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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34화 (34/134)

00034 의심(6) =========================

안개숲에서 알 수 없는 대폭발을 겪고 큰 부상을 입었던 마법사 에르논은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일으킨 마력폭발에 왜 자신이 피해를 입었으며, 어떻게 함께 데리고 간 마법사들까지 본 진영으로 공간 이동을 해 올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신의 마법이 무슨 이유에선지 원래 위력보다 더 크게 발현된 것 같았다. 붙잡히지 않고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지만, 알 수 없는 힘과 맞부딪힌 듯한 충격에 에르논은 한 달이 넘게 마법을 쓸 수 없었다. 갑갑한 성 안에 틀어박혀 있던 에르논이 후방 보급 부대 쪽으로 발걸음을 둔 것은 그저 가볍게 산책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알리스타스 공작의 눈과 귀가 어디에나 달려있는 공작성보다는 여러 인간 군상이 뒤섞인 후방 부대 쪽이 구경하기도 재미있고 막힌 숨통도 틀 수 있었다.

에르논은 공격 마법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마법사였지만 대규모 공격 마법일수록 엄청난 마력이 들어 금방 지쳐버린다는 것과 공간 이동은 아직 불안정하다는 게 약점이라 믿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공간 이동이 자유자재로 가능했다. 다만 그는 이 사실을 그다지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처럼 공작의 눈을 피해 산책조차 나올 수 없을 테니까. 하긴, 안개숲에서 공간이동을 했을 때는 마력 폭발의 부작용이니 뭐니 둘러댔지만, 사실 알리스타스 공작은 눈치를 채고 있을지도 모른다. 교활한 작자니까.

어쨌든 에르논은 오랜만에 밟히는 흙길의 따뜻함을 느끼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때 그의 시선에 묘하게 이질적인 두 사람이 걸려들었다. 사실은 둘 중 한 사람이 워낙에 이질적이라서 눈에 띈 것이었지만 말이다.

'뭐지?'

에르논의 시선은 정확히 카시야에게 닿아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힘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안개숲에서 자신이 맞부딪혔던 이상한 충격의 느낌과 굉장히 비슷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 있는 남자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은근히 목을 조르는 마법을 시전해보았다. 마법은 통하는지 둘 다 목을 만지며 마른기침을 했다.

애초에 진리의 탐구가 본성인 마법사는 호기심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족속들이었다. 에르논은 마법을 거두며 그들에게 다가가보기로 했다.

"저기… 기사님들! 죄송하지만, 제가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데, 저를 좀 부축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멀쩡하다가 갑자기 목이 졸린 것처럼 콜록대던 자신들의 상태를 이상하게 느끼고 있던 카시야는, 그들의 뒤에서 들린 남자의 목소리에 숨을 들이켰다. 뒤를 돌아보니 정말 몸이 안 좋아 보이는 사내가 힘겹게 벽에 기대 서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를 살짝 넘었고, 하얀 피부가 매끄러운 남자였는데 예전에 봤던 신성 치료사 아르헨보다야 떨어졌지만 충분히 아름답다고 할 만한 남자였다. 스윈델은 카시야에게 슬쩍 속삭였다.

"아무래도 부대에 보급될 남창 같은데, 안 좋은 병이라도 걸렸나보네요."

하지만 그의 말에도 카시야의 눈에서는 경계의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시, 시간에 맞춰 집합 장소로 가야하는데…. 하아…. 부탁드립니다. 부대 안쪽까지만 좀 부축해주시면 안 될까요?"

스윈델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카시야의 처분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부대 안쪽까지 가자는 말에 카시야가 움직였다.

"그 전에, 부대에는 왜 들어가려고 하는 겁니까?"

"아…. 저기…. 제가, 그… 보급품이랑 비슷한 처지라서…."

말하기 어려워하는 그의 모습은 꽤나 처연한 구석이 있어 사람의 동정심을 자극했다. 그러니 스윈델이 눈치 없는 사람 쳐다보듯 카시야를 타박하는 것이다.

"왜 그런 걸 자꾸 물어요? 민망하게."

하지만 동정심이라는 건 카시야에게 크게 기대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이 남자에게서 기묘한 위험성을 느끼고 있었다.

"정확히 말씀해주셨으면 좋겠군요. 군대를 따라갈 남창이라는 말입니까?"

그 말에 또다시 스윈델이 옆구리를 찔렀다. 물론 카시야의 손에 가로막혔지만.

"아, 예. 뭐, 그렇습니다."

대답하는 남자의 얼굴이 얼핏 수치심으로 물들었다.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시야는 스윈델에게 턱짓으로 그를 부축하게 했다. 스윈델은 '결국 도와줄 거면서 꼭 사람 기분 나쁘게 만들어야 하나?'하는 불만을 주워 삼키며 에르논을 부축했다.

'남창을 약속 장소까지 데리고 간다.'고 말하자 지키고 섰던 이들이 다들 피식 웃으며 비켜주었다. 개중에는 남자를 위 아래로 핥듯이 바라 보는 이도 있었다. 에르논은 자신에게 동정심을 보이는 스윈델 쪽으로 몸을 더 기울였다. 그의 야릇한 눈길에 아직 순진한 청년인 스윈델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 순간 카시야가 에르논의 한쪽 팔을 잡았다.

"교대하지. 내가 부축하겠다."

"에…? 아니, 뭐, 딱히 그럴 필요는…."

"지금 네 꼴이 웃겨서 그런다."

자신의 꼴이 뭐가 어떻다는 구체적인 얘기는 없었지만, 카시야의 지적에 스윈델의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에르논은 미안하다며 다시 카시야에게 기댔다.

"죄송합니다. 여성분에게까지 신세를 지는 꼴이라니…. 면목이 없군요."

에르논 딴에는 자신이 무해하다는 어필을 하기 위해 내뱉은 말이었는데 카시야의 눈빛은 방금 전보다 더 차갑게 에르논의 두 눈을 훑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모습에 에르논의 미소가 아주 살짝 경직되었지만 카시야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스윈델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봐, 어르신은 늦는 걸 싫어하신다. 너 먼저 어르신께 가 봐. 나도 곧 간다고 말씀드리고."

스윈델의 눈이 확 부릅떠졌다. 방금 카시야가 한 말은 미리 얘기되었던 암호였다. '너 먼저 빨리 도망치라.'는 뜻의…. 하지만 그는 곧 놀란 감정을 갈무리했다.

"나 먼저 가 봐도 되겠어요? 안 무거워요?"

"날 뭘로 보는 거냐? 계집보다 가녀린 남창이 뭐가 무겁다고. 이러다 우리가 늦겠어. 얼른 가봐."

"쩝. 그럼 저기, 뭐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는데, 이 봐요, 조심해서 다녀와요. 살아 돌아오고."

스윈델은 카시야가 에르논을 경계하는 줄을 모르고 있는 건지 여전히 안타까운 눈빛을 하고 에르논에게 무사 안녕을 기원한 뒤 저 멀리로 사라졌다.

"약속 장소가 어디라고 했죠?"

카시야는 스윈델이 사라진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심드렁한 어투로 에르논에게 물었다.

"아, 예.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저기, 숲이 우거진 안쪽이요."

카시야는 아까부터 조금씩 정상적으로 걷는 에르논의 움직임을 느끼며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숲의 입구에 가까워졌을 때 카시야가 에르논에게 낮게 속삭였다.

"그런데… 눈썰미가 상당히 좋으시더군요."

"네…? 그게… 무슨…."

"저와 제 동료를 보고 곧바로 기사라고 부른 것도 그렇고, 제가 여자라는 걸 안 것도 그렇고…."

"아…하하하. 그거야, 전쟁터에서 사는 남창이다 보니 그렇죠. 늘 보는 게 기사님들인데다, 남자와 여자는 체취부터 차이가 나니까요."

"남창도 아닌 자가 그러니 신기하다는 거죠."

카시야의 시린 녹색 눈동자가 에르논의 자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마치 영혼이 꿰뚫리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에르논은 순진했던 낯빛을 지우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 역시…. 보통 인간은 아니네요. 그렇죠?"

이미 그들은 숲 안쪽으로 발을 들인 상태였다. 물론 숲 안에는 인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나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는 건, 똑똑하지는 않다는 말일까?"

"글쎄. 그쪽처럼 호기심이 많다고 해두지."

카시야는 이제 거의 그녀의 어깨에 걸쳐졌다 뿐일 에르논의 팔을 쳐냈다. 서로 위협적인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그들은 숲 안쪽을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호젓한 냇가 근처에 다다르자 카시야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자, 나와 따로 할 얘기가 뭐지? 아니, 그 전에. 너, 누구냐?"

카시야의 질문에 에르논은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까만 머리카락이 점점 원래 색인 하얀 색으로 물들었다. 그가 바닥을 향해 뭐라고 주문을 외우며 손짓하자 폭신한 카우치가 놓였다. 숲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공예품이었다. 그는 피곤하다는 듯 그 카우치에 길게 몸을 뻗어 누웠다.

"…들은 적이 있지. 다 새어버린 듯한 백발에, 창백한 피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의 마법사가 있다고. 이름이… 에르논이랬던가?"

그의 마법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무심히 중얼대는 카시야의 말에 에르논은 누운 채로 우아하게 팔을 휘둘러 절하는 척 했다.

"영광이군. 내 이름도 알아주시고. 그래, 전혀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 자여, 그대는 누구지?"

에르논 역시 무심함을 가장했으나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내가 대답해 줄 의무는 없지. 나한테 뭘 말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귀찮게 끌고 왔는지나 얘기해."

카시야의 불친절한 말에 에르논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내 정체를 밝혔으니, 너도 네 정체를 밝히는 게 예의 아닌가?"

"네가 네 정체를 밝힌 게 아니라, 내가 기억해낸 것뿐이잖아. 통성명이나 하자고 여기까지 데려왔나? 달리 할 말 없으면 나도 바쁘니까 이만 가보겠다."

카시야는 정말로 별 미련이 없다는 듯 걸어왔던 길로 다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곧 그녀의 앞에 우거진 가시덤불이 생겨나 길을 막았다.

"보내준다고 한 적 없는데?"

등 뒤에서 조금 골이 난 듯한 에르논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너를 으깨어버릴 수도 있어. 손가락부터 천천히 말야. 그래야 대답을 하겠니?"

웃음기가 사라진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카시야의 등을 훑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저렇게 탄탄하게 단련된 몸을. 여자이면서도 자신의 무게에 흔들리지 않던 일정 간격의 걸음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저 눈을. 저건, 완벽하게 훈련된 무인이라고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한편, 카시야는 그의 장단에 맞춰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마법사 에르논과 기사 루크 페레이아는 반드시 피하라.'던 타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더니, 저가 딱 그 꼴이었다.

"협박도 참 우아하게 하시는군. 뭘 알고 싶은 거냐? 난 대륙을 떠돌아다니는 용병이다. 이름은 원하는 대로 불러. 돈 주는 주인이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게 내 이름이니까. 되었나?"

짜증 섞인 카시야의 미간이 너무나 솔직하게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어서,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에르논은 자신이 정신계열 마법에 젬병인 것이 짜증났다. 가능하다면 저 건방진 입에서 제가 어제 먹은 게 뭐였는지까지 다 불게 만들고 싶은데 말이다.

"대륙을 떠돈 용병이라면, 설마 1황자 전하께도 칼을 들었던 놈이냐?"

"허! 전날까지 모시던 황제에게 반역을 저지른 자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카시야가 비웃자 갑자기 그녀 주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카시야는 본능적으로 몸을 굴려 피했다. 그리고 그녀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바위가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거지 용병 주제에 혓바닥을 건방지게 놀리는구나. 한번만 더 그따위로 나불대면, 더는 용서하지 않겠다."

그는 여전히 카우치에 삐딱하게 누운 채로 장난치듯 거대한 바위 몇 개를 공중에 둥둥 띄웠다. 카시야는 일단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말 그대로 거지 용병이라, 돈 주는 이한테는 충성하지. 그렇게 내가 고까우면, 날 고용해서 돈을 주던가. 그럼 착실하게 충견 노릇을 해드리지."

여전히 건방지지만 마치 유혹하는 듯한 카시야의 말에 에르논이 피식 웃었다. 이 알 수 없는 여자 용병은 꽤나 흥미롭다. 그리고 아닌 척 하지만 자신의 마법에 한 발 물러나 몸을 낮추는 모양새도 썩 만족스러웠다. 곁에 두고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좋아. 전 주인에게는 얼마를 받았지? 그보다 더 쳐줄 테니, 내 개인 호위무사 노릇을 하거라."

카시야는 제가 발을 들인 곳이 악어의 아가리인지, 혹은 잭팟이 터질 노름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여기서 도망치는 것은 때를 봐야할 것 같았다. 도박을 해보기로 했다.

"나는 한 달 단위로 돈을 받는다. 한 달에 3골드씩 받았지만, 우리 대단하신 마법사님께서는 그것보다야 더 쳐주시겠지."

에르논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앞에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그 꼴이 같잖았지만 카시야는 '거지 용병' 노릇에 충실하기로 했다. 머뭇거리는 척하며 주머니를 집어 들어 끌러보니 그 안에는 10골드가 들어있었다. 아직 이 세계의 금전에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일반 평민의 한 달 생활비가 2골드쯤 한다고 들었었기 때문에, 이 돈이 보통 많은 돈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뭐야. 날 뭐에 쓰려고 이렇게 많은 돈을 주는 거요? 자, 이것만 받도록 하지."

카시야는 5골드만 집어내고 나머지는 도로 주머니에 넣은 뒤 에르논에게 던졌다. 하지만 던졌다고 생각했던 주머니는 공중에 그대로 멈췄다.

"돈을 받았으면 이만 공손해져야지? 감히 주인이 내린 걸 거절하다니. 네 말대로 난 '대단하신 마법사님'이라서,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야. 걱정마라. 널 실험체로 쓰지는 않을 테니."

그의 말이 끝나자 주머니는 다시 카시야의 손에 떨어졌다.

============================ 작품 후기 ============================

월요일이네요.

반년동안 잘 쉬다가 출근하려니 출근하기 귀찮아 죽겠습니당.ㅠㅗㅠ

즐거운 월요일이 될 수 있게 노력해 보아요.

다네미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

아참. 진홍의 카르마는 8월 31일까지 일일연재 이벤트 참가중입니다.

되도록 일일연재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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