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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35화 (35/134)

00035 의심(7) =========================

캠프 X에서 받았던 여러가지 암살자 교육 중에 가장 유용하게 써먹는 수업은 바로 '연기'였다. 상대방을 완전히 속일 수 있는 연기를 펼쳐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고,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보니 카시야는 그 어떤 대배우가 와도 지지 않을 정도의 포커페이스를 만들 수 있었다. 평소에는 웃지 않는 그녀가 연기를 하면서는 화사하게 웃을 수 있었다. 물론, 그 표정과 감정을 흉내내기 위해 따라했던 많은 샘플들을 실제로 이해하며 따라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지금도 카시야는 에르논을 감쪽같이 속이고 있었다.

"뭐, 굳이 그러시다면야, 주인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주신 돈은, 나중에 실력이 어떻다느니 하는 핑계로 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많은 돈을 줬다고 멋대로 기간 연장을 해서도 안 되고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렇게 많은 돈을 주고 아까워하지 않을 자신 있냐고 물으면서도 제가 가진 주머니를 내줄 의지는 없어 보이는 태도가 그야말로 '거지 용병'에 어울렸다.

"상관없어. 자, 그럼 주인으로서 첫 명령을 내리지. 내 앞에서 복종의 예를 올려라."

에르논의 눈빛은 나긋나긋한 말투와는 달리 사납게 빛났다. 카시야가 재미있어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에게 건방지게 군 것은 벌하고 싶었다. 방금까지 꼿꼿한 자존심을 세웠던 그녀이니, 복종의 예를 취하는 데 머뭇거릴 거라 생각했지만, 카시야는 에르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닥에 납작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새로운 주인이신 에르논 님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 모습을 본 에르논은 의외로 조금 실망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납작 엎드려 고개를 들라는 그의 명령만을 기다리는 번견의 모습은,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방금까지 살아서 펄떡대는 것 같던 그녀의 기운이 어느새 얌전히 갈무리되어 있다. 이것만 봐도 놀라운 능력을 가진 자임이 틀림없는데, 정말 이렇게 쉽게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었나 의심이 되었다.

"지나치게 태세변환이 빠른데? 고개를 들어라."

카시야는 얌전히 고개를 들어 에르논을 쳐다보았다. 에르논의 차갑게 가라앉은 자색 눈동자가 그녀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하지만 카시야의 눈동자에서 뭔가를 읽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가 떠돌이 용병이라느니 뭐니 했던 말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막 살아온 거지 용병이라기엔, 굉장히 잘 훈련된 태가 났으니까. 하지만 또 번듯한 기사라기에는 어딘지 이질감이 느껴지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아서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만약 카시야가 진실을 말한 것이라면 대규모 정규군에서 꽤 오래 지낸 용병일 테고, 거짓을 말한 것이라면 그녀의 위험도는 수직상승한다. 그러나 에르논은 그녀에게 자꾸 호기심이 생겼다. 자신의 마법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 배짱에 놀랐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위험인물이라고 해봤자 저를 이길 수는 없다는 생각에, 에르논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날 따라다니도록. 귀찮은 벌레 처리는 굳이 내 손을 쓰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해라."

"네. 알겠습니다."

카시야는 어느새 에르논의 앞에서 고분고분한 호위무사가 되어있었다.

"자, 그럼, 이만 돌아가 볼까."

에르논은 카우치에서 일어나더니 카시야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무어라 주문을 외웠다. 눈을 깜빡거리기 전까지는 숲 한가운데였는데 눈을 뜨자 에르논의 방인 게 분명한 곳에 서 있었다. 에르논은 공간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들었는데 헛소문이었던 모양이다.

"하… 하하…. 마법이라는 거, 대단하군요."

카시야는 놀랍다는 얼굴로 에르논과 방 안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단지, 마법을 처음 겪은 사람이라면 그 정도 리액션은 해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보다는 그 물샐 틈 없던 알리스타스 공작성에 이런 식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게 더 놀라웠다.

하지만 부산스러운 척하며 둘러본 방 안은 케일런 진영의 영웅이 머무르는 곳이라기엔 어쩐지 지나치게 소박했다. 창문이 있기는 했지만 햇빛이 드는 방향이 아니라 어두컴컴했고, 침대나 테이블, 의자 등의 가구 역시 평범했다. 방의 한 편에는 온갖 책들이 무질서하게 쌓여있었고, 책상 위에는 무언가가 마구 휘갈겨진 종이들이 어질러져 있었다. 여기서 그의 뭘 어떻게 지키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넌 저기서 머무르도록 해."

에르논이 가리킨 벽 끝에는 다시 작은 방이 이어져 있었다. 방이라고는 하지만 겨우 침대 하나와 작은 테이블 하나가 전부인, 벽장 같은 방이었다. 몸종들이 대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곳 같았다.

"감사합니다. 식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에르논은 먹을 것부터 찾는 모양새만큼은 정말 거지같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매일 시녀가 방으로 갖다 줄 거다. 네 것까지 갖고 오라고 말해둘 테니, 굶을까봐 걱정은 하지 마라."

"감사합니다, 주인님."

카시야는 또다시 굽신거렸다.

에르논은 재미없다는 듯이 내려다보더니 이내 침대로 걸어가서 몸을 뉘였다. 아직 몸이 완전히 나은 게 아니라 그런지, 대단한 마법을 쓴 게 아닌데도 피곤이 몰려왔다. 그는 곧 고른 숨을 내쉬며 잠이 들었다.

카시야는 정말 호위무사처럼 그의 침대 곁에 서서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이상하군. 케일런 진영의 패전을 막은 게 마법사 에르논이라고 들었는데, 이건 왠지… 어디 감금해놓은 것 같은 분위기잖아? 사치품 제재를 한다더니, 성 안 모든 곳이 다 이런 식인건가? 아니면 이 인간이 원래 이런 취향인가? 엄청난 귀빈 대접을 받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야…. 어쨌든 생각지도 못하게 공작성 안으로 들어왔군. 거기다 에르논의 곁이다. 괜찮은 정보를 얻을 수도 있겠어.'

카시야는 에르논을 만난 것을 행운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

"뭐? 카시야 경이 자네만 먼저 돌려보냈다는 말이야?"

"예. 미리 암호로 정한 게 있었습니다. 어떤 남창을 부축해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먼저 도망가라는 암호를 말씀하셔서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만, 분대장님이 그 암호를 헷갈리실 수는 없습니다. 몇 번이나 강조하신 내용이니까요."

혼자 돌아온 스윈델을 보며 타셀은 전신을 뱀같이 기어 다니는 불안감에 가만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보게."

스윈델은 난생 처음 황자의 앞에 섰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사실 그 자신도 도대체 왜 카시야가 그 시점에서 도망가라고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멀리서 누군가 오는 상황을 목격한 건지, 부축하고 있던 남창에게 뭔가 문제가 있었던 건지….

"…그래서 제가 그를 부축하고 가는데, 갑자기 분대장님께서 자신이 부축하겠다고 나서셨습니다. 그러더니 또 갑자기 먼저 도망가라는 그 암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리 언질 받은 대로 아무렇지도 않은척하며 그 자리를 벗어나 최대한 빠른 속도로 돌아온 겁니다."

"그 남창의 생김새가 어떻던가?"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좀 너머까지 길었고, 눈은 보라색이었습니다. 눈동자 색이 정말 특이하다고 생각하면서 봤었기 때문에 정확합니다. 키는 이 정도쯤… 이었고, 마른 편에, 피부가 굉장히 희고 고와서 딱 봐도 남창 같았습니다."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지크가 '보라색 눈'이었다는 말에 신음처럼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에르논!"

타셀이 절망적으로 눈을 감았다.

"예? 에, 에르논… 이라 하시면… 그 대마법사 에르논 말입니까? 하지만 그럴 리 없습니다. 에르논은 샌 것 같은 하얀 머리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리고 마법사라기엔, 너무… 야하게 생겼던데요? 엄청 약해보였고요!"

살짝 얼굴을 붉힌 스윈델이 반박했지만 막사 안의 분위기는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에르논 정도 되면 머리카락 색을 바꾸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다. 하지만 눈동자 색은 바꾸지 않은 모양이야. 카시야가 용케 에르논인 걸 알아챘군."

"그, 그럴 리가요! 머리카락 색을 바꿨다는 놈이 왜 눈동자 색은 안 바꾼답니까? 아, 아니, 그보다,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다른 사람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보라색 눈동자로 변한 다른 마법사라거나요!"

에르논의 악명을 떠올리자 스윈델의 안색이 점차 창백해졌다. 그는 타셀과 지크에게 그 자는 에르논이 아니라고 박박 우겼다. 만약 그가 에르논이라면, 자신이 카시야를 사신에게 넘겨주고 온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보라색 눈동자가 특이하다고 생각했지? 그럴 수밖에. 전 세계적으로도 보라색 눈동자를 갖고 있는 이는 한 손에 꼽으니까. 대마법사들이 바로 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이들이다. 핏속에 엄청난 마력이 흘러야 나타날 수 있는 색이지. 다른 마법사들이 위장을 한다고 해도 눈동자 색만큼은 보라색을 만들 수가 없다."

지크가 한숨처럼 보라색 눈동자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역시 대단하다고나할까…. 하긴, 저 녀석을 두고 카시야가 왔다면, 저 녀석은 보나마나 죽었을 테니까."

미하일이 스윈델을 보며 툭 던진 말에 스윈델이 비틀거렸다. 정말로 자신이 죽음을 목전에 뒀었단 말인가. 전혀 알아챌 수 없었다. 그 남창… 그러니까 마법사 에르논은, 정말이지 너무도 약해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먼저 도망가라고 하면서도 카시야는 너무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전하. 카시야는 살아 돌아올 겁니다. 반드시 올 거예요. 걱정 마십시오. 분명, 다 생각이 있어서 그 놈을 따라간 걸 겁니다."

까불거리는 게 일상인 미하일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낮게 깔렸다. 카시야를 특별하게 아꼈던 그였기에 카시야가 에르논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이 상황이 불안할 게 뻔한데도, 그는 카시야에 대한 단단한 신뢰를 내비쳤다.

"두고 보도록 하죠. 이 깜찍한 괴물이 어디까지 해내는지…."

그의 말에 타셀도 다시 파르라니 타오르는 의지를 담은 눈동자를 들어 케일런 진영 쪽의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 돌아올 거다. 우린… 우리의 싸움을 하자."

전의를 다진 타셀은 스윈델에게 수고했다고 치하한 뒤 돌아가 쉬라고 말했다.

막사를 향하는 스윈델의 걸음이 무거웠다.

'분대장 덕분에 목숨을 건지다니…. 분대장은 미친 거 아냐? 마법사 에르논의 손아귀에 직접 걸어들어 가다니…. 숨 쉬는 것보다 쉽게 사람을 죽이는 악마라던데….'

자신이 이제껏 미워하고 내심 얕보던 여자 분대장에게서 목숨이 구해졌다는 생각에 스윈델은 마음이 불편했다. 심지어 그녀의 마지막 얼굴은 너무나도 평온해보였다. 도대체 그녀는 언제 그 남창이 에르논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순간, 처음부터 그를 경계하던 그녀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왜 부대 안쪽으로 가려는지, 진짜 남창이 맞는지 꼬치꼬치 캐묻던 모습이…. 자신은 아무 생각 없이 '불쌍한 사람이니까 도와줘야겠다.'고만 생각했지, 적진 안에서 만난 사람을 의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금 네 실력 가지고는 살아남는 것도 벅찰 거다.'라던 카시야의 말이 이제야 무겁게 와 닿았다.

분대의 막사에 들어서자 동료들이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었다.

"야, 드디어 돌아왔구나! 마녀 뒤치다꺼리하느라 고생 많았다!"

"에헤이. 또 모르지. 혹시, 마녀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가 돼서 돌아온 거 아냐? 으히히!"

"야. 당연한 말을. 이미 따먹히고도 남았겠지. 그래, 우리 대장님 솜씨는 좋으시던? 크크큭."

남의 속도 모르는 동료들은 일상이 된 음담패설을 던지면서도 그의 생환을 환영했다. 하지만 굳게 다물린 스윈델의 입매는 미소 한 줌 그려내지 않았다. 터덜터덜 걸어 막사 안쪽의 제 모포 위에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그제야 다들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야! 야, 인마! 왜 그래? 어이!"

"야, 진짜 왜 그래? 분대장한테 얻어터졌냐?"

"마녀 때문에 피똥 싸게 고생했나 부네. 애가 넋이 나갔어."

"으이그. 그 미친년이 애 하나 잡았구만."

그 순간 스윈델이 버럭 소리쳤다.

"분대장님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

그러자 이번엔 나머지 동료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스윈델이 말하는 '분대장님'이라는 게 마녀를 지칭하는 게 맞나, 하는 얼굴들이었다.

"분대장님이…. 분대장님이… 나 먼저 도망치게 하고… 마법사 에르논한테 잡혀갔다…."

그 말을 힘겹게 내뱉고 스윈델은 고개를 떨궜다. 나머지 분대원들은 다들 자신이 뭘 들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으며 서로 눈치만 보다 다시 스윈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야…. 분대장이 잡혀갔다니…? 그 말은, 그러니까… 너 혼자 돌아왔다는 말이냐?"

그 말이 마치 '이 비겁한 놈아!'라는 꾸지람을 담은 것 같아 스윈델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 나는… 그놈이 에르논일 줄은 몰랐어. 어떻게 알았겠냐고! 갑자기 먼저 도망치라는 암호를 내뱉길래… 진짜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설마… 지 혼자 죽으러 가는 건 줄은 몰랐다고!"

어지러운 호흡에 뒤섞이던 스윈델의 말 끝에는 물기가 배어있었다.

에르논의 악명은 상상을 초월했다. 소문이라는 게 원래 부풀려지기 마련이긴 하지만, 에르논에 관해서만큼은 소문이 진실인 부분이 많았다. 그가 휘두르는 공격 마법은 타셀 군에 엄청난 피해를 안겨왔다. 카시야만 해도 그 에르논의 마법에 죽다 살아난 사람 아닌가. 만약 카시야가 타셀 측의 사람이라는 것을 들킨다면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늘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마녀 분대장이 분대원 하나를 살리고 제가 대신 지옥에 발을 들였다는 얘기를 듣자 모두가 숙연해졌다.

"생각해보면… 마녀 덕분에 우리가 강해지긴 했지."

"…쩝. 단기간에 우릴 단련시키느라 그랬던 거지, 사실… 제일 고생한 건 분대장님이긴 해."

"에이, 씨…. 기분 더럽네."

훌쩍이는 스윈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들 우울한 기분으로 제자리에 돌아갔다. 하지만 그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카시야를 위한 복수의 칼날이 날카롭게 갈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 날씨, 대한민국 맞나요?

아무리 봐도 재작년 갔던 괌하고 다를 게 없는데...? 헥헥....

일일연재 이벤트 기간이 8월 23일까지더라고요?

그래도 어쨌든 제 목표는 8월말까지 일일연재인걸로...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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