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0 의심(2) =========================
"뭐? 카시야 경 혼자 무기고에 보냈다고?"
회의가 끝난 뒤 이런저런 사항들에 대해 보고 받던 타셀이 지크에게 되물었다.
"변경 귀족 연합 측 기사들이 카시야 경에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을 리가 없어.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어…. 아까 미하일이 카시야 경을 찾길래 그쪽 방향을 알려주긴 했는데, 미하일이 가보지 않았을까요?"
걱정하는 타셀과는 달리 그의 걱정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찡그린 지크가 대답했다. 하지만 지크는 다른 일로 바빠서 다른 기사들이 카시야에게 품은 반감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어제밤 연회에서 타셀이 목격한 음험한 눈빛만 해도 적은 수가 아니었다. 타셀은 총사령관이자 이 무리의 수장으로서 자신이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결정으로 그런 위험에 빠지게 된 것이나 다름없는 카시야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던 '죽음에서 살아돌아온 자'는 자세한 것은 묻지도 않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해주었다. 그런 신하를 제대로 책임져주지 않는다면 누가 자신을 주군으로 섬기려들까. 타셀은 지크를 바라보다가 북문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일단 가보자. 핑계는 귀족 연합 세력의 병사들의 사기 고취를 위한 격려, 정도가 좋겠군."
지크는 그를 따르면서도 방문 목적까지 핑계를 대가면서 카시야를 챙겨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의아했다. 게다가 자신의 주군은 그녀에 대한 걱정이 과했다. 미하일처럼 맞부딪혀본 게 아니더라도 카시야가 웬만한 공격에 당할 기사가 아니라는 것 쯤은 그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카시야가 실수로 다 죽여버릴지도 모르니 그건 좀 주의를 해야겠다."던 미하일의 말이 떠올랐다. 그제야 '아, 전하께서 걱정하시는 건, 카시야가 아니라 상대쪽인가….'라고 납득한 지크는 별 말 없이 자신의 주인을 따랐다.
"으아악! 이… 이 미친 년이! 죽여버리겠어!"
생전 듣도 보도 못했던 기묘한 무술에 속절없이 얻어터지면서도 마초적인 자존심에 위협적인 말 한 마디씩은 꼭 덧붙이는 놈들이었다. 카시야는 피식 웃으며 그의 명치를 살짝 비껴난 곳에 뒷발차기를 날려주었다. 그는 다시 커헉, 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한동안은 숨쉬기도 힘들어 꼼짝 못할 것임이 틀림없었다.
검이나 창과 같은 무기를 들고 휘두르거나 찌르는 것이 훈련받은 것의 대부분인 기사들인지라 카시야가 전생에 훈련받았던 맨몸 격투 쪽은 실력이 한참 뒤쳐졌다. 특히 그녀가 벽을 타고 날아오르며 화려한 발차기와 공중제비를 선보였을 때 뒤편에 서있던 두어명은 넋을 놓고 구경할 정도였다.
카시야는 오랜만에 온몸의 관절을 제 뜻대로 꺾고 펴고 내지르며 개운함을 느꼈다. 역시 혼자 허공에다 대고 하는 연습보다는 실전에서 움직여보는 편이 훨씬 좋았다. 이 시원한 타격감! 자신의 몸이 어디까지 움직여줄지 몰라 불안했던 그 동안의 걱정이 실전을 경험하며 하나씩 풀어져가자 카시야는 저도 모르게 큭큭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그녀의 동작이 더욱 빨라졌다. 그녀를 덮치려는 상대의 품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와 손날로 뒷목을 쳐서 기절시키거나 팔꿈치, 무릎, 뒷꿈치로 급소를 아슬아슬하게 피해서 찍어댔다. 이미 그녀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일곱 명의 기사들은 그녀가 소리내어 웃기 시작하자 그야말로 공포에 잠식당했다. 악마라도 만난 것처럼 떨리는 그들의 눈빛을 본 카시야의 얼굴에는 희열이 드리웠다. 그녀는 오랜만에 만끽하는 폭력의 향연에, 잠들어있던 자신 안의 괴물이 눈 뜨는 것을 느꼈다.
카시야 델 로만이 사신이 될 수 있었던 것에는 그녀 안의 이 괴물이 한 몫 했다.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거세된 그녀에게 가장 큰 만족감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승리'와 그 승리에 따른 치하 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점점 '승리'나 '임무의 완수' 이외에는 별 관심이 없어져갔다. 하지만 자각하고 있지는 못했어도 그녀의 무의식은 비정상적인 인생 안에서 생긴 미칠듯한 울분을 차곡차곡 쌓아갔고, 그렇게 쌓인 울분은 적을 대할 때 폭발했다. 이 두 가지가 결합하자 그녀의 안에는 잔혹한 살의라는 괴물이 또아리 틀게 되었고, 그 괴물이 눈을 뜨면 그녀의 손길에는 자비가 없어졌다.
무아지경으로 미친 듯이 남자들을 패다보니 어느새 그녀 주변에 제 두 다리로 서있는 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녀 안의 괴물은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그들을 다 죽여서는 안 되었고, 이미 기절한 놈들을 죽이는 것도 재미가 없었다.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흥분에 달달 떨리는 제 손을 내려다보던 카시야는 손등에 묻은 피를 보고 제 바지에 비벼 닦았다. 그제야 닫혀있던 나무 문이 도로 열리며 미하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시야!"
서둘러 달려온 듯 가쁜 숨을 몰아쉬던 미하일은 제 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널브러져 쌓인 장정들 가운데 놓인 의자에 걸터앉아 제 손등의 피를 바지에 문질러 닦고 있는 카시야의 눈에는 아직 갈무리되지 않은 살기가 넘실댔다. 나무 문을 지키고 섰던 병사는 집단 린치 내지는 강간을 당하고 있을 카시야의 모습을 들킬까봐 안절부절 못하다가 모두가 처참히 얻어터져 쓰러진 광경을 보고 입을 쩍 벌린 채 얼어버렸다.
"큽… 크하하하하하!"
얼어붙은 적막을 깬 것은 미하일의 웃음소리였다. 그 사이 카시야도 제 몸에 휘몰아쳤던 살기를 거둬들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인도해왔던 병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번엔, 무기고에 데려다 주시겠습니까?"
그 병사는 불쌍할 정도로 창백해져서는 삐걱거리는 팔다리를 놀려 움직였다. 미하일이 카시야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웃음을 멈춰보려고 노력했다.
"으하… 으하하하하! 아이고, 네 덕분에 간만에 웃었다, 야. 으하하하하."
"미하일 경. 무겁습니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이 정도로 빌빌댈 것도 아니면서. 너, 진짜 언제 나랑 대련 한 번 해보자. 저놈들 패는 꼴을 눈 앞에서 보지 못한 게 한이네."
아직도 즐거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미하일이 카시야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무기고로 향하는 모습을, 뒤따라왔던 타셀과 지크가 멀리서 바라보았다.
"하아…. 전하의 걱정대로네요. 죄다 피떡을 만들어놨는데요? 그래도 죽이지는 않은 거 보니까 카시야도 적당히 힘 조절을 한 모양이에요. 이 놈들 정신차리면 다시 단단히 교육시키겠습니다."
자신의 걱정의 방향이 카시야가 아니라 상대편 쪽일 거라고 당연히 믿는 지크를, 타셀은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카시야를 여성으로 대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놈들이군. 하긴, 이 정도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
기절해있는 장정 일곱을 내려다보며 타셀 역시 카시야에 대한 생각을 조금 수정했다. 미하일이 팔을 둘러 반쯤 기댔는데도 힘겨운 기색 없이 태연하게 걸어가는 카시야의 뒷모습이 잔영처럼 뇌리에 남아 오래 기억되었다.
무기는 역시나 방금처럼 허름한 나무 문짝이 아닌, 철로 마감된 문 안 쪽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크의 말처럼 확실히 타셀이 끌고 온 부대가 보유한 것보다 다양한 종류의 무기가 구비되어 있었다.
"어떤 무기를 찾으려고 온 거야?"
역시 뼛속까지 기사인 미하일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무기의 면면에 눈을 떼지 못하고 황홀한 듯 바라보며 물었다.
"제게 맞는 크기의 검을 찾고 싶어서요. 단검 역시 그렇고요. 제 사이즈에 맞게 특수 제작을 하면 좋겠지만 그건 무리일 것 같아서…."
"호오…."
미하일의 시선이 그제서야 카시야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자신의 신체 사이즈에 맞춰 무기를 특수 제작한다는 것은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있는 무기에 자신의 무공을 맞추는 게 당연한 세상이었고, 자신만의 특별한 무기를 갖는다는 것도 고위 귀족 기사나 되어야 할 수 있는 소리였다. 그러니 가난한 평민 출신의 기사가 그런 얘기를 하는 것에 굉장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미하일은 직감적으로 그녀가 이미 자신의 신체 사이즈에 맞는 무기를 가졌던 경험이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 이는 아예 이런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을테니까 말이다.
'도대체 이 깜찍한 괴물은 어디서 나타난 걸까…. 정말 궁금하네.'
무기를 둘러보는 데 정신을 빼앗긴 카시야는 미하일의 눈에 떠오른 호기심을 미처 볼 수 없었다.
"조금 작은 검을 보시려면 이쪽을…."
병사가 가리킨 곳에는 다소 작은 사이즈의 검들이 놓여있었다. 카시야는 진수성찬을 앞에 놓고 무엇부터 먹을까 고르는 눈으로 검들을 살폈다. 결국 카시야가 고른 검은 팔치온과 튼튼해 보이는 단검이었다. 어차피 암살 부대가 검술을 맞대며 싸우지는 않을 것 같았고, 암살에 편리한 도구는 일단 휴대가 간편하고 접근전에 편해야 했다.
그날 오후부터 전 군대는 새롭게 개편된 조직을 따라 재정비되었다. 방금까지 한솥밥을 먹다가 헤어지게 된 전우와 부둥켜안고 꼭 살아남자는 인사를 나누는 병사들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지거나 앞으로 있을 전투에 긴장했거나 새로운 희망에 들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제 1부대 곁에 차려진 카시야의 분대로 모인 이들의 얼굴은 당혹감에 물들어있었다.
"에…. 지금 그러니까, 저 계집의 명에 따라라, 이겁니까?"
불만 어린 목소리에 미하일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의 입매는 그러나 여전히 장난스럽게 휘어져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더 큰 불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왜, 전하의 명령이 마음에 안 드나?"
미하일의 일갈에 방금 말을 꺼낸 병사를 비롯한 모두가 입을 다물었지만, 불만 가득한 눈동자는 카시야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큭큭. 정말 다들 얻어터져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카시야의 실력이 의심스러우면, 갤리언 백작 쪽 병사들한테 물어봐. 오늘 오후에 카시야한테 맞아서 피떡이 된 놈들은 어떻게 하고 있냐고."
그 말에 병사들은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지만 미하일도, 카시야도 더는 그들을 달랠 생각이 없었다.
"방금 미하일 경에게 얘기를 들었겠지만, 우리 분대는 앞으로 암살이나 정보 수집에 파견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 적진에 뛰어들었다간 다들 죽은 목숨이지. 막사를 정비하고 오늘까지는 푹 쉬어라. 내일부터 훈련이니까."
이 어중이떠중이들을 어떻게 암살자, 아니, 암살자 비스무리한 것으로나 키워낼지 막막한 기분으로 카시야는 해산을 명했다.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그녀의 밑에 배정된 분대원은 총 20명.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의 젊은 남자들이었다. 다만 귀족의 반발을 우려해 20명 전원이 평민 출신 기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상관이 '여자'라는 이유로 다들 반감을 보이는 것이었다. 귀족 기사가 끼어 있었다면 아마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를 뒤돌아보자면, 150여명이 있던 캠프 X에서 살아남아 1급 암살자로 활동할 수 있었던 인원이 고작 17명이었다. 이 스무 명 중에 한 명이라도 1급 암살자가 될 수 있다면 엄청난 행운이다. 물론 그런 행운은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대부분은 카시야가 생각하는 훈련을 제대로 버티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암살자가 되려면 일반 기사의 크고 두툼한 근육이 아닌 가늘고 촘촘한 근육을 키워야 했고, 그들이 이제껏 배워온 장검술이 아닌 단검술과 매복, 맨손 격투를 배워야 했다. 오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했고, 고통을 참는 법을 길러야 했다. 생각을 더할수록 자신이 없어지는 것은 카시야 쪽이었다.
게다가 또 하나의 골치아픈 문제는, 만약에 누군가가 '그 암살자 교육법은 누구한테 배운거냐?'고 물어봤을 때 대답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전생에서 배웠는데요.'라고 할 수는 없잖은가.
모두가 해산하고 난 공터에서 카시야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민을 이어나갔다.
============================ 작품 후기 ============================
날씨도 더운데, 퇴근길에 시원한 사이다 한 잔씩 하시라고 한 편 더 올립니다.
밤 12시 7분에는 토요일 연재분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