈련 중 자신의 기척을 숨기기 위해 받았던 훈련이었지만 이 세계에서는 묘하게 더 집중이 잘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동과 소리, 냄새만으로도 이 여관에 묵는 사람들이 뭘 하고 있는지 속속들이 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이 복도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총 다섯 명…. 셋은 둔중하고 둘은 그럭저럭 표준 체형 같군. 1층에서는… 저녁 식사 준비인가? 스튜 같은 걸 끓이는 것 같은데…. 이건 야채가 아니라 육류를 써는 느낌이다. 칼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지가 않아. 아, 지금 여관 문을 열고 두 명, 아니, 세 명이 들어왔어. 식사 손님들인가 보군.'
그 순간, 카시야는 자신이 전생일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느꼈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떴다.
'이게 무슨 감각이지? 마치… 손에 잡힐 듯, 눈에 보일 듯 느껴져. 전생에서는 고작해야 인기척을 느낄 정도였는데….'
카시야의 육체가 이런 수련을 해왔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기사라는 직업을 가진 일반 여성일 뿐이었으니까.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이니까, 뭐, 이 정도의 육감은 기본 세팅인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신이 마치 게임 속에 들어온 것 같이 느껴져 피식 웃음이 났다. 어쨌든 감각이 훨씬 더 예민해졌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녀는 계속 명상에 잠기며 자신의 예민해진 감각을 여러모로 시험해보았다. 그러는 사이 점점 거리와 여관 내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바깥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어둑어둑했다. 마침 하늘에는 구름이 껴 지나치게 밝은 달빛도 적당히 가려주었다.
'슬슬 움직여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