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5 회색 늑대의 땅(4) =========================
연회에 알리시아만이 아리따운 처자인 것은 아니었다. 변경 귀족들의 딸들과 기사들의 딸들 역시 참석하여 연회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반란군 및 황제군과 맞닥뜨려야 할 결전의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혈기 왕성한 젊은 남녀의 로맨스가 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타셀과 엔드로스를 비롯한 수뇌부는 끊임없이 군 편성에 대해 의견을 나누느라 바빴지만, 일반 기사들은 영애들과 춤추고 와인을 마시며 가슴팍에 부적처럼 넣어둘 영애들의 손수건을 얻느라 바빴다. 영애들도 미리 준비했는지 꽤 많은 손수건을 품 안에서 꺼내어 기사들에게 건넸다. 한 영애가 여러 명의 기사들에게 손수건을 건네는 것을 보니 정인을 위한 것 같지는 않아서 카시야는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옆에 슥 다가온 미하일이 와인을 홀짝이며 말했다.
"다들 웃고 떠들고는 있지만, 그래도 죽음은 무서운 거지. 손수건 하나 받으려고 애쓰는 거 보라고."
"저 손수건이 무슨 의미입니까? 부적이라도 되나요?"
"음? 너, 그거 몰라? 원래는 연인이 준 손수건을 품고 출정하면 그들의 사랑을 가엾게 여겨 죽음의 위험에 처하더라도 죽음의 신이 한 번은 눈감아준다는 얘기였는데, 지금은 연인이 아니더라도 젊은 여자에게서 받은 손수건이 그런 효험이 있다고들 믿고 있어. 넌 여기사라서 남자한테 받아야 하려나?"
미하일이 껄렁껄렁하게 손수건의 전설을 얘기해주며 시답잖은 농담을 지껄였다. 그러고 보니 손수건을 전하는 영애들의 표정 어딘가에 염려와 비장감이 떠도는 것 같았다. 그걸 받는 기사들의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은 뒤가 더 편안할 수 있다는 걸 알면 다들 무슨 표정을 지을까?'
카시야는 죽음의 그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떠올렸다. 물론 살육의 기억으로 고통 받았을 때는 힘들었지만, 그만큼 큰 죄나 짓지 않는 이상에야 이런 힘든 삶보다는 죽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인지, 카시야는 사실 죽음이 두렵지가 않았다. 그게 그녀가 한 발짝쯤 현실세계에서 떠 있는 이유였다.
"미하일 경은 그럼 제국군에 합류하기 전에 손수건을 받으셨나요?"
"큭큭큭. 그러엄! 이게 사실은 약간 변질돼서 어떻게 보면 인기투표처럼 되어버렸거든. 반란군 진압 출정 전에 나한테 손수건을 주지 못해 영애들이 다들 난리였다니까."
"…그렇군요."
"너 지금 내 말 안 믿는 거지? 야, 진짜라니까? 너무 많아서 못 받은 녀석들한테 내가 배급을 해줬다고."
"네. 알겠습니다."
"어, 어이! 야, 카시야! 너 진짜 나 못 믿냐?"
"저는 아까부터 알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네 눈이 지금 날 비웃고 있다고!"
"잘못 보셨습니다."
카시야와 미하일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영애들의 시선이 그들을 흘끔흘끔 스쳤다. 그러다가 한 어린 영애가 흰 손수건 하나를 꼭 쥐고 머뭇거리며 다가오다가 카시야에게 들이밀었다.
"기, 기사님! 승리를 기원하겠습니다!"
열네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귀여운 영애는 귓불과 목까지 빨갛게 물들이고는 내민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카시야는 조금 당황해서 물었다.
"전 여자입니다만, 제게 주시는 게 맞습니까?"
영애는 카시야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끄덕 흔들었다.
"…감사합니다. 영애의 기원이 허사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카시야는 굳이 이 호의를 거절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결국 손수건을 받았다. 손수건을 받을 때 영애의 손과 아주 살짝 스치자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며 카시야를 올려다 본 영애는 그녀의 녹안과 마주치자마자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꺄아아!"하며 제 친구들의 무리로 도망 가버렸다. 그 모습을 옆에서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미하일은 그제야 삐딱하게 웃으며 비아냥댔다.
"와…. 날 비웃을 만 했구나. 넌 동성에게서도 받을 수 있다 이거지? 멘트가 아주 능숙하던데?"
곁에 있었으면서도 손수건을 받지 못한 미하일은 카시야가 했던 말투를 우스꽝스럽게 따라하며 놀렸다. 그러나 곧 그 입이 다물렸다. 방금 그 영애 덕에 다른 영애들도 용기를 냈는지 끼리끼리 몰려와 카시야에게 손수건을 건넸던 것이다. 미하일에게 건네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앞으로 너를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겠다! 제기랄! 황궁에서는 정말 많이 받았어!"
씩씩대는 미하일은 반쯤은 진심인 것 같았다.
"하나 드릴까요?"
그가 전에 제가 받은 손수건을 못 받은 이들에게 배급했다는 얘기를 떠올리며 카시야가 하나 내밀자 그는 붉으락푸르락하더니만 휙 돌아서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너무 많이 받아서 어디 둘 데가 없군. 못 받은 기사들에게 나눠줘야 하는 걸까?'
카시야는 차곡차곡 쌓여 제 손에 잡힌 손수건들을 내려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전생에서는 '살아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인사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죽는 게 그토록 하찮게 여겨졌을까….'
생각에 빠진 카시야는 손수건 한 장을 겨우 얻은 기사들이 그녀를 질시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타셀이 혼자 큭큭대며 웃는 것 역시 보지 못했다.
연회는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연회에서 출 수 있는 한 많이 춤췄고, 마실 수 있는 한 많이 마셨다. 하지만 춤에건 술에건 별 관심이 없던 카시야는 밤이 깊자 성 밖의 진지 천막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미하일에게 보고했다. 이미 술에 거나하게 취한 미하일은 잠이야 아무데서나 자라며 카시야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술을 먹이려고 했다. 카시야는 부드럽게 그의 팔을 뒤로 꺾어 그를 구석에 처박아 두고는 타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높은 귀족처럼 보이는 이들과 진지한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냥 돌아가도 될지 고민하며 잠시 바깥을 내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타셀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할 말이라도 있나?"
"아…. 이만 내려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괜찮아. 피곤할 텐데 가서 좀 쉬게. 내일 점심 식사를 한 뒤에는 성 안의 홀로 모이게. 군 편성 때문에 할 일이 많으니까 말야."
"네. 알겠습니다. 그럼…."
카시야가 막 작별 인사를 건네려는 찰나 타셀이 슬쩍 몸을 가까이 하며 낮게 속삭였다.
"조심하게. 자네한테 해코지하려는 자가 있을 수도 있어. 특히 내일 군 편성이 끝나면 더 심해질지도 모르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카시야의 어깨를 툭툭 치며 내려가 보라고 했다. 뒤돌아서 다시 골치 아픈 얘기를 하러 가는 타셀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한 카시야는 성의 돌계단을 내려오며 자신의 주군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전생에서는 주인이 나를 걱정해준 적도 없지. 흠…. 여러모로 신선한 경험을 하는군.'
전생에서는 그저 도구로서만 다뤄지던 카시야였다. 그녀가 다칠 것을 걱정하던 이는 없었다. 여전히 무심한 카시야였지만 묘하게 뱃속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싫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걱정을 받는다는 것, 그것이 비록 가볍고 누구에게나 건넬 수 있는 대단치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카시야의 전생에서는 겪지 못한 것이었다. 내내 건조하고 무심했던 그녀의 눈동자에 미묘하게 웃음기가 어렸다.
일반 병사들은 성 안의 귀족들보다 훨씬 떠들썩하게 놀고 있었다. 밤이 늦다보니 이미 반쯤은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긴 했지만 다들 풀어진 얼굴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카시야는 자신의 천막으로 가며 눈으로는 쿠론을 찾았다. 혹시나 맨 바닥에 쓰러져 자고 있을까봐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쿠론은 8부대의 천막들이 몰려있는 가운데 피워둔 모닥불 근처에서 다른 병사들과 껄껄대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천성이 순하고 착한 쿠론은 사실 카시야뿐만이 아니라 부대 내의 누구와도 잘 지냈다. 특별히 더 친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과 함께 있는 쿠론은 카시야와 함께 있을 때보다 더 장난기가 많고 유쾌해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시야는 몸을 돌려 천막 안으로 들어가 침상에 누웠다. 생전 느껴보지 않았던 기분이 들었다. 이게 뭘까, 한참 고민하던 카시야는 결국 조금 민망한 결론에 다다르고 말았다.
'쿠론이 나만의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빼앗긴 기분이야.'
쿠론은, 친구라고는 있어본 적이 없던 카시야에게 처음으로 생긴 친구였다. 이 세계의 시스템이나 예법을 모르는 카시야 대신 그는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해주었고 가르쳐주었다. 식사를 할 때에도 일부러 카시야의 곁에 앉아 있었고, 카시야의 질문에 귀찮아하지 않고 잘 대답해주었다. 심지어 자신은 그가 알던 카시야가 아닌데도 말이다. 그런 종류의 친절을, 카시야는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 것이라고 착각했나보다. 하긴, 나한테 '내 것'이라는 게 어디 있겠어.'
카시야는 인간이 참 간사한 동물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40년을 살았던 기억으로 대충은 알고 있다. 쿠론은 애초부터 그녀의 것도 아니고, 그가 다른 이들과 친하게 지낸다고 해서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도 아님을. 하지만 카시야는 처음으로 '내 사람'에 대한 강렬한 갈망을 느꼈다. 새롭게 알아가는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오늘 밤에는 왠지 조금 버거웠다. 자기 자신이 언제 이렇게 유치하고 감상적이 되었나 자책할 때쯤, 갑자기 천막이 살짝 걷혔다.
"어, 카시야! 와 있었구나! 언제 왔어?"
쿠론이었다. 그 역시 얼근히 취했는지, 천막 안에 금세 술냄새가 고였다.
"방금. 재미있게 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냥 들어왔어. 밥은 잘 먹었어?"
"으응! 헤헤…. 성 안에서는 어땠어? 귀족 나리들의 연회니까 더 화려했지?"
"글쎄. 연회라고는 해도 뭔가 좀 경직된 분위기였어. 전하나 귀족 기사들은 모여서 뭔가 의논하느라 바빴고. 아참, 영애들이 손수건을 주던데 말야, 이걸 갖고 있으면 죽음의 신이 한 번은 살려준대. 너도 하나 갖고 있어."
"우와…. 귀족 영애들이 준 손수건이야? 와…. 엄청 부드럽네."
카시야가 준 손수건을 잡고 만지작거리던 쿠론은, 왠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한참을 미적미적거리다가 코를 한 번 들이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소문을 듣자 하니까… 너는 황자 전하께서 군 지도부로 발탁했다고 하더라. 아마… 앞으로는 얼굴 보기도 힘들어질 거라고 말야."
카시야는 잠자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얘기를 들으니까… 왠지… 좀… 하이구, 참,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섭섭했어?"
말을 고르던 쿠론은 카시야의 말에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모르겠어. 섭섭한 건지, 기쁜 건지, 아쉬운 건지…. 친구가 출세했다니까 좋기는 한데, 혹시… 다시는 못 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고… 너랑 나랑 아예 다른 세계 사람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 그, 그렇다고 네가 잘 된 게 싫다는 건 아니고! 뭐… 여하튼 그래. 쩝…. 내가 못나서 미안해."
카시야는 쿠론이 느끼는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어쨌든 그가 자신의 부재를 많이 아쉬워하는 것 같아 조금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쿠론. 내가 안개숲에 갔다가 기억을 잃고 눈을 떴을 때, 사실은 참 막막했어. 아무 것도 기억나는 건 없고, 이 세상은 전쟁이래고, 나는 기사라잖아. 그때 나에게 네 존재가 얼마나 힘이 되고 위안이 됐는지 몰라. 그래서 나는… 내 힘이 닿는 한 너는 꼭 구하겠다고 다짐도 했어. 내가 기억하는 내 삶에서, 너는 내 첫 번째이자 유일한 친구야."
카시야는 아까 마셨던 와인에 조금 취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낯간지러운 고백을 했다. 천막 안이 어두워 쿠론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갑자기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울고 있는 모양이었다.
"고마워, 카시야. 헤헤… 헤헤헤…. 쿨쩍…. 내일도 바쁘지? 얼른 자."
쿠론은 또 머리를 긁적이며 부산스레 움직이다가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카시야는 왠지 기분이 좋다고 생각하며 다시 침상 위에 몸을 뉘였다.
============================ 작품 후기 ============================
세상에...
저는... 베스트지수 100만은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후 10시 51분 현재 제 글 베스트지수가 117만을 넘었네요.
로판 장르베 4위래요. 세상에... 이거 실화냐...?
일일연재 이벤트 하는 중이라 비축분 뽑아놔도 불안한데
여러분들이 이러시면 연참을 안 할 수가 없잖아요...ㅠㅗㅠ
2연참만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타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