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2 의심(4) =========================
카시야가 맡은 분대원들은 다른 부대원들의 동정을 듬뿍 받았다. 자신이 저기로 차출되지 않은 것을 하늘에 감사하는 자 역시 많았다. 그만큼 하루의 훈련을 마치고 저녁 식사시간에 나타난 그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스무 명 중에 멀쩡해 보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땀에 흠뻑 절어 번들거리는 피부와 바싹 쥐어짜내진 듯 홀쭉해진 뺨이며 형형해져 안광이 흐르는 것 같은 눈매며 덜덜 떨리는 팔 다리의 모습이, 마치 악귀에게 홀린 이들 같았다. 하루 종일 고강도의 훈련을 받다보니 이들의 식사량도 덩달아 늘어났다. 하지만 그것을 탓하는 조리사는 없었다. 오히려 먹고 힘내라며 고기 몇 점씩이라도 더 얹어주곤 했다.
"니미럴. 적군보다도 저 년 목을 딸 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
"저건 사람이 아냐. 인간이라면 어떻게 여자가 남자 스무 명을 이길 수 있냐고? 혹시… 마녀 아냐?"
"악마가 분명해. 악마야. 어떻게 도망가는 방법 없을까?"
카시야의 분대원들을 끼리끼리 모여 울분을 토하거나 도주 방법을 논의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면 카시야의 서슬 퍼런 눈빛이 생각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또다시 훈련 장소에 모이게 되는 것이다. 카시야에게 너무 과한 훈련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하려 해도, 그들을 일일이 상대하며 대련을 해주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한 시도 쉬지 않고 몸을 굴리는 그녀를 보면, 차마 남자 자존심에 '내 체력이 네 체력을 못 따라가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인정하기 싫어했지만, 그 괴상한 훈련을 받고 확실히 비리비리하던 그들의 육체가 점점 이상적인 형태로 잡혀갔다. 강가에서 몸을 씻고 있으려면 주변의 다른 부대원들이 다가와 어느새 자리 잡은 그들의 복근을 부러운 듯 칭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엄청난 전투를 치르고 온 양, 그들의 하루 훈련에 대한 허세를 잔뜩 부리고 나면 다들 "와, 나는 절대 못하겠다."느니, "너희는 진짜 대단하다."느니 하는 소리들을 내질렀는데, 그 순간의 으쓱한 기분이 그 다음날 못 이긴 척 지옥에 발을 들이게 만들었다.
"짜증은 나는데, 확실히 예전보다는 내가 강해졌다는 느낌이 나요. 나, 예전엔 이 정도 나뭇가지를 부러뜨리지 못했거든. 사내자식이 힘도 못 쓴다고 타박 받았었는데, 지금은 이 정도는 우스워요."
"쩝. 난 어제 난생 처음으로 검술 대련에서 이겼어. 그것도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고향 친구놈 상대로. 그 놈도 놀라더라. 근데 신기하게, 예전에는 안 보이던 검이, 지금은 너무 훤히 보이는 거야. 그놈이 아무리 빨리 휘둘러도 마녀보다는 한참 느리거든."
"아, 훈련 효과 있다는 소리 좀 하지 마! 짜증나니까!"
보통 이런 식으로 대화가 마무리되곤 했다.
그 분대에서 가장 고생하고 있는 사람인 카시야는, 저녁 시간이 될 때마다 그들보다도 더한 피로감을 느꼈다. 육체적인 피로가 아니었다. -그 정도의 훈련이야 혼자서도 늘 하고 있던 것이었으니까. 전쟁은 다가오고 있는데 쓸 만해진 놈이 없다는 조급함과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물론 단기간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어린 시절부터 지독하게 훈련 받았던 것이었으니, 단 며칠 만에 암살자를 키워내라는 것 자체가 무리한 요구였다. 다만, 그녀를 도울 수 있기만 해도, 다른 병사들보다 조금만 더 암살에 특화되기만 해도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게도 스무 명 중 세 명이 눈에 띌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쓸 만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희망을 걸어볼 만은 했다.
'어디 이름을 볼까. 마커스, 레오, 스윈델? 하아…. 하지만 이놈들이 어디까지 성장해줄지, 그리고 내 명령을 착실히 수행해줄지가 문제지….'
뼛속 깊은 남성 우월주의가 또다시 군인으로서 골치 아팠던 과거의 기억을 불러왔다. 어딜 가든 이런 장벽에 부딪혔다. 미군은 여군도 꽤 많았고, 여성 장교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막상 병사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어디서나 여성인 카시야를 얕보는 눈빛이 존재했다. 늘 그들을 누르기 위해 초반 힘의 행사가 반드시 필요했고, 그게 반복될수록 점점 짜증이 났다. 나중에는 살의를 참는 게 정말 힘들어질 정도로 말이다.
지금 이 세계가 조금 나은 것은, 사람들이 참 순수하다는 것이었다. 귀족들의 그 시커먼 속내야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평민들은 안타까울 정도로 순수했다. 그들에게는 동물로서의 기본적인 본능과 그 본능에 가까운 '가족애'와 '동료애'가 전부였다. 그것은 어쩌면 군대가 유지되는 힘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가족애와 동료애가 강할수록, 그것을 짓밟은 자에 대한 복수심 또한 불타올랐으니까. 그들은 구시렁대면서도 착실히 카시야의 명에 따라 훈련을 수행했다. 초반에 군기를 잡았던 게 제대로 먹혀들어갔는지, 농땡이를 피울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결국 그들에게 이득이라는 것을 깨달아주길 바랐다. 조금이라도 강해져야, 조금이라도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니까.
다음날 훈련장에서는 드디어 실전용 무기를 가르치기로 했다.
무기를 휘두르기에는 분대원들의 상태가 많이 미숙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점점 많아지는 전서구의 숫자를 보면, 뭔가가 임박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좌로부터 한 명 씩 나와서 단검을 받아가라. 다른 무기는 못해도, 단검이라도 몸에 익힐 수 있도록 노력하길 바란다."
병사들은 지급받은 단검을 신기한 듯 앞뒤로 뜯어보았다.
"지금 지급받은 단검 역시 제국민들의 귀중한 세금으로 마련되었다는 사실을 늘 상기하고 소중히 다루도록. 그 작은 검이 너희들의 목숨을 살려줄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카시야는 평소보다 간격을 두 배 이상 넓게 벌리게 하고 단검의 기본 사용법을 따라하도록 연습시켰다. 조금 지나니 역시나 제 칼에 제 몸을 베이는 놈들이 나타났다. 연고와 붕대를 가지고 온 자신의 예견이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는 게 슬프다면 슬펐다.
기본 사용법을 익힌 뒤에는 각자의 주변에 있는 나무기둥을 상대로 기습 공격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다들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열심이긴 했으나, 반응속도가 느려도 너무 느렸다.
"늘 상대가 된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라. 지금 너희들이 달려드는 시간이면 상대방은 이미 너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썰린 고기가 되고 싶은 거냐! 더 빨리!"
카시야의 입에서 계속 되는 '더 빨리'라는 말이 거의 노이로제처럼 병사들의 귓가를 왱왱 맴돌았다. 한 시간 정도 연습을 한 뒤에는 다들 처음의 몇 배로 더 느려져 있었다.
"자. 이제 너희들의 다리 근육이 얼마나 연약한지 알겠나? 근육이 모든 힘을 뿜어내는 근원이다. 그런데 너희의 근육은 이 한 시간의 움직임조차 소화할 수 없는 상태지. 그런 주제에 지금껏 정해진 훈련 외에 자발적인 훈련을 더 한 놈이 한 명이라도 있었나? 아직도 자신에 대해 근거 없이 거만하다는 증거다!"
입에서 침까지 질질 흘리며 헥헥대고 있는 병사들 입장에서야 정말 분하고 억울한 말이었다. 하루 8시간 훈련도 미치고 팔짝 뛰겠는데 어디 추가로 더 훈련을 할 힘이 남는단 말인가. 하지만 그들에게는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욕을 씨부렁대면서도 그녀에게 반항하지도 못했다.
훈련이 끝나고 저녁식사를 하러 산을 내려가며 대부분은 언제나와 같이 카시야를 씹어댔지만, 몇몇의 눈빛은 조금 달라져있었다. 분함이 극에 다다르자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하는 마음이 든 몇 명이었다. 죽을 만큼 힘들게 훈련해왔다. 살면서 이토록 열심히 살아본 적이 없을 만큼 온 힘을 다했다. 그런데도 훈련 말미에 카시야가 보여줬던 시범을 떠올리면, 자신은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게 너무도 분명해서 화가 났다. 여자의 몸이 더 가볍다는 이점을 염두에 두더라도, 그 물 흐르듯 유연한 자세, 번개 같은 속도, 나무껍질이 깊게 패일 정도의 힘, 그 모든 것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졌다. 자신이 카시야의 그 모습 그대로를 따라할 수 있게 된다면 너무나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식사 후에 어둑어둑한 막사 뒤편의 조그만 공터에서, 몇 명의 병사들이 훈련을 이어나가는 것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1주 후, 황제가 타셀을 최대 반역자로 지정하고 타셀을 축출하겠다는 칙령을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은 곧 황제와 케일런 양측의 협상이 타결되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결전의 순간을 기다리며 타셀의 군사는 물론 케일런의 군사도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황제의 지원을 등에 업은 케일런 측의 화력이 얼마나 될지 현재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자 드디어 타셀이 카시야를 불렀다.
"카시야 경. 소문을 들어 알고 있겠지만, 이제 곧 전쟁이 벌어질 거다. 사실, 자네에게 좀 더 시간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게 한계인 듯하네. 경. 자네에게 임무를 내리겠네."
그의 앞에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카시야의 표정은 무슨 말에도 미동조차 없었다.
"케일런 진영에 침투해서 그들의 협상 내용이나 황실에 대한 내용을 최대한 얻어다주게. 주요 인물에 대한 암살도 부탁하고 싶지만, 아마 그쪽도 지금쯤 경계가 몇 배로 더 강화됐을 테니 무리는 하지 말게. 가장 중요한 건 정보야."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으니, 현재 적군에서 가장 골치 아픈 자가 누구입니까?"
"케일런 진영에서는 케일런 본인을 뺀다면 알리스타스 공작, 헤리티스 백작, 루벤 백작, 마법사 에르논, 기사인 루크 페레이아, 크리스탄 히멜, 자야드 밀런 정도일까. 하지만 모두 만만치 않은 상대들이야. 특히 마법사 에르논과 기사 루크 페레이아는 자네가 어떻게 할 수 있을 상대가 아니니 절대 가까이 다가가지도 말게. …아니, 이번에 암살 시도는 아예 하지 말게. 정보만 수집해서 돌아와."
타셀은 겨우 얻은 중요한 병력을 혹시나 허무하게 빼앗길까봐 명령을 수정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녀를 너무 과보호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다. 그녀를 벌써 잃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녀가 휘하의 분대원들을 충분히 훈련시킨 다음에나 암살 임무를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그것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불안한 눈빛의 타셀과는 달리 카시야는 별 생각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새벽에 분대원 한 명을 데리고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암살 임무가 없어졌다고 해도 적진으로 침투하는 작전인데 여전히 그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내비치지 않았다. 카시야가 인사를 마치고 뒤를 돌아 막 막사를 빠져나가려던 순간 타셀이 그녀를 붙잡았다.
"카시야 경. 꼭, 살아 돌아오게.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도 상관없으니까, 꼭…. 알았나?"
카시야로서는 완수하지 못할 임무를 위해 출정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었지만, 타셀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따져들 수는 없었다.
"예.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짝 목례한 카시야는 어둠을 향해 사라져갔다.
============================ 작품 후기 ============================
최근 집에만 틀어박혀 비축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밖에 나가면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더워요;;;;
우리 독자님들은 이 더위에 다들 살아계시죠...?
따이따이류 님 > <진홍의 카르마>는 제 두번째 소설입니다. 전작은 현대로맨스 <물들어가는 시간>인데요, 현재 출간 계약 중이라 습작처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