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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24화 (24/134)

00024 회색 늑대의 땅(3) =========================

해가 질 무렵 시작된 연회는 화려하진 않았지만 모든 게 다 풍족했다. 고기조각 한 점 양껏 먹기도 어려웠던 병사들은 넉넉히 베풀어진 고기와 술에 타셀과 엔드로스를 칭송했다.

성 바깥의 진지에서 모든 병사들이 오랜만의 휴식을 즐기고 있을 때, 성 내에서도 연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전하. 이쪽은 제 아내 마리안과 아들 루벤스, 그리고 아까 보셨지만 딸 알리시아입니다."

"전하를 뵙습니다."

엔드로스의 소개에 그의 식솔들이 타셀에게 예를 갖췄다. 타셀 역시 목례하며 그들의 환대에 감사한다는 인사를 했다. 마리안은 소문대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40대의 나이임에도 주름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라 혹시 요정의 피를 이은 자가 아닌지 의심하게 되는 수준이었다. 그녀의 아이들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였다. 알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루벤스는 남자치고는 희고 예쁜 외모가 콤플렉스라고 할 정도였다.

"아나클리프 경. 혹시 요정이랑 결혼했나?"

"마리안의 아주 오랜 선조가 요정이라는 설이 있기는 합니다. 허허허."

자녀들의 미모까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아서 반쯤 농담으로 엔드로스에게 물었는데 실제 그녀의 조상이 요정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당황스러웠다.

제 아비와 환담 중인 타셀의 곁에 루벤스가 미소를 띤 얼굴로 얼쩡거렸다. 스물두 살이라는 이 청년은 말로만 듣던 타셀 황자를 직접 보게 되어 감개무량한 상태였다. 검을 다루는 제국민이라면 검의 신이 깃들었다는 타셀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 했다.

"루벤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엔드로스가 루벤스를 나무라는 척, 타셀에게 은근히 눈치를 주었다. 루벤스의 눈망울에 숨길 수 없는 동경이 어려 있어, 자신의 아들에게 한 마디라도 해 달라는 아비의 간청이기도 했다.

"아나클리프 영식. 어렸을 때부터 검에 소질이 대단했다지? 대련이라도 한 번 해보고 싶군."

"예, 예? 저, 정말이십니까? 감사합… 아니, 제가 감히 전하께 대적될 리가 없습…."

"설마 네가 전하께 대적이라도 하라고 하시는 말씀이겠느냐! 조금이라도 배우라는 말씀이신게지."

엔드로스의 타박에도 루벤스의 뺨에 떠오른 홍조는 가실 줄을 몰랐다. 그는 혹시나 이 얘기가 지나가는 인사치레가 될까봐 서둘러 약속을 받아내려고 했다.

"내일 연무장을 깨끗이 정리해놓겠습니다. 시, 시간은 언제든지 전하께서 편하신 쪽으로…."

꼬리를 정신없이 흔들어대는 강아지 같은 루벤스의 모습에 엔드로스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타셀은 유쾌하게 웃으며 내일 오전에 한 번 보자고 약속을 해주었다.

루벤스가 물러가자 기다렸다는 듯 변경 귀족 연합의 주요 귀족인 갤리언 백작이 다가왔다.

"전하. 저희 쪽 인재들을 소개해 올려도 괜찮을런지요."

어느 모로 보나 전형적인 검사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갤리언 백작의 곁에 서서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들은 명예없는 삶을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는 이들이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아르벤의 이카루스입니다."

"저는 델토의 지하임이라고 합니다. 전하의 검술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저는...!"

타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젊은이들은 앞다투어 자신을 소개했다. 조금이라도 더 용맹하게 보여 군의 선봉에 서고자 하는 욕망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늑대 떼 같은 그들의 소개가 끝나자 그들을 휘하에 두고 있는 고위 귀족들이 다시 타셀과 엔드로스 주위에 몰려 다시 한 번 자기 쪽 진영 인사들의 면면을 소개하고 이후의 편성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왔다. 이번에는 타셀이 저 자신의 측근들을 소개할 시간이었다.

"지크! 다들 데리고 이쪽으로 오게."

연회가 시작될 때부터 타셀의 지근에서 그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지크는 역시나 준비하고 있던 이들을 데리고 타셀의 근처로 움직였다.

"소개하겠네. 이쪽은 내 오른팔과 왼팔이라 할 수 있는 지크와 미하일 탈리온 메레디스 경이네."

똑같이 생긴 붉은 머리의 쌍둥이 기사를 보는 이들의 눈에 언뜻 놀라움이 스쳐갔다. 쌍둥이 기사도 드물었지만, 둘 모두 황자의 최측근으로 일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희귀한 일이었다. 특히 젊은 나이임에도 방금의 젊은 기사들의 무리와는 달리 여유롭고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는 것이 굉장히 노련해 보였다.

"이쪽은 기옌 하레스 경과 트리발도 알렌 타노스 경, 둘 다 반란군 진압 중 큰 공을 세웠네."

이번에는 30대 초반 정도 되는 노련한 기사 둘이 주변의 귀족을 향해 인사를 했다.

이런 식으로 타셀은 제 측근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나갔다. 그리고 타셀이 가장 우려한 마지막 인물 차례가 되었다.

"이쪽은 카시야 경. 가장 최근 발견한 인재지. 내 어머님을… 내게 데려와 준 사람이네. 여기사로서는 최초로 명성을 떨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

짧은 머리카락과 무심한 표정 때문에 곱상한 남자가 아닌가 생각하던 주변 이들이 '여기사'라는 말에 다시 한 번 카시야 쪽으로 고개가 휙 꺾였다. 카시야는 눈을 한 번 깜빡 하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여기사'라는 충격이 지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이름에 성(姓)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이 다시 한 번 경악에 물들었다. 나이도 많아봤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평민 출신 여기사'가 황자의 최측근이 된다는 것은 전무후무할 일이었다. 특히 타셀의 눈에 들기 위해 애쓰고 있던 변경 귀족 연합 쪽의 젊은 남자 기사들은 할 말 많은 입을 꽉 다물고 있느라 턱에 경련이 일 정도였다.

'자…. 이제부터가 문제지. 카시야가 무사할지부터가 걱정되는군.'

그들의 흉흉한 눈빛을 흘끗 바라본 타셀은 아마 지금 이 순간부터 카시야에게 온갖 종류의 공격이 가해질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연회의 중반쯤 접어들자 저멀리, 그녀 곁으로 다가가는 젊은 기사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타셀은 일단 두고 보기로 했다. 카시야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지 보고 싶었다.

"타셀 전하도 굉장히 힘드셨겠어. 오죽 인물이 없었으면 여기사를 측근으로 두고 계셨겠나."

"그러게 말야. 그것도 평민 출신을…. 이 정도라면 저 빨간 머리 쌍둥이 기사도 뭐, 별 볼 일 없겠는데?"

"스읍…. 아니면… 전하의 침대를 데우는 용도인가? 응? 말해보게, 카시야 '경'."

그들은 일부러 조롱조로 '경'이라는 칭호를 붙이며 카시야를 에워쌌다.

카시야는 아득히 먼 옛 추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녀에게는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거는 이들이 낯설지가 않았다.

'인간의 질투와 오만함은 시대와 세계를 뛰어넘는군.'

무심하게 와인을 목으로 넘기는 그녀의 모습에 누군가는 침을 꿀꺽 삼키고, 누군가는 이를 부득 갈았다. 그들의 짐승 같은 눈동자에 폭력성이 떠올랐다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굳이 스스로를 변호해야 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군요. 어차피 전쟁이 시작되면 다 알게 되실 것 아닙니까. 그래도 궁금하시면 전하께 여쭤보시든가요."

목소리의 고저도 없이 낮게 읊조린 그녀의 말투에 그들은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아마도 발끈하며 따져드는 계집이길 바랐던 것이겠지만, 카시야의 눈에는 그들이 갓 태어난 핏덩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저 상태로 전장에 나갔다간 검도 몇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비명횡사할 게 뻔한데…. 병력이 넉넉지 않은 이 상황에서는 아무리 천둥벌거숭이라고 해도 금방 죽어버려서야 아깝지. 저들의 훈련은 누가 맡는 거지? 저 성질머리들부터 어떻게 좀 고쳐놓으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카시야는 카시야 델 로만 대령의 눈으로 아기 병사들 보듯 그들을 재어보고 있었다. 그녀의 흔들리지 않는 눈빛에 기분이 나쁜 듯 누군가 으름장을 놓았다.

"평민 출신이면서 건방지기 짝이 없군. 기사면 다 똑같은 줄 아나? 귀족을 대하는 예법을 좀 더 배워야겠어. 나중에 친히 가르쳐 줄 기회가 있길 바라겠네."

그러고는 저들끼리 무슨 꿍꿍이를 짜려는지 다른 한 쪽으로 몰려가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카시야를 믿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젊은 기사들의 흉흉한 모양새가 마음에 걸린 타셀은 조용히 미하일을 불렀다.

"네가 카시야 쪽을 주시해. 아무래도 안 좋은 일에 휩쓸릴 것 같군."

미하일은 카시야 쪽을 흘낏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걱정 마시라니까요. 말씀드렸잖습니까. 저 자식, 괴물이라고. 아! 카시야가 실수로 다 죽여버릴지도 모르니 그건 좀 주의를 해야겠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지켜보도록 하죠."

미하일은 한 쪽 눈을 찡긋거리더니 잔을 들고 카시야의 지척에서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후 카시야에게 다가온 건 변경 귀족 연합의 기사들이 아니었다.

"카시야 경! 여기 계셨군요."

산꾀꼬리가 지저귀는 듯 고운 목소리가 카시야를 불렀다.

"아나클리프 영애."

카시야는 살짝 목례하며 알리시아를 맞았다. 데런 지방의 최고 미녀이자 공주님이나 다름없는 알리시아가 카시야에게 살갑게 다가가자 이번에는 젊은 기사 모두의 시선이 그 쪽을 향했다.

"식사는 입맛에 맞으셨나요? 아무래도 변경이다 보니 음식이 수도처럼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사실 데런의 음식이 건강에는 더 좋답니다."

"저는 수도 출신이 아니라 비교 대상이 없습니다만, 음식들은 다 맛있었습니다. 특히 이 와인이 참 맛있군요. 일반 포도로 만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어머! 아시겠어요? 미르바하라 산 중턱에서 자라는 산포도로 만들었어요. 보통 포도보다 단맛은 덜하지만 독특한 풍미가 있어서, 산포도 와인을 좋아하는 분들은 이것만 찾는대요. 제 입에는 조금 쓰지만, 카시야 경 입맛에는 잘 맞는다니 다행이에요."

"네. 단 와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친근하게 재잘대는 알리시아를 대하는 카시야의 태도는 아까 젊은 남자들을 대할 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사실 카시야의 눈에 알리시아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숲 요정이나 산새 같은 느낌이었다. 가만 바라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미소가 띠어지는 그런 존재 말이다. 그런 감정을 가지는 것은 비단 카시야만이 아니었다. 열여덟 살이라는 이 소녀는 데런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미 카시야를 자신의 경쟁상대로 보기 시작한 젊은 남자들은 알리시아가 카시야에게만 다정하게 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특히 알리시아가 계곡에서의 목욕 이야기를 꺼내자 주변에서 귀를 쫑긋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까 계곡에서는 혹시 저 때문에 맘 편히 목욕하지 못하신 것 아니에요?"

"아닙니다. 영애 덕분에 비누로 씻을 수 있었죠. 감사합니다. 하지만 영애께서 씻기에는 물이 좀 차갑게 느껴지던데, 혹시 몸살 기운이 느껴지시거나 하지는 않으십니까?"

"저야 어릴 때부터 거기서 씻었는걸요. 후후훗."

알리시아가 눈을 곱게 접으며 웃자 카시야는 저도 모르게 따라 미소 지었다. 루나엔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보호본능이 느껴졌다.

'확실히 전생과는 뭔가 달라. 이러다가 전 제국민을 지키고 싶다고 느낄까봐 무섭군.'

카시야는 스스로도 저 자신의 변화를 신기하게 느끼며 자리를 뜨는 알리시아에게 목례했다.

============================ 작품 후기 ============================

오늘부터 일일연재 이벤트 참여하는데 밤 12시 넘어서 올린다는 걸 깜빡했네요.

아침에 부랴부랴 올립니다.

출근하시는 분들 출근길의 무료함을 잠시나마 달래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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