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3 회색 늑대의 땅(2) =========================
카시야도 자신과는 정말 다른 알리시아를 보며 신선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알리시아 역시 카시야를 바라보며 깜짝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여잔데도 어쩜 저렇게 단단해 보일까?'
옷을 벗자 드러난 나신부터가 자신과는 엄청나게 달랐다.
카시야의 상아 빛 피부는 다른 여자들의 피부처럼 보드랍고 말랑말랑하지 않았다. 베이고 찍힌 흉터가 드문드문 박혀있었고 탄탄한 피부 가죽 아래의 잔근육이 올록볼록 존재감을 드러냈다.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꽉 짜인 몸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여성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곡선이 다른 귀족 영애들과 다르면서도 아름다웠다. 남쪽 지역 숲에 사는 육식동물인 쿠거를 연상시킬 정도로 강인함과 우아함이 공존했다.
먼지 덩어리 같던 머리를 감겨주고 나자 카시야의 까만색처럼 보이는 밤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며 달라붙었다. 거기다가 그 에메랄드 같은 녹색의 눈동자! 성 안의 그 어떤 에메랄드보다 카시야의 눈동자가 아름다울 것이라는 데 전 재산을 다 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예뻐요!"
알리시아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카시야의 몸이 굳었다.
"뭐가… 말씀이십니까?"
"카시야 경이요. 정말 예쁜 것 같아요."
"알리시아 님은 본인이 얼마나 아름다우신지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알리시아 님께서 예쁘다고 하시니 제가 당황스러울 정도입니다."
알리시아는 요정처럼 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강물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갔다. 카시야는 저가 정말로 숲 속의 요정을 보는 게 아닌가 싶어졌다. 게다가 예쁘다니…. 카시야는 자신에게 그런 간지러운 형용사가 붙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예쁜 사람 눈에는 모든 게 다 예뻐 보이는 모양이지?'
한참 자맥질하는 알리시아를 바라보던 카시야는 피식 웃으며 들고 왔던 빨랫감을 빨기 시작했다. 지급된 빨래비누가 크지 않아 맘먹은 만큼 깨끗하게 빨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다시 입어도 불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알리시아 님. 이제 그만 몸을 닦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곧 해가 지겠어요."
어느새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때까지 개울물에서 헤엄치며 놀고 있던 알리시아는 유유히 개울가로 와서 물기를 털어냈다. 머리카락이 길어서 그걸 짜내는 것만 해도 일일 것 같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래주실래요?"
돌돌 말아 물기를 꼭 짠 머리카락에 수건을 두르고 오래 물 안에서 노느라 창백해진 하얀 몸을 닦았다. 하녀들에게 몸을 맡기는 게 익숙한 귀족이라 그런지, 처음 보는 카시야에게 맨몸을 드러내는 데에도 별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탄력이 우선적으로 느껴지는 카시야의 피부와는 달리, 알리시아의 하얀 피부는 뽀얗고 부드러워 보여서 저도 모르게 만지고 싶어질 정도였다.
한참 알리시아의 드레스를 입혀주고 있을 때였다.
"아가씨!"
멀리서 젊은 하녀 둘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어? 들켰다."
알리시아의 혼잣말과 달려오는 하녀들의 태도로 미루어 그녀가 몰래 혼자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카시야는 왠지 이 아가씨가 귀엽다고 느껴졌다. 사람을 보고 '귀엽다'고 느끼기는 또 처음인 것 같았다.
알리시아를 향해 다가온 하녀들은 헥헥 거리면서도 카시야를 경계의 눈초리로 살폈다.
"이 분은 황자 전하 휘하의 카시야 경이야. 내 목욕을 도와주셨어."
"아가씨. 도대체 왜 성 안 목욕탕을 두시고 여기 와서 씻으시는 거예요, 자꾸?"
"하지만 지금 성 내 목욕탕은 귀족 기사님들이 쓰시느라 모자라잖아. 나야 여기서 씻어도 되는걸."
"감기라도 걸리시면요. 저희가 아가씨 찾느라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아세요?"
"미안, 미안.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거든. 너희들이 바빠 보이기도 했고."
알리시아가 깔깔 웃으며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하녀들을 달랬다. 귀족 아가씨와 하녀들 사이의 대화라고 보기엔 확실히 벽이 느껴지지 않았다. 알리시아의 성격이 어떤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와주실 분들이 오셔서 다행입니다. 저는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카시야가 꾸벅 인사를 하자 알리시아가 연회에서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한편, 타셀 역시 자신의 측근들과 근처 연못에서 몸을 씻었다.
뜨거운 물로 피로를 풀 수 있는 성 안의 목욕탕도 마련되기야 했지만, 더운 날씨 덕에 시원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타셀이 간다니 지크와 미하일이 따라붙었고, 그들이 간다니 또 그 휘하의 몇몇이 따라 나서다보니 숲 속의 꽤 큰 연못은 금방 목욕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내자식들은 8할이 허세로 이뤄졌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지, 홀라당 벗은 몸을 서로 비교하며 으스대거나, 자신의 몸에 난 아무리 조그만 흉터라도 영광의 상처로 부풀리는 실력들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게 인마, 화살비가 쏟아지는 전장에서! 나 혼자! 다친 우리 부대장님을 지키느라고 생긴 상처야!"
"어이구, 겨우 그 정도 가지고. 내 옆구리에 이 흉터 보이냐?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루크 페레이아의 칼에 생긴 상처다! 내가 그 놈이랑 대적을 했다는 거 아냐!"
"설마. 도망치다가 엎어져서 생긴 상처겠지."
"뭐야? 아니, 이놈이, 강냉이가 다 털려봐야 형님 소리가 나오려나?"
험악한 단어들이 오갔지만 다들 신나게 낄낄대며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타셀만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난 그냥 조용히 냉수 목욕이 하고 싶었을 뿐인데, 왜 지금 이 꼴을 봐야하는 거지?"
"낄낄. 다 전하를 사랑하는 부하들이니, 고깝게 보지 마십쇼."
"미하일. 네가 정말 충성스럽다면, 제발 저 시커먼 것들 좀 내 눈앞에서 치워줘."
타셀의 부탁을 받은 미하엘이 "이 놈들아!!" 하고 외치며 첨벙첨벙 맞은편으로 달려가자 타셀은 왠지 더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두가 타셀을 좋아하는 충성스러운 부하인 것은 맞는 말이었다. 얼마나 그를 좋아했냐면, 타셀이 머리를 감고 고개를 휙 쳐들자 그의 머리카락에서 흩어져 날리는 물방울마저 다들 멍하니 쳐다볼 정도였다.
"전하! 정말 멋있으십니다!"
"크으…. 내가 여자였으면 바로 전하께 안겼을 텐데…!"
"내가 전하였다면 아무리 굶주렸어도 너랑은 안 할 것 같은데?"
타셀은 다 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피해 커다란 바위 근처로 몸을 움직였다.
바위 근처로 가서 다시 몸을 씻고 있으려니 문득 카시야를 만났던 키렐 주둔지의 연못이 떠올랐다. 바위 옆을 돌아 나가자 갑자기 물 밑에서 솟구친 카시야의 날붙이며, 예리하게 벼려진 그녀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며, 그녀의 목덜미를 따라 흐르던 물방울이며….
'엄청 충격적이긴 했던 모양이지? 자꾸 생각이 나는 걸 보면.'
만약 그녀가 정말로 누군가가 심어놓은 암살자였다면, 자신은 그날 그 연못에서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이제까지 살아오며 맞닥뜨린 그 어떤 암살자보다도 빠르고 조용했다. 미하일이 산에서 그녀를 만났다며 떠벌였을 때는 몰랐지만, 직접 겪고 보니 미하일이 왜 그렇게 흥분했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반드시 우리 쪽의 귀중한 전력이 될 거다.'
타셀은 단단히 믿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귀족 기사들과 변경백의 의견이었다. 제국 전체에 무위를 소문낸 여기사는 아직 한 명도 없었다. 여기사 전체를 그저 행정병이나 간호병, 물자 수송병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고 또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카시야를 측근으로 발탁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 반발을 어떻게 무마시켜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등이라도 밀어드릴까요?"
미하일이 또 까불대며 다가오자 타셀은 나직하게 물었다.
"미하일. 카시야에게는 저녁 연회에 참석하라고 말을 전해뒀나?"
"예. 예상이야 했지만 놀라지도 않더군요. 역시 강심장!"
"흐음…. 과연 귀족들이 카시야를 받아들이려고 할까? 그게 좀 걱정이야."
타셀이 걱정스럽게 묻자 미하일이 뭘 그런 걸 다 걱정하냐는 투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그 녀석이 알아서 해치울 문제죠. 그리고 아마, 어떤 식으로든 다들 인정하게 될 겁니다. 제 눈은 틀림없어요. 암살 방면에선 괴물이나 다름없다니까요."
미하일은 왠지 그녀에게 엄청난 신뢰감을 보이고 있었다. 하긴, 그녀에게 뒤를 맡겨도 될 것 같다는 말도 했던 미하일이었으니.
"넌 왜 그렇게 카시야를 믿는 거냐? 뭔가 근거가 있나?"
"눈이요! 그 건조한 눈! 한 인간으로 보자면 뭔가 결여된 눈이긴 하지만, 부하로 보기에는 든든한 눈이죠. 그런 인간들은 보통 사람들처럼 속으로 계산하고 이것저것 따지고 앞뒤가 다르지 않아요. 오직 그 명령 수행 외에는 관심이 없죠. 그 비슷한 눈을, 예전 스콰이어 시절에 본 적 있습니다. 이제는 죽은 대마법사 헬라스가 만들어낸 죽음의 기사들에게서요. 아직 꽃 같은 나이의 아가씨가 어쩌다 저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카시야가 사람 같은 눈을 하게 된다면 그 때는 꽤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진짜 막을 길 없는 괴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미하일은 가벼워 보이지만 은근히 냉철한 면이 있는 놈이었다. 하긴,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누가 이 방정맞은 인간이 전장에서 칼만 들면 눈이 뒤집어진다고 상상이나 하겠는가. 미하일은 케일런 진영의 기사 루크 페레이아와 비등한 실력의 괴물이었다. 이 미하일과 지략가인 지크, 그리고 검의 신이라고까지 불리는 타셀 셋이 뭉쳤으니, 뜻 밖에 나타난 마법사 에르논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황제가 방해하지만 않았더라면 반란군 진압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괴물…. 괴물이라…. 난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
타셀의 혼잣말과도 같은 중얼거림에 미하일이 귀를 쫑긋댔다.
"괴물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애처롭달까."
"예? 전하…. 저기 취향이 좀… 아니, 뭐 취향이야 존중해야 하는 거긴 하지만요, 왜 굳이…."
과장된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며 놀리는 미하일을 흘기면서 타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놈에게 섬세한 내면을 파악하라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되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씻고 나가자."
그들은 다시 첨벙대며 물놀이에 가까운 짓을 하다가 타셀이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고 나서야 제대로 몸을 씻고 연못 밖으로 빠져나왔다.
============================ 작품 후기 ============================
여러분들의 의견을 종합해본 결과, 제목은 그냥 <진홍의 카르마>로 가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모로 의견 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실 이게 두 번째 작품인데, 오늘에서야 진정으로 '독자가 작가의 힘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전에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요,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재미있다고 해주시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글을 쓰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게다가 '글이 재미있는데 제목이 무거워 독자 유입이 안 되는 것 같다'며 걱정해주시고, 어떤 제목이 나은지 같이 고민해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에 너무 기뻤습니다.
저는 모니터를 보며 혼자 앉아있지만, 많은 분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앞으로 글을 쓰는 자세가 달라질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