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8 그림자를 밟고 다니는 자(5) =========================
카시야는 일어나 방문의 잠금장치를 풀어두고 가방을 메었다. 그리고 창문 밖을 잠깐 내다보다가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밤의 공기는 낮과는 다른 냄새가 난다. 의식을 더욱 침잠시키는 듯한 냄새. 이 길로 나가면, 작전의 성공 아니면 죽음뿐일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는 구름이 드리워 어두운 하늘을 한 번 쳐다보다가 곧 창틀을 휙 뛰어넘었다.
아무런 소동 없이 단단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카리나 궁의 성문을 통과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성 안의 황족과 귀족들은 제 스스로의 목숨을 위협하는 짓을 알아서 벌이고 있었다. 밤이면 거리의 창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귀족 상대로는 불가능한 변태 성욕을 풀어내는 자가 상당한 것이다.
'나한테야 고마운 일이지만.'
카시야는 챙겨온 로브를 걸치고 마부에게 말해둔 장소로 향했다.
아셀 숲 입구에는 마부 회관에서 봤던 그 마부가 까만 마차 옆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돈만 받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마차에 탄 카시야는 조끼와 상의를 벗고 다시 로브를 걸쳤다.
성문을 지나려는 마차의 행렬은 꽤나 길었다. 그만큼 창녀들을 많이 불러들인다는 말이었다.
"신원을 확인하겠다! 문을 열어라!"
차례차례로 다가오는 경비병의 목소리에 카시야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덜컹! 마차 문이 열리고 무뚝뚝하게 보이는 경비병이 카시야를 노려보았다.
"로브를 벗고 얼굴을 보여라!"
카시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른한 눈빛으로 경비병을 바라보았다.
생긋 웃은 카시야는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쓴 로브를 서서히 내렸다.
그녀의 로브가 쇄골 아래로 흘러내리는 데도 그녀의 어깨 위로 옷다운 것이 걸쳐진 게 보이질 않으니 경비병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어렸다. 로브가 점점 더 내려가 그녀의 젖가슴이 거의 다 보일 정도가 되자 침을 꿀꺽 삼킨 경비병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면서도 "좋아. 다음!" 하고 외치며 마차의 문을 거칠게 닫았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카시야는 얼른 벗어두었던 상의와 조끼를 단단히 챙겨 입고 마차의 창을 가린 커튼을 살짝 열어 바깥을 살폈다.
카리나 궁은 황제가 여름에나 들르는 행궁이라 길을 헤맬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작은 규모의 성 답지 않게 꽤 많은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제 목숨은 아까웠나보군.'
밖에서는 제 아들들과 한창 때의 젊은이들,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흙먼지와 함께 뒹굴며 죽어가고 있는데, 황제라는 작자는 평화로운 뒷방에 숨어 한가로이 지내고 있다. 잘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괜찮아 보이는 황제는 아니었다.
툴라가 말한 동쪽 탑은 멀리서 보기에도 눈에 띄었다. 외따로 떨어져있는데다 허름한 외양은 그곳이 절대 황비에게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거기에 잠입해야하는 카시야에게는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과 함께 여러모로 유리해보였다. 하지만 성의 입구 부근부터 동쪽 탑까지 가는 길에는 곳곳에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고, 소란이라도 일어난다면 훨씬 더 많은 병력이 순식간에 에워쌀 것임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창녀를 실은 마차들은 귀족들의 마차가 서는 궁의 정문 쪽이 아니라 궁 안에서 쓰는 물품이나 자재가 들락거리는 뒷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마차가 불빛도 거의 비추지 않는 뒤쪽 정원 쪽문을 향하는 중간에 카시야는 재빨리 마차 문을 열고 정원의 나무들 틈으로 몸을 날렸다. 분명 마부는 마차의 문이 열리고 사람이 사라진 것을 느꼈을 텐데도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은 채 태연히 쪽문을 지나 도로 성문으로 말을 몰았다.
카시야가 내린 카리나 궁의 뒤쪽 쪽문은 다행히 성의 동쪽이었다. 엘레나 황비가 갇혀 있는 동쪽 탑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더더욱 음침한 탑이었다. 탑 벽은 오래된 담쟁이가 덮혀 칙칙한 갈색을 띄었고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이 없었다. 탑의 입구에만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어 그곳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릴뿐이었다.
'하나, 둘, …총 여섯 명.'
입구에 바싹 붙어 지키는 병사가 두 명, 탑 주변을 뱅뱅 돌면서 지키는 병사가 두 명 씩 두개 조였다.
카시야는 탑 주변을 도는 두 개 조의 병사들이 입구에서 스쳐지나가는 때를 기다렸다. 서서히 온몸의 신경이 예민하게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카시야는 제 안의 에너지를 폭발시키기 바로 직전의 그 긴장감이 좋았다. 굶주린 맹수가 먹잇감을 향해 달려들기 직전이 그럴 것이다.
두 개 조의 병사들이 탑 입구에서 서로 스쳐지나 다시 탑 주변으로 사라지자마자, 카시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퍼벅!
그녀가 날린 독 발린 단검이 허공을 가르고 탑 입구를 지키고 선 병사들의 목에 박혔다. 그들은 맹독 때문에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제자리에 풀썩 고꾸라졌다. 카시야는 허리춤에 매여 있던 갈고리 달린 로프를 풀어 2층 높이의 창문으로 던졌다. 그리고 단단히 매인 로프를 잡고 순식간에 2층 창문으로 기어 올라가 창문 안으로 몸을 날려 돌계단에 착지한 후 기감을 넓히며 조용히 탑 꼭대기를 향했다.
황제는 타셀이 제 모친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황비 혼자 있는 이 탑의 경비병이 이렇게나 많은 것일 테지만, 경비병들의 근무 태도는 형편없었다. 아마 방에서 나올 일도 없는 황비인데다 찾아올 이도 없으니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으려면 지겹기도 할 것이다. 탑 꼭대기로 향하는 중간 중간 경비병들이 있었지만, 어떤 놈들은 계단에 퍼질러 앉아 자고 있고, 어떤 놈들은 중간 중간에 마련된 작은 방에 모여 포커를 치느라 바빴다. 아이러니하게도 근무태도 불량이 그들의 목숨을 살렸다. 카시야는 졸고 있는 병사들은 빠르게 해치우고, 놀고 있는 병사들 곁은 기척 없이 스쳐지나갔다. 워낙에 시끌벅적하게 놀고 있던 터라 죽어가는 동료의 신음소리가 들렸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확실히 탑 꼭대기가 가까워오자 경비병이 나름 제대로 서 있었다.
'이제부터는 속도전이겠네.'
어떻게 하든 소란이 생길 것이다. 아래쪽에서 달려오기 전까지 탑 꼭대기를 지키는 병사들을 해치우고, 방 안에 들어가 황비와 사라져야 한다. 카시야는 양쪽 허리춤에 달린 곡도 두 개를 조심스럽게 그러쥐어 칼집에서 빼냈다. 기감을 펼쳐 느껴본 바로는 방이 있는 곳까지 총 일곱 명의 병사가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카시야는 두 세 걸음 뒤로 물러나 몸을 움츠렸다가 힘을 폭발시키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누, 누구냣! 커헉!"
X자로 시원하게 내리지른 칼날 사이로 두 명의 병사가 쓰러지며 검붉은 피가 돌벽에 흩뿌려졌다. 비릿한 피 냄새는 인간이 개보다 잘 맡는다. 소리보다 냄새에 반응한 다른 병사들이 칼을 빼들며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하지만 그들이 휘두르는 칼날보다 낮은 곳에서 휘도는 카시야의 곡도가 그들의 다리를 먼저 앗아갔다. 자비로운 그녀는 그들이 고통을 느끼는 시간을 줄여주기 위해 넘어진 그들의 목을 곧바로 내리쳤다. 검무를 추듯 곡도 두 개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또 다시 내려온 다른 병사의 칼날을 막은 그녀는 무릎을 굽혔다가 있는 힘껏 내지르며 남성의 급소를 걷어찼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던 그 병사 역시 금방 조용한 죽음을 맞이했다.
카시야가 탑 꼭대기에 거의 다다를 즈음이 되어서야 다른 병사들의 죽음이 전해졌는지, 아래에서부터 소란스러운 기운이 번져왔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늦었다. 누군가가 "뭐? 누가 죽었다고?" 라며 소리 지르는 게 들린 순간, 카시야는 칼을 뽑기도 전에 그녀의 발차기에 맞아 고꾸라진 병사의 목을 깔끔하게 긋고는 그의 허리춤에서 열쇠를 꺼내 황비가 갇혀있는 방문을 열었다.
조용히 나무문을 열었다가 닫아 단단히 잠그고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주변은 고요했다. 방 안에는 창문에 덧문이 닫혀있어 빛도 하나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카시야는 급박한 와중에도 가만히 제 오감을 끌어올렸다. 여관에서처럼 곧 주변의 인기척이 느껴져 왔다.
'아래에서부터 병사들이 오고 있어. 그런데… 이 방에서는…!'
카시야는 황급히 품에서 성냥을 꺼내 긋고 주머니에 있던 조그만 초에 불을 붙였다.
"…!"
탑 꼭대기의 방 안에는, 엘레나 황비로 추정되는 여자가 있었다. 다만, 살아있는 여자는 아니었다.
카시야는 방 한가운데 버려지듯 놓인 어떤 여자의 백골 시신에 다가섰다. 백골이 되었을 정도니 죽은지는 오래 되었을 것이다. 아마, 이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제기랄…. 설마 했는데….'
아마 타셀도 이 상황을 걱정해 그동안 그렇게나 황비를 꺼내오고자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카시야 역시 카리나 궁으로 오면서 이 상황을 가장 염려했었다.
물론 그 백골이 엘레나 황비가 아닐 수도 있었지만 그럴 확률은 높지 않았다. 살아있는 황비를 앞에다 보이며 타셀을 협박하는 것이 훨씬 효과가 좋을 텐데, 황비는 숨겨놓고 누군가의 백골만 이렇게 따로 가두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으니까.
쾅-! 쾅-!
밖에서부터 병사들이 나무문을 부수려고 뭔가로 부딪쳐왔다.
카시야는 품에서 타셀이 준 황금구를 꺼내고 제 발 밑에 있는 불쌍한 여인의 백골을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 위에 그러모아 단단히 품에 안았다.
콰직-!
나무문이 바깥에서 찍어대는 힘을 못 이기고 부서지기 시작한 순간 카시야는 황금구를 바닥에 던져 깨뜨리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황금구를 바닥에 내리치는 순간 눈앞이 번쩍 하는 것 같더니 잠시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카시야는 제 품에 안은 백골을 놓치지 않으려고 힘을 꽉 주었다.
털썩.
갑자기 발아래 단단한 지면이 느껴지며 중심을 잃은 카시야가 비틀거리다 넘어졌다.
"카시야 경!"
"헉!"
품에 안은 드레스 더미를 놓치지 않기 위해 팔을 풀지 않아 카시야는 바닥을 한 번 굴러야 했다. 몸이 바닥에 부딪힌 충격 이후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며 눈앞에 익숙한 흙바닥이 보였다. 하지만 주변은 조용했다.
고개를 드니 경악에 물든 지크와 미하일, 그리고 하얗게 질린 타셀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시야는 아무 말 없이 비틀비틀 일어서서 막사 한 가운데 있는 커다란 테이블 위에 그녀의 품에 안은 드레스 더미를 살며시 올려놓고는 흩어진 뼈를 하나, 하나 맞춰나갔다.
"…카시야 경. 그게 뭐야? 아니지? 설마, 그게… 화, 황비 마마는 아니지?"
미하일이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내어 물었다.
카시야는 대답하지 않고 뼈를 맞추어가는 데 집중했다.
"아니라고 말해! 카시야! 야! 아니지!"
아무 말 없는 카시야에게 미하일이 달려들더니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고는 시뻘게진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목소리는 분노한 것 같았지만 사실 그것은 절규에 가까웠다.
카시야는 제가 잘못한 것 같아 고개를 떨구었다. 작전 실패다.
"야…. 아냐.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다. 중간에 첩보가 왔어. 마마의 거처가 바뀌었다고 말야. 네가 잘못 안 거야."
미하일은 이제 거의 현실을 부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피엔의 툴라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해준 카리나 궁 동쪽 탑 꼭대기까지 침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만…. 잠겨있는 탑 꼭대기 방 한가운데 이 유골이 놓여있었습니다."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꽉 쥐고 있는 미하일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가 쥔 어깨가 아파왔지만 카시야는 이대로 어깨가 부서져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미하일. 카시야 경에게서 손 떼."
타셀이 입을 열었다. 그의 낮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넋이 나간 것 같이 힘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발을 떼어 테이블 곁으로 한 발, 한 발 다가섰다.
"…어머님의 드레스가 맞아. 드레스가… 몇 벌 없었으니까, 어머님의 드레스는 내가… 다 알고 있어."
말을 마친 타셀은 입술을 꽉 다물고 시체의 썩은 물로 얼룩진 그 드레스에 가만히 손을 댔다.
막사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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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에나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코멘트 달아주신 독자님들도 정말 감사드려요.
제목은 좀 더 고민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