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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21화 (21/134)

00021 첫걸음(3) =========================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을 한다. 주변 민가에 피해가 없도록 하라. 일반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하늘이 진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하자 선두에서 지휘하던 타셀이 야영을 결정했다.

뒤따르던 각 부대장들은 자신이 맡은 부대원들이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주의시키는 한편, 서둘러 진지를 꾸리도록 재촉했다.

북서쪽으로 향하는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그들이 하던 전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대부분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황제를 뒤돌아선 타셀의 결정이 오히려 그들의 환영을 받았다.

'하긴, 그 전쟁을 계속 했다가는, 타셀의 아래 있다는 이유만으로 몰살당할 운명이었으니까.'

카시야는 천막의 한쪽 귀퉁이를 바닥에 고정시키며 생각했다. 덩치 큰 쿠론이 천막의 기둥을 세우고, 카시야는 천막의 귀퉁이를 돌아가며 바닥에 고정시키자 천막 1기가 금방 지어졌다. 천막을 다 짓고 나자 쿠론과 카시야는 근처에 모닥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쿠론은 카시야가 능숙하게 부싯돌을 부딪쳐 불을 일으키는 것을 보며 또다시 이질감을 느꼈다. 안개숲에서 생환하기 전의 그녀는 스스로 불을 피울 줄 몰랐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불을 피울 줄 알게 되었느냐고 묻는 게 두려웠다. 지금의 카시야마저 잃을 수는 없던 쿠론은, 그녀가 누군가에게서 배웠겠거니 하고 애써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잠잘 곳이 만들어지고 음식을 해먹을 불이 피워지자 하루 종일 무시무시한 기세로 북서쪽을 향하던 병사들에게 드디어 작은 여유가 드리웠다. 고기와 야채를 넣어 끓인 스프와 갓 구운 빵을 배급받은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며 배를 채웠다. 카시야는 여전히 쿠론과 둘이서만 식사를 했지만, 어디선가는 고향의 노래라며 한 곡조 뽑아 올리고, 어디선가는 시시껄렁한 농담에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고향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푸근한 기분이 드는 곳일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노곤노곤해지는 것이었다. 술에 지나치게 취한 이들이 선을 넘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헤에…. 소문의 그 카시야 경이로구만. 얘기를 듣자허니, 2황자 전하께서 꽤 아끼신다던데…."

"크크큭, 전하도 남자는 남자니까 말여. 그래도 더 예쁘장한 여기사들도 많은데 왜 하필 이런 선머슴같은 여자를 그랬으까잉."

그들의 불콰하게 물든 얼굴만큼이나 흐리멍덩한 말투에 발끈한 것은 다름 아닌 쿠론이었다.

"뭐야, 이 잡놈들이!"

"어어어… 지 애인 좀 놀렸다고 화가 났나 본데?"

"아, 그래도 저 놈은 좋것네. 다름 아닌 황자 전하하고 애인을 나눠먹잖여. 지 애인을 바쳤는디, 그래도 콩고물 좀 떨어지지 않것어?"

더 참지 못한 쿠론이 모닥불을 뒤적거리려고 곁에 두었던 나무 막대기를 들고 벌떡 일어나려는데 카시야가 쿠론을 막았다.

"관둬, 쿠론. 이런 것에 일일이 반응했다간 국경에 닿기도 전에 힘이 다 빠질 거다."

"힘이 다 빠지든 말든, 이것들의 주둥이는 다 조져놔야겠어!"

이를 바득바득 갈며 카시야를 향해 조롱을 날리던 이들에게 다가가려던 쿠론은 카시야가 일어서서 그 앞을 막아서자 이해 못하겠다는 눈으로 카시야를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술에 취한 둘은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을 말한 거니까 그러지. 어이, 카시야. 나도 허리 쓰는 거 하나는 죽여주는데, 어때? 저기 숲 속에서 한 번? 응? 응?"

그러면서 제 옆의 놈을 붙잡고 야릇하게 허리를 놀리는 시늉을 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쿠론이 막대기를 그들에게 휘둘렀다. 하지만 병사들끼리 소란스럽게 몸싸움이 나면 이유를 불문하고 양쪽 모두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 병영 내 규칙이었다. 카시야는 저 때문에 쿠론이 벌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쿠론이 휘두르는 막대기를 쥐고 있던 숟가락으로 막아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두 녀석은 배꼽이 빠져라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하! 저 놈 저거, 몸집만 커다랬지, 실력은 아주 젬병이구만? 여자가 숟가락으로 막을 수 있는 정도의 검이면, 전쟁에서 제일 먼저 죽을 수준인데?"

"이제까지 용하게 살아남었네. 푸하하하하하!"

하지만 그들은 곧 카시야가 휘두른 숟가락에 머리통을 맞고 크헉, 하는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대충 때린 것 같아 보이지만 어디를 때려야 골이 제대로 울리는지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그들이 느낀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숟가락에 맞고 나자빠진 네놈들 목숨이나 잘 챙기시지."

카시야는 그들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한마디 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아직 다 먹지 못한 빵을 뜯어 스프에 적셨다. 쿠론 역시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아무리 상대방에게 겁을 주려는 정도로만 휘두른 나무 막대기지만, 그의 체구에서 나오는 힘은 한낱 여기사가 숟가락 하나로 막아설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와서 식사나 마저 해."

카시야의 부름에 쿠론은 엉거주춤하게 카시야 옆의 제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바닥에 나동그라져있던 두 녀석은 다시 카시야에게 달려들며 상욕을 내뱉었지만 카시야가 다시 숟가락을 들고 매섭게 노려보자 주춤거리더니 또다시 온갖 상스러운 말을 주워 담으며 멀리 사라졌다.

"내가 안개숲에 가기 전엔 저런 놈들이 없었어? 여기사로 지내다보면 성희롱이나 성추행은 일상적이었을 텐데."

역시나 남 얘기하듯 말하는 카시야를, 쿠론은 복잡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네가 안개숲에 가기 전엔 나랑 다른 부대여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아주 잘 알겠다. 저런 인간 말종들은 어딜 가나 있으니까…. 너는, 저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아?"

쿠론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카시야는 그릇에 마지막 남은 스프를 싹싹 발라낸 빵을 씹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한테 위해를 가하는 게 아니잖아? 만약 나한테 위해를 가하는 거라면 가만있지 않겠지만, 아까 그 녀석들은 그저 취기에 장난친 것뿐이니까."

"하, 하지만 여성으로서 말야! 여성으로서의 네 명예를 더럽히는 거잖아!"

"뭐? 하하하하하하! 그런 걸 따지는 건, 모르긴 몰라도 귀족 영애들이겠지. 전쟁터에서 살아가면서 운운할 명예는 기사로서의 명예, 그 뿐이다."

쿠론은 순간, 아루엘로 기사단에서 그녀에게 호감을 가진 귀족 기사가 그녀에게 농지거리로 희롱한 일을 가지고 한 달 동안이나 그 기사를 피해 다녔던 카시야를 떠올렸다. 그녀는 '얼굴이 그렇게 하얀 것을 보니, 속살은 얼마나 더 하얄지 궁금하다'던 그 기사의 말을 무척이나 수치스러워했다. 도저히 그 카시야와 지금의 카시야가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너는 정말 많이 변했구나."

쿠론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자 카시야는 흘끗 쿠론을 쳐다보다가 셔츠와 바지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털어내며 일어섰다.

"내가 누구든 간에, 난 너를 내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걸로는 안 될까? 내가 기억을 잃기 전의 나로 돌아가지 않으면 네 친구가 될 수 없는 거야?"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있던 쿠론이 그녀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게 아니라고 부정하려던 그는 카시야의 투명한 녹색 눈동자가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녀의 눈빛은 더없이 강인하고 차분하면서도 믿음직스러웠다.

"너는 내 친구야.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쿠론은 겨우 목소리를 끌어내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카시야가 좀처럼 웃지 않는 입술을 휘어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한편 타셀은 진군하는 와중에도 앞으로의 상황을 계산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귀족 기사들이 대거 빠져나간 타셀의 군사와 변방 귀족 세력의 군사가 연합하게 되면 그 안에서의 군제와 조직도 새롭게 개편해야 했고, 측근들의 역할도 새로 나누어야 했다. 그런 타셀의 머릿속에는 카시야라는 카드 역시 존재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있는지 조차 몰랐던 여기사였지만,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뒤 그녀는 그 누구보다 눈에 띄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 끊임없는 자기 단련 덕에 점차 강인해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 육체, 도대체 어디서 배운 것인지 모를 암기. 타셀은 아직도 연못에서 그녀가 자신의 목에 겨눴던 날붙이의 오싹함을 잊을 수가 없었다. 오싹하면서도, 묘하게 흥분되던 그 느낌을 말이다. 카시야에 대한 관심은 타셀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닌지, 쌍둥이 기사, 특히 미하일이 카시야를 자주 언급했다.

"그 녀석은 왠지, 이유는 알 수 없는데 말이죠, 어딘지 믿음직스럽지 않습니까? 내 뒤를 맡겨도 좋을 것 같은 신뢰감이 든단 말이죠."

"겨우 여자한테 뒤를 맡겨야 할 만큼 믿을 사람이 없든?"

"넌 카시야가 움직이는 걸 못 봐서 그래. 언제 한 번 꼭 대련해봐라. 기습을 해봐도 좋고. 아, 근데 기습할 때는 죽을 각오도 해야 할 거야. 크크큭."

곁에서 미하일과 지크가 카시야에 대해 얘기할 때는 타셀도 카시야에 대해 조용히 떠올리곤 했다.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이제는 거의 암갈색처럼 보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꾀죄죄했지만, 그 머리카락에 가려진 두 눈동자만큼은 깊이를 알 수 없었다. 무심한듯하면서도 영민하고, 잔혹한듯하면서도 슬퍼 보인다.

'매혹적인 눈이긴 하지. 씻기고 꾸며놓으면 꽤 미인일지도. …하아…. 내가 여자를 오래 못 보긴 했나보군. 아무리 그래도 우리군의 기사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다니.'

타셀은 고개를 흔들어 방금 자신이 했던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충성스러운 부하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성적인 대상으로 여겼다는 데 대해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조만간 지크나 미하일 녀석을 보고도 군침을 흘릴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빨리 변경에 닿고 싶군.'

변경에는 그래도 귀족들의 성이 있고, 나풀거리는 귀족 영애들을 보면 카시야에 대한 이 불순한 마음도 사그라들 것 같았다. 그러길 빌었다.

타셀의 군대가 약속했던 지역에 닿은 것은 그로부터 열흘 뒤였다.

그 사이 1황자 진영과 황제 진영 모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상대의 전력과 꿍꿍이를 짐작해보며 머리만 굴리고 있었다.

서로가 적인 세 진영의 팽팽한 화력이 서로의 발목을 묶었다. 어느 두 진영이 싸움을 시작하면, 나머지 한 진영이 어부지리 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누군가와의 전략적 동맹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케일런 진영과 황제 진영은 일이 이렇게 되기 전부터 이미 물밑 교섭을 벌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교섭이 쉽사리 타결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한없이 0에 가까운 신뢰도였다.

"이미 내정된 황태자위를 손바닥 뒤집듯이 바꾼 황제가 설마하니 이제 와서 협약을 지키겠습니까? 차라리 타셀 측과 손잡고 황제부터 밀어버리는 것이 속은 편할 겁니다."

"하지만 그 이후 타셀과 맞서게 됐을 때 오히려 불리할 수 있습니다. 아직 타셀의 군사 숫자가 적을 때 황제를 이용해 그를 먼저 치면, 그 이후에 황제를 치는 것쯤이야 쉬울 겁니다. 아무리 카라볼그가 있다지만, 그는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습니다."

참모들의 얘기를 듣는 케일런의 미간이 펴질 줄을 몰랐다.

양쪽 다 맞는 말이다. 즉, 타셀과 황제 중 더 골치 아픈 것은 타셀 쪽이었다. 다만 황제 측이 갖고 있는 미지의 패가 바로 전설의 신검 카라볼그였다. 패배를 허락하지 않는 검. 하지만 황제는 그 검을 옛날처럼 휘두를 수 없는 게 분명했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부터 이 반란을 허용했을 리가 없으니까. 과연 황제가 카라볼그를 어떻게 사용할지, 그것이 케일런을 이도 저도 결정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제목에 대해 고민중입니다. 오늘 글도 거의 못쓰고 제목만 고민했는데요, 소설 구상할 때부터 지어뒀던 제목이라 그런지 다른 제목은 잘 생각도 안나고, 우유부단한 자까는 뭐가 나은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까지 나온 제목 적어볼게요. 어떤게 좋은지 말씀해주세요. 혹은, 더 괜찮을 것 같은 제목 있으시면 적극(!) 코멘 달아주세요.

진홍의 카르마(현재 그대로)

장미의 손끝에는 카르마(페라스트나무잎 님 제안)

전장의 비너스

아테나 리버스(Athena Rebirth)

감사합니당~!

8/29 추가

특정 표현에 대해 제가 의도했던 바와 다르게 이해하시는 분이 많아서 본문 수정을 조금 거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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