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9 첫걸음(1) =========================
테이블 위에 놓인 유골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타셀은 어머니의 마지막 유품이 되어버린 그 허름한 드레스를 쓰다듬었다. 자신이 출정하던 날 이 드레스를 입고 눈물로 그를 배웅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에 생생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물망초같이 청초하고 사랑스러웠던 그녀는, 아마 평범한 귀족의 딸이었다면 남편에게 사랑받는 평범한 행복을 누렸을지도 모른다. 왕녀로 태어난 그녀의 인생에 기뻤던 순간이나 행복했던 순간이라는 게 존재했을까.
타셀의 시선은 드레스의 가슴 한복판에 뚫린 구멍과 거기서부터 흘러내린 핏자국에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옆에 서있는 지크와 미하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하일은 이미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카시야는 자신이 품에 안고 온 유골을 찬찬히 살폈다. 키도 그리 크지 않은 여자인데다 뼈마저 가는 편이었다.
'자살일까, 타살일까.'
드레스에 나있는 구멍의 크기를 보아 그녀의 가슴을 찌른 칼은 단도같이 날 폭이 작은 칼이었다. 누군가 품에 칼을 숨기고 있다가 그녀와 단 둘이 남았을 때 찔렀을 수도 있고, 자신이 직접 찔렀을 수도 있었다. 물론 스스로 찔렀을 경우에도 강요된 자살일 수 있었지만.
그때 카시야는 드레스의 가슴 라인을 이루는 한 부분이 다른 부분에 비해 기묘하게 각이 잡혀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카시야가 그 부분으로 손을 뻗자 지크는 "자네 지금 뭐하는 짓인가!" 하며 언성을 높였지만 타셀이 지크를 팔로 막아 만류했다.
"이 곳이 조금… 이상합니다."
타셀이 카시야 곁으로 다가와 그녀가 가리킨 부분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옷감 사이에 뭔가가 들어 있다."
카시야는 품에서 조그마한 단도를 꺼내 그에게 건넸고 그는 조심스럽게 옷감의 재봉선을 뜯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조그맣게 접힌 종이가 들어있었다.
"그… 그건…."
신음을 흘리는 지크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타셀은 부스럭거리며 종이를 펼쳤다. 종이 한 가운데 싸여있던 조그만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작은 반지였다.
"…이건, 어머님의 유언장인 것 같구나."
한참을 들여다보던 종이를 타셀이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곁에 서있던 카시야는 종이에 쓰인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타셀. 네가 이 글을 읽을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지만, 만약 이 글을 발견하게 된다면 먼저 가는 이 어미를 용서하거라. 이제까지의 그 모든 핍박과 설움은 견딜 수 있었지만, 자식의 목숨을 위협하는 미끼가 되는 삶만큼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부디 내 죽음이 하루라도 빨리 네게 닿아 네가 살 수 있기를 기도한다. 사랑한다, 타셀. 너만이 내 삶의 유일한 빛이었단다.>
종이가 작아 많이 쓰지도 못한 그녀의 유언 아래 조그맣게 유려한 필체의 사인이 보였다. 타셀이 아무 말 않는 것을 보면, 그녀의 사인이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 타셀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저 반지가 그녀의 반지일 것이다.
엘레나는 자신 때문에 아들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황제는 제 아들의 목줄을 놓지 않으려고 죽은 황비의 장례조차 치르지 않은 채 그녀의 시체가 썩어가도록 던져두었다. 아마 그의 생각으로는 타셀 역시 죽을 테니 황비의 죽음을 알리지 않아도 별 문제 없을 거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전하…."
지크가 타셀의 곁에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눈물을 흘리던 미하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꺼이꺼이 소리 내며 울기 시작했다.
"어머님의 유골을 찾았지만 여기서도 장례를 치를 수는 없겠구나. 지크. 작은 나무 상자 하나만 가져다주게. 미하일이 뒷산에 경치가 좋은 곳을 알고 있댔지? 어머님은 거기에… 거기에 묻어드리자."
타셀의 마지막 말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지만, 그는 눈물을 삼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카시야 경. 수고 많았네. 자네 덕분에 어머님과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됐군 그래. 피곤할 테니 오늘은 이만 들어가 쉬도록 하게. 나중에 이에 합당한 포상을 내리겠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황비 마마를 보내드리는 곳까지 따르고 싶습니다."
타셀은 카시야를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타셀과 카시야, 미하일과 지크는 작은 나무 상자 하나와 삽 2개를 들고 주둔지의 뒷산에 올랐다. 황자까지 낳은 제국의 황비가 마지막 가는 길이라기엔 너무나 조촐한 추모객이었다.
그들은 미하일이 좋아하는 큰 바위 전망대까지 올라 근처의 땅을 깊게 팠다. 황비의 드레스와 유골이 담긴 상자는 그다지 크지 않아 땅을 파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타셀은 제가 직접 땅을 파고 상자를 구덩이에 넣어 흙을 덮었다. 봉분도 없이 편평한 무덤이었지만 그들은 바로 곁에 있는 커다란 바위 전망대가 이 무덤의 비석이라 여기며 아쉬움을 달랬다.
넷은 바위 위에 서서 주둔지를 내려다보며 각기 다른 회한에 젖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카시야가 타셀을 향해 물었다.
"나를 따르는 이들과 함께 국경 지역으로 이동할 계획이야. 남아있는 자들은 황제파인 아슬란 부사령관이 책임지겠지."
말은 쉬웠지만 그 사이에 발생할 진통은 만만치 않을 게 분명했다.
사병들은 대부분 타셀의 됨됨이에 반해 그를 따를 확률이 높았지만 기사들 중 귀족들은 타셀을 따르고 싶어도 황성에 남아있는 가족들 때문에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황제파인 노기사들도 몇 있어서 그들이 발 빠르게 황제에게 타셀의 배신을 고해바칠 게 뻔했다. 제 1황자라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황제가 함부로 타셀을 쫓으라고 명령하기는 어렵겠지만, 만약 소문처럼 이미 황제와 1황자가 모종의 협상을 타결시켰다면 변방으로 향하는 도중 어떤 공격을 받게 될지 모른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시야는 한편으로는 엘레나 황비가 죽은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물론 그녀의 일생이 안됐다고는 생각했다. 사실 그녀의 처지를 동정하게 된 것만으로도 전생의 자신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다. 하지만 역시나 전생의 자신을 버릴 수 없는 카시야는, 타셀이 움직이기에는 엘레나 황비가 없는 편이 더 낫다는 계산을 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기계에서 사람이 되는 과정은 굉장히 혼란스럽군.'
자신이 전생에 '사람 죽이는 기계'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카시야는 그 말이 굉장히 적절하다고도 여겼었다. 자신은 사람을 죽이는 데 감정적인 고통을 느끼지도 않았고, 명령에 의해 움직였으며, 효율을 따졌다. 그래서 일하기가 편했다.
하지만 죽음에서 깨어난 이후로는 전생에서 느끼지 못했던 온갖 감정이 시시때때로 느껴졌다. 그것은 자신이 인간이 된 것 같은 반가움을 주면서도, 반대로 '일하기에는 불편'했다.
그녀는 때때로 자신이 눈을 뜨기 직전 경험했던 사후세계를 떠올렸다.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던 살인의 추억과 그에 뒤따랐던 고통…. 하지만 그때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들의 고통을, 이 세상에서는 조금씩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신이 원하는 건 그녀의 참회일까.
'아직도 잘은 모르겠단 말이지.'
자신의 전생이 굉장히 비정상적이었다는 것은 그 삶을 살면서도 자각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저질렀던 살인이 이세계에서 눈뜨게 된 원인은 아닐 것 같았다. 단지 사람을 죽인 게 죄라면 전쟁통에서 죄 없는 사람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녀는 신이 그녀를 다시 돌려보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지난번 생과는 다르게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사람으로서의 감정을 배우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먹고 자고 입는 것을 삶과 연관시켜 생각하고, 남들이 ‘꿈’이라고 하는 삶의 목표를 정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야말로 기계에서 사람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기가 어려웠던 그녀는, 그나마 가장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타셀을 따르다보면 뭔가 길이 보이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제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시면 최선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카시야는 무덤덤하게 타셀에게 말했다.
타셀은 고개를 돌려 이 감정 없는 인형 같은 여기사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병상에서 갓 일어났을 때보다 훨씬 더 탄탄해진 몸을 하고 있는 그녀는 강인해보였다. 녹색 눈동자는 일말의 망설임이나 괴로움도 없이 그 다음 목적을 향하고 있었고 그 거침없이 순수한 눈빛에 타셀은 오히려 망설여졌다. 이 여기사는 자신이 명하는 대로 움직여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자신의 말 한마디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카시야 경. 자네가 바라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네? 글쎄요. 전하께서 이룩하시는 세상이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니, 나는 자네의 생각을 묻는 거야. 자네는 어떤 세상이 좋을 것 같아?"
타셀의 물음에 카시야는 말문이 막혔다. 좋은 세상 따위, 알지 못했으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백성들이 굶지 않고 사는 나라가 좋은 나라 아닐까요?"
"굶지만 않으면 될까? 전쟁이 나기 전에는 제국민들도 굶지는 않았네. 그러면 그 상태가 좋은 나라인걸까?"
"음…. 글쎄요. 저는 사실, 먹고 자는 것만 편안해도 별 상관은 없던데요."
카시야는 타셀이 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지 당혹스러웠다.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은 타셀이 자신의 참모들과 고민해야 할 내용이다. 자신은 그를 믿고 그의 도구가 되어 돕기만 하면….
'아…! 나는 또 도구가 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모종의 깨달음을 느낀 카시야의 얼굴을 보고 타셀은 나지막이 짧은 웃음을 흘렸다.
"카시야 경. 나는 내가 바라는 나라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야. 모두의 좋은 생각을 모아 더 나은 나라를 만들고 싶네. 자네도 같이 고민해주겠나? 그게 자네가 해줘야 할 첫 번째 임무야."
전생에서는 그 누구도 그녀의 생각 따위를 묻지 않았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그녀의 생각을 묻는 상황에 놓이자 어색하면서도 묘한 감동이 느껴졌다.
'그래…. 나도 생각을 할 수 있어. 나도 인간이야.'
'나도 인간'이라는 생각. 그것이 카시야를 처음으로 흔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어제, 오늘 조회수+선작수+추천수가 어마어마하네요. 감사합니다.
재미있다고 해주셔서 정말 용기가 많이 났어요.
그리고 쇼에나 님, 후쿠를 저한테 몰아주시는건가요?
이건... 연참을 하라는 압박이신거죠? 8ㅁ8
(눈치없는 자까가 오늘에서야 깨달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리기 위해, 오늘밤은 내일이 없는 듯 3연참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