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홍의 카르마-28화 (28/134)

00028 신탁의 악몽(2) =========================

케일런과의 휴전 협정이 확실시되자 알테리온은 '반역을 도모한 제 2황자를 칠 것이며, 그를 돕는 자는 발견 즉시 처형한다.'는 내용의 칙명을 내렸다. 그리고 황제파의 구귀족 대지주들은 제 영지에서 타셀을 돕는 자가 나오지 않도록 처벌 내용을 더 엄하게 구체화한 방문을 나붙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제국민들은 황제를 비웃거나 원망했다. 이미 제 1황자의 반란도 2황자에게 떠넘겨 방관하던 황제가, 이제는 2황자의 반란을 반역자인 1황자에게 떠넘기려 하니 비웃지 않을 수 없는 얘기였다. 애초에 황제가 제대로 처신했다면 2황자가 반역을 일으킬 리 없지 않냐는 게 중론이었다.

타셀은 황궁과 귀족들 사이에서는 '황제에게 버려진 힘없는 황자'였지만, 사실 제국민들 사이에서는 세 황자들 중 가장 인기가 높았다. 그리고 그 인기를 암암리에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섀도 워커였다. 전국 각지에 퍼져있는 섀도 워커들은 대부분 평민이었다.

타셀은 어린 시절부터 억압당하는 억울한 백성들의 얘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최대한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권력에 의해 희생당할 상황에 놓인 이들을 구해주었다. 그것은 아마, 황궁 내에서 자신이 당하는 억압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구하러 와줄 이는 없지만, 자신은 누군가를 구해줄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을 깨달았을 무렵부터 그는 자신의 크지도 않은 권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백성들을 보듬었다. 하지만 귀족들에게만 신경을 쓰던 황제는 타셀의 그런 행동에 관심도 없었고, 간간이 전해 듣더라도 비웃기 일쑤였다.

"그래, 언젠가는 그 놈도 황궁에서 내쳐질 날이 올 테니, 지금부터라도 친구들을 만들어놔야겠지."

그게 황제의 반응이었다.

물론 타셀이 반역을 염두에 두고 행한 일들은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이 닥치자 그동안 베푼 선의가 암암리에 보답을 받게 되었다. 우선, 타셀을 지지하는 백성들은 타셀의 위치를 발설하지 않았다. 타셀의 군대가 지나간 행로를 뒤늦게 파악하려고 파견된 황궁의 조사관들에게 엉뚱한 방향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섀도 워커가 중심이 된 가짜 보부상이 지역을 돌며 옷감이나 금속, 곡식이나 과일 등의 물품을 기부 받아 국경으로 날랐다. 엔드로스의 선정으로 데런의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갑작스레 불어난 군사들을 먹이고 입힐 자원이 부족했던 것이다. 변방 귀족 연합 지역에서 최대한 물자를 끌어올 계획이었지만, 백성들의 십시일반으로 사정이 크게 좋아졌다. 그동안 주둔지에서도 백성들에게 해를 입히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린 효과도 있었다. 케일런 군대에 수탈을 당하고 가족을 잃었던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타셀의 군대에 자신을 받아달라고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황제가 그동안 타셀을 무시 할만도 했던 것이, 사실 계급 사회에서 일반 백성의 지지를 받아봤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각 영지의 성주는 대귀족에게 소속된 자들이었고, 이들의 물자는 피라미드의 정점, 황제에게 모이게 된다. 타셀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질 위치였다. 제국의 정세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했다.

"으허억! 헉…. 헉…."

"폐하…! 또… 악몽을 꾸셨습니까? 여기, 물 좀 드시지요."

알테리온은 후궁이 내민 잔을 빼앗듯 낚아채 벌컥벌컥 마셨다. 그는 벌써 며칠 째 기분 나쁜 악몽을 꾸고 있었다. 악몽이 시작된 것은 며칠 전, 대신관과 함께 유리카데온을 데리고 지하에 갔다 온 뒤부터였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유리카데온은 검을 들지도 못했다. 아직 아홉 살의 어린 아이가 들기에는 턱도 없이 무거운 강철검이었으니 그럴 수 있다며 아쉬운 속을 달래야 했다. 지하의 서늘하고 습한 공기에 잔뜩 주눅 든 유리카데온을 데리고 올라가라고 시녀에게 명한 뒤 대신관과 둘만 남은 알테리온은 그와 다시 한 번 신탁에 대해 고민했다.

"한 번 내려진 신탁이 실현되지 않은 적이 있나?"

"모든 역사서를 뒤져봐도, 신탁은 반드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탁을 잘못 해석했을 가능성은 없는가?"

"…말씀드리기 대단히 황공하옵니다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즉, 카라볼그의 새 주인이 되는 타셀에 의해 나와 이 제국이 다 집어삼켜진다, 이건가?"

"…."

"그럼 나는 그 날만을 기다리고 앉아있어야 된다는 말인가?"

"…현재 신전의 모든 신관들이 헤바 신께서 노여움을 푸시도록 매일 기도를 드리고 있으며…."

"노여움? 그거 웃기는군. 애초에 부왕께 카라볼그를 내리신 것도 신이고, 내가 그것으로 제국을 통일할 것이라는 신탁을 내린 것도 신이다. 나는 신의 뜻을 행한 것 밖에 없는데, 왜 노여워한다는 말이지? 응? 대답해보게."

"그…. 타, 탐욕이…."

"난 그 탐욕 덕분에 제국을 통일했네만? 탐욕이 없는 자가 어찌 정복 전쟁을 일으킨다는 말인가?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나?"

"황송하옵니다."

대신관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대해 사죄하고 있었다. 신탁에서 말한 '오만과 탐욕'이란 사실 영토 정복이 아닌 군주로서의 자세라고 생각하고 있던 대신관이다. 알테리온이 대정복전쟁을 일으키던 당시, 칼리스토니아 주변 왕국들은 칼리스토니아보다 한참 사정이 좋지 않은 나라들이 대부분이었다. 힘없는 왕권 아래의 영주들이 제 영지와 사병을 갖고 멋대로 독립을 해 건국한 나라들도 부지기수였고, 그런 어중이떠중이 왕국의 백성들은 마치 노예처럼 왕에게 모든 걸 저당잡혀 살았다. 그랬기 때문에 최초에 출정하던 당시의 명분은 '학정에 지친 백성들에게 위대한 칼리스토니아의 빛을!'이었다. 몇몇 국가에서는 백성들이 아예 길을 열어주며 정복군을 환영하기도 했다. 그때의 알테리온은 그야말로 찬란한 빛을 선사하는 태양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정복전쟁은 시작도 전부터 제국의 경계를 정해놓고 있었다. 알테리온은 자신만만하게도 칼리스토니아를 집어삼킬 수 있는 왕국들 바로 아래까지 밀고 나가기로 결정했다. 정복할 영토를 정해놓고 일으킨 전쟁이니 제국의 '완성'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지만, 어쨌든 그 당시에는 다들 '불가능'을 떠올렸었다. 결과적으로 현재 칼리스토니아 제국과 국경을 맞댄 나라들은 함부로 쳐들어갈 수 없을 만큼 탄탄한 나라들뿐이다. 일부는 칼리스토니아 왕국보다 강대했다. 그들은 칼리스토니아의 확장을 막고자 침략을 받은 국가에 원조는 보냈지만 카라볼그를 든 알테리온이 그 나라들을 정복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본토까지 허락하지는 않을 정도의 무력과 연합세력은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알테리온은 거기에서 멈췄다.

그렇다.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다. 칼리스토니아 제국의 완성이라는 대업을 이룬 알테리온이 만약 그 이후 선정을 펼치며 누더기를 조각조각 기워놓은 모양새의 제국을 잘 보살폈다면, 이런 신탁이 내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알테리온은 자신이 이룬 승리의 영광에 지나치게 취해버렸다. 그는 자신이 '제국의 완성'이라는 업적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고, 황궁의 가장 높은 보좌에 앉은 채 귀족들과 백성들을 쥐어 짜내기 시작했다. 그가 정복했던 소국의 왕조들이 저질렀던 짓을, 더욱 더 대규모로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들이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처럼, 항궁은 엄청난 물자와 사치품을 소비해갔다. 그 때문에 전쟁 이후 제대로 회복되지도 않은 정복지의 사정은 말할 수 없이 안 좋아졌는데도 황제는 무관심했다. '정복'은 했으되 '통치'하지는 않은 그에게서 민심이 떠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대신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알테리온의 목소리가 갑자기 다정해졌다.

"이번 신탁은 누가 알고 있는가?"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폐하의 명으로 폐하와 저, 둘 밖에 없습니다."

"흐음…. 그렇군. 그래, 이 신탁은 절대로 새어나가서는 안 되네. 자네 먼저 올라가보게. 난 생각할 게 있어서 잠시 후 올라가겠네."

축객령에 대신관은 깊게 허리를 숙여 절하고는 차분히 뒤로 물러나 계단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첫 번째 계단에 발을 디디려는 순간 갑자기 엄청난 충격이 몸통을 꿰뚫었다. 내려다보니 가슴 한 가운데에 카라볼그의 칼끝이 뾰죽하게 솟아나 있었다.

"커흑…."

카라볼그가 그의 몸에서 뽑힘과 동시에 목구멍에서 울컥하고 올라오는 핏덩이를 내뱉은 대신관은 차가운 돌바닥에 철퍽, 하고 쓰러졌다. 마지막 생명이 빠져나가느라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는 늙은 육체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알테리온이 중얼거렸다.

"원래 비밀이라는 건 나 이외의 다른 누군가가 알게 된 순간부터 비밀이 아니게 된다네. 그 신탁은, 정말로… 정말로 새어나가서는 안 되거든."

대신관이 만약 좀 더 예민하거나 경계심이 많거나 황제를 덜 믿었더라면, 황제가 지하로 향하는 그들의 시중을 들 시종으로 문맹인 벙어리들만 데리고 가겠다던 순간에 깨달았을 것이다. 햇빛도 들지 않고 곰팡내 나는 습한 공기의 그곳이 자신이 마지막으로 밟는 땅이 될 것임을….

미리 시체를 치워야 할 것임을 알고 있었던 시종들은 놀라지도 않고 차분히 대신관의 시체를 처리했다. 대신관은 타셀 측의 첩자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내일 아침에 발표될 것이다.

알테리온은 다시 카라볼그를 석관 위에 올려놓고 자신에게 이 제국을 선물했던 그 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신관의 피는 어느새 칼에 흡수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수천 명의 살과 뼈를 가른 검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도 칼날은 언제나 시퍼렇게 날카로웠다. 피와 지방 덩어리에 더러워진 부분도 없었다. 카라볼그는 관리하지 않아도 언제나 완벽한 검의 형태 그대로였다. 그 자체로 이미 신비로운 검인 카라볼그는, 그러나 그 아름다운 푸른빛을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다.

"차라리 이 검을 다시 메릴 호수에 처박아놔야 하려나…."

알테리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지하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신의 종을 죽인 대가인지, 그 이후부터 악몽에 시달리는 것이다.

사실 알테리온의 꿈이 특별히 악몽이랄 것은 없었다. 누가 쫓아와서 그를 죽이려 한다거나 괴롭히는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하얀 빛이 가득한 공간에서 그가 들었던 신탁이 누군가의 거룩한 음성으로 끊임없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그 생각만 했나보다고 무시하던 알테리온은 그 꿈이 이틀, 사흘 계속 이어지자 드디어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신전에 빨리 대신관을 뽑으라고 해야겠군. 제기랄. 내가 임명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을….'

제국의 모든 것이 황제의 것이었으나 신전만은 황제가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신관과 대신관의 임명 역시 신전만의 검증을 통해 임명되었으며, 그 사이에 황제는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가 없었다. 전 제국민 및 일부 왕국에서도 신실하게 믿는 히드레이 교였기 때문에, 사실 그가 대신관을 죽였다는 사실이 발각된다면, 황제라 하더라도 무사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범죄였다. 애초에 강력한 신성력의 보호를 받는 대신관은 아무에게나 죽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 아마 카라볼그였기 때문에 죽일 수 있었으리라.

대신관이 황제를 알현한 뒤 신전으로 돌아가다가 누군가의 습격을 받고 살해당했다고 발표한 직후, 알테리온도 어쩔 수 없이 신전의 눈치를 보았다. 신전에서 파견한 조사관들을 최대한 방해했지만, 부서진 마차와 습격당한 주변을 샅샅이 훑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사 결과를 받아든 신전에서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대신관의 장례 문제를 논의하러 사절단이 황궁을 방문했을 뿐이었다.

알테리온은 신전에서 그의 말을 믿어주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은 신전보다는 타셀을 죽이는 것이 급선무였으니까.

============================ 작품 후기 ============================

남주에 대한 뜨거운 관심, 감사드립니다.

남주는 카라볼그가 어떠냐는 4560124님의 코멘트가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뒤통수를 얻어맞는듯한 신선한 발상이었습니다.

하지만 혹시나 기대를 저버리게 될까봐 미리 말씀드립니다.

우선 GL이나 역하렘, 무생물 남주(!)로는 가지 않을 거고요^^;;

남주는 어제, 오늘 고민하면서 거의 결정 봤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드리지는 않을 거예요.^^

아, 그리고 1덤 님께서 걱정해주셔서 부랴부랴 작품소개에 표지 출처 썼습니다. 제가 직접 만든 거에 대해서는 안 달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보네요. 말씀주셔서 감사합니다.(표지는 1회 작품설정 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별 건 아닙니다만;;)

다음편부터는 다시 카시야가 등장합니다. 여러분,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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