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7 신탁의 악몽(1) =========================
이 상황에서 가장 속이 타는 것은 알테리온 황제였다.
그는 설마하니 제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던 타셀이 이토록 치밀하게 반전을 준비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가 백성들과 병사들에게 인기가 높다는 보고를 받아도 코웃음치며 무시했던 황제였다. 엘레나의 시신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에야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황제와 1황자 쪽으로 양분된 귀족 세력 중 타셀에게 넘어갈 이가 없다고 믿었던 것이 실수였다. 황제나 케일런이나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대귀족뿐이었다. 중소귀족이야 대귀족 아래의 떨거지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어느 쪽에서도 미래를 보장받지 못했던 수많은 중소귀족들의 불만은 쌓여만 갔고, 그 불만을 해소할 길 없던 그들에게 타셀은 벼르며 기다려온 대안이나 다름없었다.
이 사태가 벌어진 원인은 결국 황제에게 있었지만, 그는 모든 사태의 탓을 아슬란 백작에게로 돌렸다.
"그 따위 애송이조차 처리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백전노장의 기사라는 수식을 달고 다니는 게냐!"
대노한 황제의 일갈에 아슬란은 부디 제 목숨만 부지할 수 있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에게는 다행하게도, 황제는 이제 기사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귀족 기사들 중 3할이 타셀을 따라 변방으로 향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 가족들을 반역자로 잡아들이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그들의 가족은 한 달도 더 전에 수도를 떠났다는 보고만 올라왔을 뿐이다.
'이놈이… 이놈이 감히…!'
황제는 자신이 눈치 채지도 못하게 은밀히 움직였던 타셀이 괘씸하다고 여겼지만, 그들이 아무리 소란스럽게 움직였다고 해도 황제는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때가 되면 당연히 타셀이 궁지에 몰릴 것이고, 시기를 보아 자연스럽게 없애면 될 거라고 생각했을 뿐, 전쟁 자체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무패의 영광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에 1황자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위기감이 아니라 귀찮음을 느꼈을 뿐이다. 그 정도로 황제를 따라다니는 '무패의 전설'은 대단했다. 전쟁뿐만이 아니라 인생 전체에서 패배라는 것을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황제였다. 승리가 당연해지다보니 패배에 대한 대비가 부족하게 된 것은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제국이 세 개의 진영으로 나뉘자 이제는 황제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차라리 잘 되었지! 케일런이든 타셀이든 모두 반역자다. 이제 유리카데온만이 온전한 황위 계승자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어. 일단은 케일런을 이용해 타셀을 치고 난 다음, 케일런은 카라볼그로 쓸어버리면 그만이야.'
황제는 케일런이 타셀을 치는 동안 카라볼그를 사용할 방도를 연구해야겠다고 생각 중이었다. 분명 자신이 쓰던 검이었으니, 어떤 조건만 충족되면 다시 그 황홀한 빛을 뿜어내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의 와중에도 신경 쓰이는 것이 바로 신탁이었다.
카라볼그는 알테리온의 선왕인 카를 클레이븐 에반 아마리스가 발견한 신검이었다. 칼리스토니아가 제국이 아닌 대륙 남동쪽의 왕국이었던 시절, 카를은 매해 똑같이 행해지는 관습인 '국왕의 연말 밤샘 기도' 중 대신관과 함께 신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칼리스토니아가 태어난 자궁에 무엇이든 집어삼킬 수 있는 힘이 잠들어 있으니, 마지막 왕의 아들은 그 힘과 함께 위대해지리라. 그러나 탐욕과 오만이 눈을 가리면 완성은 곧 파괴의 시작이 되리니, 자신을 경계하라.'
카를과 대사제는 이 신탁을 들은 뒤 '칼리스토니아가 태어난 자궁'이란 왕국의 시조로 여겨지는 멜빈 왕이 떠올랐다는 아셀리안 숲의 메릴 호수임을, 오랜 고민 끝에 깨달았다. 그 곳으로 향한 수색대는 투명한 호수 밑바닥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각고의 노력 끝에 끄집어 낼 수 있었는데 그것이 신검 카라볼그였다.
하지만 카라볼그를 찾은 것으로 일이 끝나는 게 아니었다. 카라볼그는 분명 훌륭한 검이기는 했으나 특별한 힘 자체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검을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인지 카를과 대신관, 신전의 모든 사제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이어가던 어느 날, 아비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기 위해 신전을 방문했던 열다섯 살의 알테리온이 신탁의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카라볼그를 보고는 별 생각 없이 "멋진 검이로군요. 제가 들어봐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어린 알테리온은 말 그대로 '멋진 검'이기 때문에 만져보고 싶었던 것뿐이지만, 그것을 허락한 카를의 머릿속에는 '마지막 왕의 아들은 그 힘과 함께 위대해지리라.'던 신탁이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시작인 듯, 알테리온이 검을 들자 검신에 새겨진 문양에 푸르스름한 빛이 떠올랐다. 알테리온 역시 그 순간 평소에는 느껴보지 못한 엄청난 힘의 증폭을 느끼고는 이 검이 보통 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카를은 자신의 아들이 황제가 될 것임을 깨달았다. '마지막 왕'의 아들이 알테리온이라면, '왕'이라고 불리는 것은 자신의 대에서 끝나고, 알테리온은 '황제'로 불릴 것임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뻐해 마지않았지만 신탁의 마지막 부분을 늘 마음에 걸려했다. 실제로 알테리온은 어린 시절부터 용맹했고 나이에 비해 엄청난 무위를 자랑했지만, 다혈질인 성정 때문에 거친 면이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져야 직성이 풀렸다. 그래서 대사제를 비롯한 신관과 태자의 교육을 담당한 교사들은 알테리온에게 끊임없이 탐욕과 오만을 경계하고 현명한 군주가 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천성이 탐욕스럽고 오만했던 알테리온은 그런 교육에 불만을 가졌다.
"탐욕이 없다면 제국을 만든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알테리온은 오히려 영토 확장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탐욕이라며 그들의 걱정을 무시했다. 신탁의 내용처럼 알테리온은 카라볼그와 함께 패배 없는 전쟁을 치르며 승승장구했고, 결국 50세가 되던 해에 제국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을 완성하기 5년 전쯤부터 카라볼그는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검신의 문양에서 새어나오던 빛이 점점 약해지더니, 어느 순간 평범한 강철검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신검의 전설로 상대방을 반쯤 이기고 들어가던 알테리온은 그 사실을 숨기고 카라볼그를 황궁의 지하에 감추었다.
문제는 제국의 완성 이후에 생겼다. 승리의 영광과 권력의 달콤함에 잊고 지냈던 카라볼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바로 새롭게 내려진 신탁 때문이었다. 제국력 3년 12월 말일 밤, 심드렁하게 연말 밤샘 기도를 하기 위해 신전에 머물고 있던 알테리온은 대신관과 함께 또 다른 신탁을 듣게 되었다.
'탐욕과 오만에 가려진 눈은 파괴의 시작을 맞이할지니,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힘은 온화하고도 불타오르는 검은 사자의 명에 복종하리라.'
알테리온과 대신관은 카라볼그의 새 주인이 정해졌음을 직감했다. 신의 음성은 오해의 여지없이 머릿속에 울려 퍼져 그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신탁이 카라볼그의 새 주인으로 자신의 둘째 아들을 암시하고 있다고 느끼는 자신이 끔찍했지만, 검은 사자는 부정할 수 없이 타셀의 이미지와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망해버린 타르타니안 왕국의 시조가 검은 사자 부족이라는 전설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알테리온은 신탁에 복종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흥! 새 주인이 죽어버린다면, 신탁도 소용없는 것이 되겠지.'
그때부터 알테리온은 어떻게 하면 큰 반발 없이 타셀을 죽일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자신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황제이고, 타셀이 그동안 미워해 마지않던 자식이라 할지라도, 아들이 귀한 황실에서 아무 이유도 없이 황자를 죽인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카라볼그의 새 주인이 타셀이며, 그로 인해 이 제국이 무너질 거라는 신탁이 내려왔기 때문에 타셀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은, 새 시대의 주인이 타셀임을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10여 년간 타셀에 대한 암살을 간간이 시도하며 골머리만 앓던 중 케일런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처음에는 케일런까지 속을 썩인다고 생각하던 알테리온은, 귀족들을 쥐어짜려는 자신을 말리는 타셀을 보고 묘안을 떠올렸다. 두 아들이 서로를 죽이게끔 만들자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죽어야 할 1순위는 타셀이었다. 카라볼그의 위력을 직접 경험해봤기 때문에 안다. 만약 타셀이 신탁의 새 주인이고, 그가 카라볼그를 들게 된다면, 제국이 그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임을.
'멍청한 놈들. 내가 그 정도 도와줬으면 금방 처리를 했어야지! 도대체 뭣들 하는 거야!'
아슬란 백작의 계급까지 강등시키고 나서도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대는 알테리온의 앞에 케일런의 사신이 도착한 것은 아슬란 백작이 도착한 지 이틀째 되던 밤이었다. 케일런 역시 타셀이 등을 돌렸다는 소식을 들은 뒤 거의 곧바로 태도를 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쯧쯧. 그러니까 그동안 이것저것 재며 질질 끈 결과가 이것이냐? 애초부터 내 말을 들었으면 타셀 놈을 손쉽게 죽일 수도 있었던 것을! 멍청한 놈. 그러니까 그 놈에게 황태자 자리를 주지 않은 것이다!"
쩌렁쩌렁 울리는 알테리온의 노성에 사신의 몸이 발발 떨렸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황제였으니 케일런이 협상을 받아들이겠다고 전해온 것만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했다. 물론 그 의중을 전부 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카라볼그의 신탁을 숨기고 다른 꿍꿍이를 갖고 있는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으니, 케일런도 뭔가 꾸미고 있으리라는 것쯤이야 쉽게 예상 가능했다.
"그래. 멍청한 놈이니,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내 말을 듣겠다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겠지. 일시적인 휴전 협정을 맺을 테니 사절단을 보내라고 해라. 그 이후 타셀 녀석을 칠 계획을 짜도록 하지."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나는 사신을 보다가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온 알테리온은 벌떡 일어나 멜라니아의 방으로 향했다.
"폐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여봐라! 폐하께 용각을 달여서 올려라!"
멜라니아는 그 고운 얼굴에 황제보다 더한 수심을 드리우고는 황제의 건강을 염려하며 값비싼 약재를 달이라고 명했다.
"이 크나큰 제국 안에서 내 마음 둘 곳은 그대밖에 없구나."
황제의 한숨 섞인 치하에 멜라니아는 더욱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2황자가 감히 폐하께 반기를 들었다지요? 적국의 공주였던 어미를 살려주고, 그 배에서 나온 자신을 황자 대우 해주며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내 말이 그 말이다. 애초에 그 어미부터 살려두는 게 아니었어! 복종의 의미로 공주를 바친다며 발발 기는 꼴이 불쌍해서 품어줬더니, 그 은혜를 원수로 갚아?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 아. 잉태중인 그대 앞에서 내가 말이 좀 험했구나. 자기 전에 귀를 씻으려무나."
"폐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제 기쁨이니 염려치 마시어요. 상황이 복잡해져서 저는 폐하와 유리의 걱정뿐입니다."
멜라니아의 부드러운 위로를 받은 알테리온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제국 제일의 꽃은 역시나 한 번도 그의 심기를 거스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유리에게 카라볼그를 쥐여 줘본 적이 없군. 내일 유리와 카라볼그가 있는 지하로 내려갈 터이니 준비를 시키거라."
멜라니아는 기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접촉사고로 인해 다친 곳은 없어요. 차 범퍼를 찢어먹었을 뿐;;;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이 소설에서 로맨스는 좀 천천히 나올 겁니다.
사실 판타지와 로판의 중간쯤에 있는 글이지요;;
게다가 로맨스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매일 생각이 달라지고 있어서 어떻게 전개가 될지 작가도 흥미진진한 부분이고요=_=;;(심지어 아직 남주를 누구로 할지도 정하지 못했어요. 얘는 이래서 좋을 거 같고, 쟤는 저래서 좋을 거 같고... 누가 되든 카시야보다는 안 멋질거 같고...-_-;;;; 게다가 뜬금없이 알리시아x카시야 미는 분들도 계시고;;;; 이러다 남녀불문 역하렘물 될까봐 걱정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즐거운 기대를 갖고 상상해주시어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