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홍의 카르마-20화 (20/134)

00020 첫걸음(2) =========================

카시야가 카리나 궁으로 떠나있는 동안 타셀 측도 바쁘게 물밑 교섭을 진행시켜온 상태였다.

엘레나 황비의 유해가 갇혀있던 탑이 공격받고 유해가 사라졌다는 것은 순식간에 황제의 귀에 들어갔을 테니 타셀도 재빨리 움직여야 했다. 그들은 밤새 국경 및 변방 지역의 귀족들과 어디서 어떻게 연합해나갈지 작전을 짜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전군(全軍)을 모아 폭탄선언을 했다. 선언을 위해 앞으로 나선 것은 지크였다.

"그동안 이 무의미한 전쟁으로 무고한 백성들이 죽고 다쳤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제국에 충성해온 귀족들이 하루아침에 양편으로 쪼개져 자신의 군대와 가산을 바치고 있다. 그 대가가 무엇인가! 우리는 반란군이 황제와 내통하고 있으며, 그들의 목적이 2황자 전하를 해치고 이 나라를 반으로 쪼개 제 배를 불리는 데 있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 황제는 2황자 전하의 모후인 엘레나 파반느 칸 황비 마마를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그 사실을 은폐했다. 그들은 귀족과 백성들의 충성을 당연히 제가 누려야 할 것으로 보고 있지만, 2황자 전하께서는 그들과 다르다. 전하는 더 이상 황가의 수탈을 좌시하지 않기로 결심하시고 이미 전하께 충성을 맹세한 변경백 및 중소 귀족들의 연합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어나가실 것임을 이 자리에서 선언하는 바이다. 또한, 전하께서는 각자의 사정으로 전하를 따르지 못하는 자들의 이탈을 용서하실 것이니 전하를 따를 자들만 두 시간 뒤 북서쪽으로 전진한다."

지크의 선언에 뒤이어 타셀이 앞으로 나섰다.

"갑작스러운 선언에 혼란스러울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우리 군은 반란군과 후방 황제군의 양동 작전으로 큰 피해를 입을 것이 자명해졌기 때문에 나로서도 어려운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고, 귀족들은 백성을 보살핌과 동시에 제국의 현재를 떠받치고, 황제는 제국의 미래를 제시하는 이상적인 나라를 위해, 그대들의 힘을 모아주길 바란다."

그때 황제파인 백전노장 아슬란 부사령관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황제 폐하께 반역한 네 놈 편에 설 병사들이 있을 성 싶으냐!"

"그거야 모를 일이죠. 황성으로 돌아가면 황제께 안부 인사나 전해주십시오."

차가운 타셀의 대답에 아슬란은 꽉 쥔 주먹만 부들부들 떨다가 제 휘하의 기사들을 서둘러 모으기 시작했다.

군사들에게는 고민할 수 있는 2시간이 주어졌다.

웅성이는 그들의 목소리에 주둔지 전역이 시끄러웠다.

"카, 카시야. 우리는 어떻게 하지?"

쿠론이 불안한 낯빛으로 카시야에게 물었다.

"쿠론. 나는 2황자 전하를 따르겠다. 그리고 너도 따라줬으면 좋겠어. 황제에게 붙어봤자 우리 같은 평민들에게는 이득이 없고, 나는 2황자 전하가 승리하실 거라고 믿는다."

카시야는 담담한 얼굴로 제 군장을 단단히 싸며 말했다. 그러자 쿠론은 여러 말 않고 자신의 군장을 싸기 시작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쿠론은 카시야의 변화를 받아들였다. 카시야는 예전에 그가 알던 평범하고 소박한 아가씨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여전히 믿을 수 있다. 쿠론은 카시야가 저보고 죽으라고 한대도 의심 없이 죽을 수 있었다. 팍팍하고 극단적인 삶이 만든 한 사람에 대한 믿음은 이성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견고했다.

평민 출신의 군사들은 생각보다 판단이 빨랐다.

"어느 쪽에 속해도 죽는 게 매한가지라면, 그나마 2황자 전하 아래서 죽는 게 낫겠지. 우릴 인간으로 봐주시는 건 2황자 전하뿐이야."

"전하 말씀이 맞아! 이 썩은 나라를 뒤집어엎어야 할 때가 온 거라고! 반란군에게 죽은 우리 가족의 복수를 한다는 데 달라지는 것도 없고 말야."

하지만 귀족 출신의 기사들은 사정이 달랐다.

"티크 경.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저야 출정할 때부터 2황자 전하의 사람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만, 경은 황성에 가족들이 있지 않습니까?"

"말도 마시오. 정말 당황스럽군. 난 일단 황성으로 돌아가야 할 듯하오. 가족들의 안전부터 챙겨야지."

"황제 폐하와 반란군이 서로 내통하고 있다는 게 사실일까요?"

"나도 소문으로 들었소.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고전할 이유가 없지. 황제 폐하가 2황자를 없애기 위해 반란군을 끌어들였다는 게 전혀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니란 말이오."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반란군에게 지면 황제 폐하도 무사하실 리가 없지 않소?"

"뭘 모르는 소리. 이미 이 전쟁 자체는 예전에 다 결말이 났다더군. 황제 폐하와 1황자 사이에서 서로 합의가 다 이루어졌다는 말일세. 우리가 반란군에게 패하면 협정 형식으로 나라를 쪼갤 거라고 하더이다."

평민들보다 전쟁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있던 귀족들은 언젠가 닥칠 거라고 생각했던 선택의 순간이 생각보다는 너무 갑작스러워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고 순식간에 흘러버리고 말았다.

"2황자 전하를 따라 북서쪽으로 전진할 군사들은 기존의 부대별로 서쪽에, 황성으로 돌아갈 군사들은 동쪽에 서도록 하라!"

우렁찬 미하일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병사들이 좌우로 갈려 정렬하기 시작하자 붉은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동쪽의 황성행 군사들의 우두머리로 선 아슬란 부사령관은 타셀을 노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네가 웃을 수 있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다. 네 밑으로 몇이나 모일 것 같으냐!"

그는 병사들의 정렬이 끝나고 타셀 측이 북서쪽으로 향하면 바로 제 휘하의 병사들로 그들을 뒤쫓아 몰살시킨 후 타셀의 목을 황제에게 갖다 바칠 생각이었다. 타셀의 밑으로 병사가 얼마 모이지 않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에 가능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자욱한 흙먼지가 가라앉고 나자 아슬란의 낯빛이 낭패로 물들었다.

타셀군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만한 인원이 서쪽 편에 가 정렬해있었던 것이다.

황성으로 돌아갈 병사는 귀족 기사들이 전부였다. 심지어 귀족 기사마저 3할 정도는 타셀 편으로 돌아선 후였다.

이렇게 되면 타셀 몰래 군사를 장악하라는 밀명을 받고 파견된 그의 입장까지 난처해지는 판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군사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노력은 조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고위 귀족인 그에게 아랫것들의 복종은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타셀을 얕본 탓도 있었다. 자신이 봐온 타셀은 늘 억압되어 있으면서도 황제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는 유약한 황자였다. 하지만 황성에서 풀려난 타셀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내재된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 그것을 무시한 것은 아슬란이었다.

"아슬란 백작. 다음번에 만나면 적이겠군요. 그때까지 부디 몸 건강하시길."

타셀은 아슬란을 향해 고개를 까딱해 보이며 인사인지 경고일지 모를 말을 읊조렸다.

아슬란이 휘하의 귀족 기사들을 거느리고 황성으로 떠나자 곧이어 타셀의 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군! 북서쪽으로!!!"

제국의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한 타셀의 전진이 시작되고 있었다.

***

"뭐야! 그게 말이 되느냐! 한 명의 침입자에게 1개 부대 인원이 뚫렸다니! 책임자의 목을 베어라!"

임신한 멜라니아 대신 어린 후궁의 교태어린 품에서 열락의 밤을 맞으려는 찰나 다급하게 전해 받은 소식에 황제 알테리온은 격노하여 외쳤다.

엘레나가 죽었다는 사실은 절대 타셀에게 전해져서는 안 될 기밀이었다. 알테리온은 타셀에게 엘레나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은 황성의 외톨이였으니까 말이다. 그랬기 때문에 꼴도 보기 싫은 엘레나를 카리나 궁까지 데려온 것이었고, 반대로 말하자면 그래야 할 만큼 엘레나는 중요한 인질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엘레나는 카리나 궁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엘레나의 죽음을 알리려던 타셀의 첩자는 가까스로 죽여 입막음을 할 수 있었지만 엘레나의 죽음은 알테리온에게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 결국 그는 엘레나의 죽음을 알고 있는 자들을 모두 소리 소문 없이 죽여 버리고 엘레나의 방을 이중, 삼중의 병사로 에워싸 경계했다. 죽은 자의 처치를 위한 물품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이면 엘레나의 죽음이 새어 나갈까봐 그녀의 시체를 건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방은 궁 제일 구석의 작은 방이었고, 그 안에 값나가는 물건도 없었으니 거기에서 시체가 썩든 말든 그는 별 상관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멜라니아의 임신이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었다. 심한 입덧을 시작한 멜라니아는 엘레나의 방에서 스며 나오는 시체 썩는 냄새를 기민하게 알아채고는 속이 뒤집어진다며 조금도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덕분에 궁과 외떨어진 동쪽 탑 꼭대기 방에 엘레나의 시체를 옮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경계심도 누그러지고 만 것인지, 궁내에 엘레나의 시체가 있을 때에는 엘레나의 방에 늘 예민하게 신경을 쓰던 알테리온도 동쪽 탑에까지는 별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의 무심함은 곧 병사들의 나태로 이어졌고, 그것이 오늘의 낭패를 가져왔다.

"제기랄! 도대체 어떻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단 말이냐! 마법사가 침입한 게냐!"

마법사가 침입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탑 입구에서 죽은 경비병들의 목에 깊이 박혀있던 비수나 섬뜩할 정도로 정확히 병사들의 명줄을 끊어놓은 모습이 납득가지 않았지만, 덧창도 벗겨지지 않은 밀실에서 시체와 함께 감쪽같이 사라진 것은 마법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공간 이동 마법은 웬만한 고위 마법사가 아니고는 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는데, 공간 이동이 자유롭다면 왜 애초에 곧바로 탑의 꼭대기 방에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것도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어쨌든 엘레나의 시체를 빼 갈 사람은 타셀 말고는 없었다. 타셀이 엘레나의 죽음을 알게 됐다면 자신에게 마각을 드러내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한때 용맹한 전장의 신이었던 알테리온은 이미 군살이 덕지덕지 붙은 늙은 사내에 불과했다. 자신이 믿을 것은 지하에 은밀히 숨겨져 있는 전설의 신검, 카라볼그 뿐이었다. 만약 그 검을 타셀에게 넘겼다면 반란군 진압쯤이야 한 달 만에도 끝날 일이었지만, 반란군의 진압보다 타셀의 존재가 더 탐탁지 않았던 알테리온은 타셀이 죽기를 바라며 절반도 채 안 되는 군사들만 내주고 그를 전쟁터로 내몰았다. 타셀이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버티리라고는, 심지어 반란군의 우위를 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자 한편으로는 카라볼그를 내주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까지 느껴졌다. 반란군 진압이 끝난 후 타셀이 그 검을 자신에게 얌전히 되돌려줄 리가 없다. 타셀과 엘레나를 핍박했던 자신에게 겨눠질 게 분명한 그 검을, 알테리온은 몰래 숨겨놓고 1황자 케일런과 협상했던 것이다.

'내가 카라볼그를 들 수 없게 됐다는 걸 아직 케일런은 모르고 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군. 놈이 알게 되기 전에 뭔가 손을 써야해.'

알테리온이 카라볼그를 들 수 없게 된지는 꽤 오래되었다. 제국의 완성 몇 년 전쯤부터 카라볼그는 그 신비로운 빛을 발하지 않게 되었다. 카라볼그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검이기는 했지만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그 신비로운 힘이 발휘되지 않으면 '절대적인 승리'는 보장할 수가 없었다.

검의 자세한 성질도 파악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휘둘러왔을 뿐인 그는, 비밀리에 조사한 끝에 검에 반응하던 자신의 마력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자신이 마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알테리온이었다. 그의 마력이 사라진 이유는 마법사들도 알지 못했다. 그저 너무 많은 전쟁을 치르느라 마력을 다 소모해버린 것 같다는 의견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제국이 완성된 상태였기 때문에 알테리온은 자신이 카라볼그의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마력을 잃어서인지 그의 육체와 정신은 빠르게 늙어갔다. 하지만 이미 권력의 정점에서 권력이 주는 온갖 달콤한 과실만을 먹어 치워댄 그는 자신의 상태를 냉철히 판단하지 못하고 탐욕스러워져만 갔다. 지금도 자신이 조금만 노력하면 곧 카라볼그를 들 수 있을 것이고, 카라볼그를 들기만 하면 반란군쯤은 금방 무찌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 작품 후기 ============================

3연참 하지만, 회차별 추천이랑 코멘은 잊으시면 안돼요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