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1 의심(3) =========================
다음날 아침, 여전히 불만에 찬 표정으로 모인 스무 명의 병사들은 카시야를 따라 미르바하라 산 속으로 들어갔다. 산길 입구에 서있는 낮은 울타리에 웬 버드나무 가지를 걸어 둔 카시야는, 올라가는 내내 등 뒤에서 투덜대는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한 마디도 타박하지 않았다.
데런 지방의 아다마스 산맥은 자연적으로 제국의 국경을 이루고 있었다. 북쪽의 나라들보다 따뜻하다고는 하지만 아다마스 산맥의 높은 산들에는 1년 열두 달 녹지 않는 만년설이 쌓여 있었고, 남쪽에서 지내던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추웠다. 하지만 지금은 여름이라 산맥의 아래쪽 지역에는 숲이 푸르게 우거져 있었고, 비교적 낮은 산인 미르바하라 산은 사람들이 오르내리기 좋게 산길도 만들어져 있었다.
카시야는 자신이 수련을 하는 공터로 그들을 데려갔다. 사실 이 곳도 풀숲과 잡목이 우거져 있던 곳이었지만 카시야가 수련을 하며 죄다 정리를 해 둔 상태였다. 수풀을 쳐낸 지 얼마 안 된 터라 아직 땅바닥이 축축했고, 두께가 장정의 한 아름을 넘는 나무들이 공터를 빙 둘러 서 있어 마치 그들을 구경하는 구경꾼 같아 보였다.
카시야는 앞으로 걸어 나가 드디어 그들을 뒤돌아보았다.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너희들이 내뱉었던 불만 사항들은 잘 들었다. 그 중 주된 것에 대해서만 답변을 하지. 첫째, 너희가 왜 훈련을 해야 하느냐는 것인데, 너희는 지금 한꺼번에 덤벼도 날 이길 수 없는 수준이다. 이 상태로 전장에 뛰어드는 건 불나방이 모닥불에 뛰어드는 거나 마찬가지지. 조금이라도 살 확률을 높이려면 훈련을 하는 수밖에. 둘째, 계집의 명령을 따르기 싫다는 것 말인데,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불만을 씨부렁거릴 시간에 단련을 해서 나를 이겨라. 그럼 기쁜 마음으로 이 자리를 넘겨줄 테니."
그녀의 말에 스무 명의 눈빛이 동시에 흉흉해졌다.
"우리가 전부 덤벼도 너 하나를 못 이긴다고? 지금 전하의 총애를 좀 받고 있다고 기세가 등등하신 모양인데, 방금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아니, 그 이전에 저를 이기면 분대장 자리를 주겠다잖아. 그럼 지금 이겨서 받으면 되겠네."
몇몇의 분에 찬 선동에 분대원들 전체가 웅성거렸다.
'하아. 역시, 사내들을 잡으려면 한 번은 조져놔야겠지.'
남자들은 늑대무리와 같다. 우두머리가 되고 싶으면 힘의 우위를 보여줘야 했다. 제대로 먹힌다면 그들은 충성을 보여줄 것이다. 카시야는 지겹다는 표정으로 그들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맨 앞에 서있던 이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럼 쨍알거리지 말고, 덤벼."
카시야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스무 명 모두가 잠깐 멈칫하다가 곧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카시야를 향해 되는 대로 팔 다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카시야의 눈에는 그 모양새가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엉성했다. 어제 오후 그녀를 린치하려던 변경 귀족 연합의 기사들보다도 훨씬 떨어지는 실력들이었다.
'하아, 이것들을 도대체 언제 가르쳐서 언제 실전에 투입하나.'
스무 명이 한꺼번에 덤비라고는 했지만 사실 한 사람에게 덤벼들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두세 명이 카시야에게 달라붙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때리거나 카시야의 돌덩이 같은 반격에 나가떨어졌다. 바닥을 휘도는 그녀의 다리에 걸려 넘어진 병사들 위로 다시 그녀의 주먹이나 발차기에 맞은 병사들이 엎어졌다. 사실 카시야는 전력을 다하지도 않았다. 아직 실전 경험이 전무할 정도로 없는 그들은 자신의 급소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잘못 쳐서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카시야에게 맞고 나가떨어지는 이들 중에는 자신이 방금 손으로 맞은 건지, 발로 맞은 건지 구분하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카시야는 그만큼 빨랐고, 그들은 그만큼 둔했다.
열두어 명을 패대기쳤을 때쯤, 나머지는 주춤거리며 더 이상 덤비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았다.
"행동이 앞서는 멍청이들보다 더 나쁜 건, 그 뒤에 서있는 겁쟁이들이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그들에게 달려들어 훨씬 더 매서운 폭력을 휘둘렀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들 모두 역시 공터 바닥에 엎드려 켁켁댔다.
카시야는 다시 공터 맨 앞의 바위 위에 앉아 그들이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렸다. 지루함에 지친 카시야가 하품을 하게 될 즈음해서 모두 비척비척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별 말이 없었고, 그저 카시야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뼈저리게 깨달았으리라 믿는다. 방금 너희들 싸우는 꼬라지를 보고 알게 된 건데, 너희들은 내가 걱정하던 것보다 더 형편없었거든. 우리한테는 시간이 없다. 앞으로, ‘적당히’란 없을 테니 희망 따위 버리도록."
그녀의 말에 침이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듯 했다.
"앞으로 매일 반복하게 될 너희의 일정을 알려주겠다. 우선 매일 아침 7시부터 8시까지는 진영 내 수련장에서 맨손체조를 한다. 8시에 아침식사 후 휴식을 취한 뒤, 10시까지 이 공터에 모이도록. 여기서 12시까지는 다시 기초체력을 기르는 시간을 갖는다. 12시에 병영에 내려가 점심식사를 하고 2시까지 다시 여기로 모여라. 그리고 저녁 7시까지 체술을 연마한다. 나머지 시간은 자유야. 그 자유 시간에 스스로 더 연마하는 자가 그나마 쓸모 있는 놈이 될 확률이 높다. 알아서들 해."
하루에 8시간을 훈련하겠다는 말에 모두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사실 카시야로서는 초심자인 그들을 배려한 시간 배정이었는데 기존 부대에서는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훈련 시간이라는 게 없다보니, 게으른 일과에 익숙해진 이들로서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카시야는 자신이 메고 온 작은 가방을 열어 모래시계와 호각을 꺼냈다.
"자, 지금이 10시쯤 된 것 같으니, 이제부터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기본 체력 훈련부터 시작하겠다. 이 모래시계는 20분짜리다. 이 모래시계가 다 없어질 때 호각을 불겠다. 그때까지 이 산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지 못한 놈들은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산을 내려가면 아까 올라오던 입구에 내가 걸어둔 버드나무 가지가 있으니, 산길 입구까지 내려갔다는 증거로 그 가지의 이파리를 한 장씩 떼어오도록. 대신 떼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둘 다 나한테 죽는다. 시작."
방금 얻어터져 아직 정신도 차리지 못한 병사들로서는 그녀가 도대체 뭐라는지 제대로 이해도 못했는데 카시야는 가차 없이 호각을 불며 모래시계를 뒤집어엎었다. 그걸 보고도 주춤거리는 병사들을 향해 카시야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뭐 해! 뛰지 않고!"
그 소리에 그제야 다들 허둥지둥 달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달려 나가 텅 빈 공터에서, 카시야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얘기 들으셨습니까? 이틀 전부터 카시야가 조무래기들 데리고 훈련을 시작했다더군요."
지크가 타셀에게 재미있다는 듯 이야기를 전했다. 타셀 역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크를 쳐다봤다.
"암살자를 키우기 위한 훈련은 어떤 식으로 하는지 궁금하군."
그 얘기에 대한 답변은 곁에 있던 미하일이 고자질하듯 고해 바쳤다.
"일단 그 스무 명이 단체로 카시야에게 덤벼들었다가 죄다 얻어터졌고요, 그렇게 군기를 잡은 다음에는 산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걸 두 시간을 시켰답니다. 낙오하는 놈들은 가차 없이 추가 훈련을 받았대고요. 점심식사 후에는 체술 훈련이라는 걸 했다는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훈련이었답니다. 다리 찢기를 연습시키질 않나, 몸을 요상하게 꼬는 자세를 연습시키질 않나, 거기다 뻣뻣하게 서서 주먹 내지르는 것과 발차기 연습만 세 시간을 했대요. 저녁시간에 두 발로 걷는 놈이 없고, 밥 먹는 손을 안 떠는 놈이 없었답니다. 진짜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 훈련 한 번 받아보고 싶다니까요."
낄낄대는 미하일의 얼굴을 보며 타셀도 빙그레 미소 지었다.
"…다들 궁금하면서도 입 다물고 있는 게 있지? 카시야 경이 어디서 그런 훈련을 배웠을까 하는 것."
지크와 미하일은 정곡을 찌른 타셀의 말에 서로 눈치만 보았다.
"난 일단 카시야 경의 정체 같은 것은 묻어두기로 했다. 지금은 그녀가 누구고, 어디서 그런 것을 배웠느냐가 중요한 게 아냐. 그녀가 내 사람이라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아직 그녀는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물론 뛰어나다는 건 저도 알겠지만, 실전에서 얼마만큼 역할을 해낼지는 미지수라고 봅니다."
지크는 신중한 입장을 고수했다.
"네 말도 일리 있지. 하지만 어차피 조만간 그녀를 적진에 침투시켜야 한다. 그때가 되면 알 수 있겠지."
"분대원들을 훈련시켜서 제대로 써먹으려면 앞으로 꽤나 시간이 걸릴 텐데, 그 사이에 카시야를 내보내시려고요?"
"최대한 길게 시간을 주고는 싶지만, 상대가 언제 치고 오느냐가 문제겠지. 우리가 키렐에서 이쪽으로 떠나온 지도 벌써 2주가 됐지 않느냐. 분명 우리가 아직 정비되지 않은 틈을 노려 공격하려고 할 테니, 남은 시간이 길지가 않다."
타셀의 말에 쌍둥이 기사도 말이 없어졌다.
서둘러 연합 군대를 재정비했지만, 새롭게 개편된 조직에 병사들과 수장들이 적응하고 합을 맞추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황제나 케일런이 그 틈을 기다려줄 리가 없었다. 타셀로서는 최대한 서두르며 상대편끼리의 불화를 바랄 수 밖에 없었다.
타셀에게 운 좋게 생긴 패가 바로 카시야였다. 물론 황제나 케일런 쪽에도 암살자는 있겠지만, 타셀에게는 그동안 한 명도 없었다. 애초에 황제가 타셀에게 군대를 내어줄 때 암살자들은 쏙 빼고 내주었던 탓도 컸고, 암살자라는 게 원래 오랜 시간을 들여 교육해야 했기 때문에 새로 키우는 것도 사실상 어려웠던 것이다. 그랬는데 갑자기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여기사가 1급 암살자의 기운을 풀풀 뿜어내니. 신이 그를 위해 내려줬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여성에 대한 기사도가 어릴 적부터 몸에 배도록 교육받았던 황자의 입장에서야 여성인 그녀를 적진에 침투시키는 게 껄끄러웠지만, 개인적으로 얘기를 나눠본 카시야는 그 어떤 남자 기사보다 듬직했다. 그녀는 죽음에 두려움이 없었고, 살인에 무심했으며, 비범할 정도로 영리했고, 웬만한 남자들보다 훨씬 강한 무력을 지녔다. 타셀은 카시야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녀를 보내기 전 그녀 휘하에서 그래도 쓸만한 병사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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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작이 드디어 5,000을 돌파했습니다!
제 글을 지켜보시는 분이 5,000명이나 있다는 사실에 살짝 긴장이 되지만
최선을 다해 써나가겠습니다.
늘 코멘트로 응원해주시고 추천 꾹꾹 해주시는 여러분들 덕분에 힘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rlaskrud님 >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