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홍의 카르마-29화 (29/134)

00029 의심(1) =========================

연회의 다음날 아침, 카시야는 새벽같이 일어나 매일 하는 기본 단련을 마치고 씻었다. 그때까지 간밤의 숙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병사들은 온갖 곳에 널브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었지만, 자기관리가 철저한 인간은 어디에나 있는 법인지라 카시야처럼 일찍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부터 고강도의 훈련을 시작하는 카시야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여기사가 저토록 철저하게 기사로서의 무공을 연마하고 몸을 만드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안개숲에서 살아 돌아온 뒤 잡기 시작한 검은, 이제는 초기의 어설픈 모양새가 사라지고 어느덧 웬만한 기사 수준이 된 것 같았는데, 사실 검의 수련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시간에 빠른 달성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카시야가 검술 수련을 할 때 은근히 구경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여자라며 무시하던 이들은 어느 날 용기를 낸 누군가가 '대련 신청'을 하게 된 것을 계기로 가끔씩 대련 상대로 카시야를 청하기도 했다. 물론 그 중 일부는 여성인 그녀를 납작하게 눌러주고픈 뒤틀린 욕망 때문이었지만, 대부분은 순수하게 카시야의 빠른 성장을 놀라워했고 그 검에 자신의 검을 맞대보고 싶다는 기사로서의 욕망에 기인한 대련 신청이었다.

'맞춤 검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단검도 그렇고….'

전생에서는 그녀만을 위해 특수 제작된 나이프가 있었다. 이 세계에서 그렇게까지 정교한 무기 제작을 바라서야 안 될 것 같았지만, 검을 들고 싸우는 여기사가 적다보니 지급된 검도 남성들이 보통 쓰는 바스타드 소드나 롱 소드였다. 롱 소드 정도는 카시야도 무리 없이 들기는 했지만 실전에 투입된다면 날렵함이 장점인 카시야로서는 작은 검이 편했다. 카시야는 검술 수련을 할 때마다 이상적인 검의 형상을 하나씩 머릿속에 그려 넣었다.

어쨌든 오늘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어제처럼 깨끗하게 차려입어야 했다. 홀에서 군제 정비를 위한 회의를 여는데 그녀도 참석하라는 명이 있었으니까. 타셀은 경계하던 초기와는 달리, 지금은 오히려 불가사의할 정도로 그녀를 믿고 있었다. 엘레나 황비를 그의 품에 데려다 준 덕분일 것이다.

"으… 머리야…. 아이고…. 다시는 술 마시지 않을 거야."

한참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데 그제야 쿠론이 일어났다.

"글쎄…. 그런 말 하는 사람치고 진짜 술 끊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데."

"어…? 카시야, 어디 가? 아… 맞다. 오늘부터 너 뭔가 바빠진댔지?"

"바빠질지 말지 그거야 나도 모르지. 어쨌든 참석하라는 회의가 있어서, 지금 가봐야 해. 식당 천막에서 토마토 수프를 나눠주더라. 가서 좀 먹고 정신 차려."

간밤에 '친구 고백' 같은, 낯간지러운 말을 주고받았던 터라 쿠론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진 카시야는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얘기하다가 막사를 나왔다. 성문 밖에 넓게 형성된 병영은 숙취에서 깨어 어슬렁거리기 시작한 병사들 덕분에 점차 활기를 띠었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길을 지나 성 안으로 향하던 카시야는, 성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자신을 흘끔대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반은 호기심이었지만, 반은 절대 호의적이지 않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홀에 들어서자 그 시선은 더욱 노골적으로 적의를 쏘아댔다. 간밤에 타셀이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하지만 카시야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 이런 일을 한두 번 당해본 게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나 주요 자리를 꿰차는 그녀에게 처음부터 호의적이었던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지크와 미하일 곁에 서있으려니 잠시 후 타셀이 아나클리프 백작을 위시한 변경 지역 귀족 연합의 수장들과 함께 단상에 섰다.

"모두들 예상은 하고 있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연합 군대의 조직을 재구성하려고 한다. 내가 이끌고 온 군대와 아나클리프 경 및 귀족 연합의 각각이 이끌던 군대가 합쳐지게 되었으니 필연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임은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잘 모르는 기사를 동료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우리의 큰 목표를 바라봐주길 부탁하는 바이다. 우리는 여기서 서로 싸울 때가 아니라, 빠른 시간 내에 화합하고 단결하여 제국을 비탄에 몰아넣은 황제와 1황자를 무찌르는 것임을. 그럼 우선 크게 나뉘는 세 부대의 수장을 먼저 발표하겠다. 호명된 자는 홀 앞에서부터 차례로 정렬하라."

타셀은 연합 군대 전체를 7연대로 나누고 그것을 3부대로 묶었다. 3개의 연대를 묶은 제 1부대는 타셀이 직접 지휘했고, 2연대씩을 묶은 제 2부대와 제 3부대는 각각 아나클리프 경과 갤리언 경이 지휘했다. 그리고 각 지휘관 아래에는 그들의 최측근이 각각 보좌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모든 연대에는 각 진영의 인재가 골고루 섞여 배치되었다. 각 부대, 연대, 중대, 분대까지의 모든 지휘관과 보좌관을 다 임명하고 났는데도 카시야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모든 이의 이름이 호명되어 홀을 가득 채울 정도로 정렬해 있는데 카시야만은 홀 가장자리에 서서 대기중이었다. 그녀의 존재를 의아하게 여기는 눈빛들이 암암리에 오고 갔다. 다 끝났나 싶었을 때 타셀이 드디어 카시야를 호명했다.

"카시야 경은 맨 우측에 따로 정렬해주게. 나는 우리 부대 안에 암살 및 정보 수집을 위한 분대를 따로 만들 생각이다. 그리고 그 분대의 교육과 지휘는 카시야 경에게 맡기겠다."

타셀의 발표에 다양한 감정이 사람들의 얼굴을 스쳤다. 분대라는 게 제일 적은 인원의 집단이었지만, 그럼에도 제국 역사상 여기사가 분대장을 맡았던 적은 없었다. 심지어 암살과 정보수집에 특화된 특별 조직이며, 그 교육과 지휘 전체를 여기사에게 맡긴다니, 대부분의 기사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카시야는 카시야대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이 세계에서도 자신의 역할은 암살자라는 것이, 그 능력의 우수함과는 별개로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시야는 받아들였다. 냉철하게 생각하면, 암살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던 세계에서 온갖 훈련을 받았던 자신이 타셀에게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암살자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누구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게 조금 걸렸다. 자신이 받았던 대로 훈련을 한다면 고작 2~30명의 인원 갖고는 살아남는 자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자원인 만큼 다른 훈련 방법을 생각해봐야 하는데, 그녀는 자기가 받았던 훈련 방법 외에는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모두가 자기 나름의 생각에 빠져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와중에 군 편성 회의 및 각 조직의 장들에 대한 임명이 끝났다. 해산하라는 타셀의 명령에 홀을 빠져나갈 순서를 기다리던 카시야의 곁에 지크가 다가왔다.

"어때? 잘 해낼 수 있겠어? 전하께서 기대가 크시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죠. 아, 그런데 혹시 제게 맞는 무기를 따로 고를 수 있겠습니까?"

"응? 무기? 왜, 검 지급이 안 됐나?"

"아뇨. 검은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남성 기준으로 보급된 검이다 보니 제가 쓰기에는 조금 크고 무거운 감이 있습니다. 그보다 좀 작은 검은 없습니까?"

"흐음…. 무기고에 가서 한 번 찾아볼래? 우리가 가져온 무기는 다 그게 그거고, 귀족 연합 측에 무기가 다양한 것 같더라. 따라와. 갤리언 백작께 말씀드려줄 테니까."

지크는 카시야를 데리고 갤리언 백작에게로 가서 무기 지원을 요청했다. 갤리언은 다시 그 휘하의 병사를 부르더니 카시야가 고르는 무기를 그녀에게 지급하라고 전했다.

"그럼 카시야 경. 따라 오시죠. 저희 무기고는 성 북문 쪽에 있습니다."

카시야는 갤리언과 지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그녀를 정중하게 대하는 병사를 따라 북문 쪽으로 향했다.

북문 근처에는 귀족 연합 군대의 병영이 펼쳐져 있었다. 그들 사이를 지나려니 그녀의 존재를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의 눈빛이 부지런히 서로 교차하며 무언의 계획을 세우는 느낌이 들었다. 카시야를 안내하던 병사가 그녀를 잠시 서있게 하더니 누군가에게 가 귓속말을 하고 돌아왔다. 다시 무기고를 향하기는 했지만 그는 미묘하게 미적거리고 길을 돌아가며 시간을 버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또냐….'

카시야는 대충 예상했다. 몇 명이나 상대가 가능할지 가늠해봤지만 현재 자신의 신체가 과연 전생의 자신의 신체처럼 지치지도 않고 움직여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무기고라는 곳의 나무 문짝을 열어젖히자 아니나 다를까, 이미 선객들이 자리 잡고 앉아있었다.

"어-이. 이게 누구신가. 타셀 전하께서 총애하시는 카시야 경 아닌가! 암암, 침대를 데우는 일은 모든 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지. 그래, 우리 침대도 데워주려고 친히 방문하셨나?"

어제 연회에서 그녀에게 가장 삐딱하게 굴었던 근육질의 기사가 비아냥거렸다. 카시야를 데리고 온 병사는 밖으로 나가더니 문을 걸어 잠그고 망을 보는 것 같았다.

'하나, 둘, 셋, 넷… 총 일곱 명…. 하…. 옛날에도 이거랑 똑같은 일이 있었는데 말야….'

그녀를 린치하기 위해 창고로 끌고 갔던 그 때의 병사들도 총 일곱 명이었다. 꼭 이 또래의 젊고 혈기 왕성한, 뇌까지 근육으로 찬 것 같은 이들이었다. 카시야는 이번 생이 지난 생과 너무나도 닮았다고 여겼다.

"갤리언 경의 허락을 받고 제가 쓸 무기를 고르러 왔습니다만."

"헤에-. 경은 알몸이 곧 무기 아냐? 뭐, 여기까지 어려운 걸음 했으니까, 내가 여러모로 좀 가르쳐주지."

낄낄대며 욕정으로 번들거리는 눈알을 굴리는 제 앞의 기사들이 움직일 방향을 가늠하며 카시야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그 창고는 무기고도 아니었다. 날붙이가 주변에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칫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후우…. 일단, 선빵은 받아줘야겠지.'

자신이 먼저 움직였다간 일방적인 폭행이 되어버릴 터였으니, 그녀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병사가 어떤 식으로든 먼저 공격하길 기다렸다. 그런데 그는 카시야의 앞까지 다가오더니 바지춤을 풀어 내렸다. 좌우에 있는 한 패들이 더욱 낄낄대며 웃었다.

"야, 얼어있는 것 좀 봐! 크하하하하!"

"어이! 카시야! 뭐하는 거야? 뭘 해야 할지 잘 알잖아?"

하지만 카시야는 제 앞으로 온 그가 제 하반신을 덜렁거리며 내보였음에도 별 미동도 없었다. 그를 가만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선공격이 들어올까 고민하던 카시야는 결국 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피식 비웃었다.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걸 갖고 뭘 어쩌라고."

역시 모든 남성에 대한 최대의 공격은 '사이즈'에 대한 공격인 듯 했다. 그는 처음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지만, 카시야의 말에 바닥을 뒹굴며 웃는 제 동료들을 보자 자존심이 확 상했는지 카시야를 향해 따귀를 날릴 작정으로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손은 공중을 갈랐을 뿐이다. 가뿐히 그의 손을 피한 카시야 때문에 그의 동료들은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할 만큼 웃어대고 있었다.

"이 건방진 년이…! 적당히 예뻐해 주고 보내려고 했더니만 안 되겠네. 두 다리로 걷질 못하게 만들어주마!"

그는 이번엔 주먹을 쥐고 카시야에게 휘둘렀다. 하지만 카시야가 보기에는 너무 느려 터졌다. 게다가 바지가 무릎 아래로 내려간 이가 제대로 걷기나 하겠는가. 카시야는 주먹을 피하는 척 뒤로 물러나다가 다시 그에게 달려가며 바닥을 슬라이딩했다. 카시야의 발에 걸린 바지 때문에 그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거구가 넘어지는 소란에 깜짝 놀란 그의 동료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카시야는 모두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홀리토이 님, 쇼에나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제가 다음주부터 복직이랍니다. 좋았던 시절 다 가버렸어요.=_=;;

복직 전에 비축분 열심히 뽑아야 하는데 자꾸 딴짓만 하구, 큰일입니다.

과연 나는, 일일연재 이벤트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장르베 1위는 못해도 성실연재만큼은 꼭 하고 싶군요. 노력하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