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2 회색 늑대의 땅(1) =========================
"아나클리프 경!"
"신 엔드로스 루벤 아나클리프,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성 안으로 진입한 타셀은 말에서 내려, 부복하고 있는 초로의 기사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킨 후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변경백 엔드로스 루벤 아나클리프는 오래전부터 타셀을 지지해온 인물이었다. 엘레나 황비의 기사이면서 최초로 섀도 워커가 됐던 사람이고, 아버지가 없다고 해도 좋을만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타셀에게는 아버지처럼 여겨지는 사람이기도 했다. 확고한 의지,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 강인한 육체, 상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 어느 것 하나 지배자로서 모자란 점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배자로 나서는 대신, 자신을 지배할 이로 황실에서 소외된 제 2황자를 선택했다. 당시 당연하게 황태자로 거론되던 제 1황자 케일런의 구애를 칼같이 끊어낸 이후였다. 케일런이 그를 얼마나 탐냈으며 또 그의 거절에 얼마나 분노했는지, 그가 2황자 쪽으로 돌아선 것을 물릴 수 없다고 깨닫자마자 그를 변경으로 보내버렸던 것이다. 이미 제국이 완성된 시점이라 변경백의 지위는 일반 영주들과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국경을 지켜내지 못하면 귀족 작위를 박탈당하는 일도 부지기수였으니, 변경백으로 봉작 받았다는 것은 귀족들에게는 귀양이나 다름없었다.
케일런은 거기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일부러 그와 황비 엘레나 사이의 추문을 만들어 그들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하지만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그의 대쪽 같은 성정은 감히 그런 추문에 덮일만한 것이 아니었거니와, 그에게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내 마리안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알리시아, 아나클리프 가의 미래를 짊어진 아들 루벤스가 있었던 것이다.
수도에서 기거하던 가솔들을 전부 데리고 그는 차가운 눈보라가 치는 변경 지역인 데런으로 떠나야 했다. 엘레나 황비나 타셀과는 제대로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였다. 하지만 엔드로스는 케일런을 원망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언젠가 타셀에게 힘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변경지역을 탄탄하게 재건하기 시작했다.
제국이 대륙의 남쪽에 자리했기 때문에 변경이라 하더라도 자연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물론 1년 열두 달 중 넉 달은 눈이 오고 춥다는 게 단점이었지만, 얼음의 나라라 불리는 북방의 타이안에 비하면야 굉장히 따뜻한 축에 속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자잘한 분쟁이 생기는 국경이라 늘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지방이었다. 엔드로스가 변경백이 되기 전에는 먹을 것을 포함한 모든 물자가 부족한데다 황궁의 관심도 거의 없어서 데런의 주민들은 굶주림과 추위는 물론, 법령에도 없는 세금을 내느라 허리가 휘고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가 없었다. 변경지역 제국민들은 국법에 의해 다른 지방으로 떠날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죽는 게 나을 삶이었다.
하지만 엔드로스가 변경백이 된 이후, 데런은 눈에 띄게 발전했다. 그는 우선 곡식을 풀어 기아로 굶어죽는 이들을 구제하고, 땅이 녹는 봄, 여름, 가을 동안 종자를 빌려준 뒤 농사에 힘쓰게 했으며, 빌려준 종자 값은 3년에 걸쳐 갚도록 했다. 병역의 의무는 격년제로 지게 하면서, 외세의 침략이 없는 시기에는 병사들의 일부를 농사의 일손 돕기로 파견했고, 법령에 없는 세금을 전부 폐지했다. 그러자 저절로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는 이가 줄어들고, 출산율이 올라가 지역민의 숫자가 늘어났다. 도망쳤던 지역민들이 다시 되돌아오기도 했다. 농작물 생산량이 늘어나니 성 곳간이 채워졌고, 지역민들의 삶이 나아졌다. 지역민들이 데런에서의 삶에 애정을 갖기 시작하자 외세의 침략에도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10여년이 지나자 모든 변경지역 중 데런은 일반 귀족 영지와 비교해도 좋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데런은 '회색 늑대의 땅'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원래는 그 지역의 산맥에 특히 많이 살고 있는 회색 늑대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지만, 엔드로스가 탈바꿈시킨 뒤에는 충성심 깊은 은발의 아나클리프 경을 칭송하기 위한 별명이 되었다.
"그 데런을 이렇게나 바꿔놓다니, 역시 아나클리프 경답소. 경이 변경으로 쫓겨났을 때에는 얼마나 자책을 했는지 몰라."
"다 이런 일이 생기느라고 그랬나 봅니다. 신의 뜻은 역시 전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함께 성 안으로 향하며 그들은 10여년을 뛰어넘는 회포를 풀었다. 편지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꼬박꼬박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운신을 억압받던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보는 것은 10여 년 전 헤어진 후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제 헤어진 이들처럼 어색함이 없었다.
"일단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으니, 오늘 밤에는 군사들을 잘 먹이고 치하하는 연회를 열어야겠습니다. 준비는 다 해놓았으니, 전하께서도 무거운 갑옷을 벗으시고 피로를 푸시지요."
엔드로스의 권유에 타셀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군에 휴식을 명했다. 저녁 연회는 단순히 먹고 즐기는 자리일 뿐만 아니라 변경 귀족 연합 세력의 면면을 확인하고 기존의 군 지도부와 화합하게 해야 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타셀은 자신의 측근들에게도 준비를 시켰다.
"미하일. 저녁 연회에 카시야 경도 불렀으면 좋겠군."
타셀의 나직한 제안에 미하일은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곧 병영 안으로 사라졌다.
"야 이놈들아! 늬들 냄새나서 코가 마비될 것 같으니까, 저녁 만찬 시작되기 전에 강에 가서 몸부터 씻고 와!"
오랜만에 고기와 술을 실컷 먹고 마실 수 있다는 소식에 군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싸움에 내몰리며 제대로 씻지 못한 군사들의 청결 상태는 못 봐줄 수준이었다. 그로 인한 상처의 감염도 심했고 심지어 전염병까지 걱정될 정도였는데 그동안은 제대로 씻을만한 곳이 없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데런 지방에는 산맥에서부터 흘러 내려온 물줄기들이 모여 이룬 멜빈 강이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군사들의 목욕과 빨래 등이 가능했다.
"저 놈들이 씻느라 강이 더러워지는 게 아닌가 싶군."
"걱정 마십시오. 오히려 멜빈 강 물고기들이 간만에 포식을 할 것 같은데요."
"…놈들의 땟물을 먹고 살찐 물고기 따위는 별로 맛보고 싶지 않아."
타셀이 엔드로스와 우스갯소리를 나누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아버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여기사들은 아하라 계곡에서 씻도록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뒤를 돌아보니 탐스러운 금빛 머리카락과 파란색 눈동자가 아름다운 여인이 반듯이 서 있었다.
"아, 전하. 연회 때 소개해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제 딸 알리시아입니다. 알리시아, 인사드리거라. 타셀 칸 아마리스 전하시다."
알리시아는 치맛자락을 붙들고 무릎을 굽혀 우아하게 절을 했다.
"경에게 아주 아름다운 부인과 딸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소만, 영애가 이토록 아름다운 것을 보니 경은 과분할 정도의 미인을 부인으로 두었나보군."
"허허허허. 예, 제 모든 것을 통틀어 가장 귀중한 보석들이죠."
타셀의 칭찬에 엔드로스는 살짝 풀어진 듯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딸을 바라보았다.
"군의 여기사들까지 세심하게 챙겨주어 감사하오. 위치를 알려주면 휘하의 부대장들에게 여기사들만 따로 그쪽으로 가라고 알리도록 하지."
타셀의 고갯짓에 멀리 서있던 기사가 알리시아 곁으로 다가가 위치를 물었다. 알리시아는 다시 인사를 올린 뒤 그와 함께 방을 빠져나갔다.
타셀의 군사가 데런에 도착한 뒤 반나절 동안은 다들 짐을 부린다, 몸을 씻는다, 묵은 빨래를 한다 하며 멜빈 강에 붙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연회와 만찬은 저녁 7시부터 시작되는 터라, 제 일을 끝마친 이들은 간만에 꿀 같은 낮잠을 자기도 했다.
'이 위쪽이라는 것 같던데….'
카시야는 미하일이 찾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조금 늦은 시간에 아하라 계곡이라는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사실 먹는 것은 둘째 치고 진득하게 달라붙는 머리카락과 옷가지들을 좀 빨고 싶었던 터라 강의 존재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아하라 계곡은 멜빈 강 지류의 한 물줄기라고 봐야할 개울이 흐르고 있는 성 뒤쪽 산 안의 계곡이었다. 이미 다른 여기사들은 씻고 떠난 뒤라 주변이 고요했다. 카시야는 차라리 잘 됐다고 여기며 한 쪽 편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어, 어머. 누가 계셨군요."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카시야였다. 하지만 발걸음이나 기운의 느낌이 두말 할 것도 없는 여자의 그것이라 그냥 내버려뒀던 것이다. 안 그래도 여기사와는 좀 다른 느낌이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생전 한 번 보기 힘들 것 같은 미인 귀족 영애가 조그만 바구니를 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혹시 영애께서 계곡물을 쓰실 거라면 저는 아래 내려가서 씻겠습니다."
"아니에요! 같이 씻어요."
금발의 아름다운 영애, 알리시아는 카시야 곁의 한편에 자신이 입고 온 간편한 드레스를 훌훌 벗어 내리기 시작했다. 모르긴 몰라도 귀족 영애가 취할만한 태도는 아닌 것 같았다. 다 떠나서 왜 귀족 영애가 성 안의 목욕탕을 놔두고 계곡에서 씻으려는 건지도 의아했다.
"죄송하지만, 왜 이런 곳에서 씻으시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런 곳'이 아니에요. 멜빈 강의 물은 산에서부터 내려오면서 여러 가지 약용 효과를 갖는 물질이 녹아있어요. 그래서 가끔 여기서 목욕을 하고나면 피부도 매끄러워지고, 감기도 예방이 된답니다."
생글거리며 대답하는 영애의 모습은 카시야가 상상했던 귀족의 오만함이나 허례허식이 없이 담백하고 유쾌했다. 카시야는 그렇습니까, 하고 대답한 뒤 되도록 그녀와 멀리 떨어진 곳에 몸을 담갔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라 그런지 여름인데도 살짝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웠다.
'기분 좋은데…?'
카시야는 끈적끈적했던 몸을 씻어주는 차가운 강물에 상쾌함을 느꼈다. 한참 투명한 강물에서 몸을 닦던 그녀는, 자신의 몸 주위에서 생길 더러운 물이 알리시아 쪽으로 퍼져나가지 않도록 하류를 향해 머리를 담그고 딱딱하게 굳은 머리카락을 빨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먼지와 땀으로 범벅된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잘 씻기지가 않았다.
"이거… 써 보실래요?"
카시야의 등 뒤에서 알리시아가 동그란 비누를 내밀었다.
"그걸 제가 썼다가는 비누마저 더러워지고 말 겁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카시야는 흙탕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붙들고 거절한 뒤 다시 풀어지지 않는 머리카락을 물에 담그고 비볐다.
"그렇게 머리를 감았다가는 다 엉키겠어요. 가만히 있어 봐요."
어느새 성큼 다가온 알리시아는 하얀 비누 조각을 카시야의 머리카락에 문질러 거품을 낸 뒤 털북숭이 애완동물을 목욕시키듯 부드럽게 카시야의 머리를 감겨주었다. 그녀에게 머리를 붙잡힌 카시야는 꼼짝없이 고개를 숙인 채 제 머리를 맡겨야 했다.
'이러다가 귀족 모독죄 같은 걸로 경을 치는 게 아닐까?'
카시야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리시아는 제법 야무지게 카시야의 엉겨 붙은 머리를 감겨주었고 사실 그녀의 부드러운 손끝은 꽤나 기분이 좋았다.
"자, 이제 다 된 것 같아요. 머리를 헹궈보세요."
거품 범벅이 된 카시야는 알리시아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하류 쪽으로 가서 머리를 헹궈냈다. 새카만 땟물이 흘러내려가며 카시야의 밤색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물결에 살랑였다. 한참 헹구고 고개를 들자 아까와는 다르게 투명한 물이 몸 위를 흘렀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영애께서 굳이 손을 더럽히실 필요는 없으셨습니다만…."
"너무 딱딱하게 그러지 마요. 이제 우리 다 한 패잖아요."
"한… 패요?"
"네! 너무 건달 같은 말인가요? 아하하!"
아름다운 외모와는 달리 어딘지 허술한 태도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카시야도 기사들 중에서는 하얀 편에 속하는 피부였지만 알리시아의 피부는 그야말로 만년설 같이 눈부셨다. 하야면서도 핑크빛이 도는 피부 위에 금사처럼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이 숲에 산다는 요정을 떠올리게 했다.
"이 성에 사시는 분이신가요? 아,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타셀 칸 아마리스 전하를 따르는 카시야라고 합니다. 평민 출신 기사이니, 부디 말씀 낮추십시오."
카시야의 자기소개에 알리시아도 고개를 기울이며 방긋 웃었다.
"저는 이 성의 주인인 엔드로스 루벤 아나클리프 백작의 딸 알리시아 밀리 아나클리프라고 해요. 기사라면, 카시야 경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좋으실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그리고 말씀 낮추십시오."
"평민 출신 기사라도 기사는 기사지요. 그리고 기사에게는 함부로 말을 낮춰서는 안 되는 게 법도입니다."
알리시아는 사랑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 작품 후기 ============================
조아라에서 베스트지수 10만 넘기도 너무 어렵다고 느끼던 제가
오늘 50만을 넘겼군요. ㅎㄷㄷ
치열한 전장인 로판 장르에서 장르베 11위라니...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내일부터 여름방학 일일연재 이벤트에 참가하는터라 오늘은 2연참만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