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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36화 (36/134)

00036 속박(1) =========================

카시야가 에르논의 곁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게 된지도 며칠이 흘렀다. 에르논은 자신의 호위를 하라고 카시야를 산 것이었지만, 사실 하루 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인사를 누가 공격한다는 건지 의아했다. 호위무사라기보다는 방의 장식품에 더 가까운 임무를 수행하면서, 카시야는 몇 가지 정보를 얻게 되었다.

첫째, 알리스타스 공작성에 케일런이 머무르고 있다는 것, 둘째, 주요 결정은 케일런이 내리지만 그 외 잡다한 업무는 알리스타스 공작이 보고 있다는 것, 셋째, 황제를 알현하고 돌아가던 대신관이 살해당했는데 타셀측의 짓이라고 발표됐다는 것, 그리고 넷째, 에르논과 알리스타스 공작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

첫 번째와 두 번째 정보는 대충 짐작이 가능한 것이었지만, 세 번째와 네 번째 정보는 정말 의외였다.

대신관의 살해 소식도 소식이지만, 카시야로서는 에르논과 알리스타스 공작과의 관계가 더 흥미로웠다. 처음부터 묘하게 허름한 방이라고는 느꼈지만, 전쟁의 일등공신이라 해도 좋을 에르논을 방문하는 자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의 방에 들르는 인물은 식사를 가져오는 하녀와 목욕물을 준비하는 하녀 둘 뿐이었다. 그리고 에르논이 카시야에게 직접적으로 '난 공작이 싫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공작과 관련한 얘기를 입에 올릴 때마다 눈빛이 형형해지는 것을 보면, 아무리 둔하다고 해도 알아챌 수밖에 없는 명확한 증오가 느껴졌다.

케일런 진영 안쪽에서 뭔가 미묘한 관계의 어긋남이 존재한다는 건 타셀에게는 좋은 소식이다.

카시야는 아침식사를 거르는 에르논을 보며 '거지 용병'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그가 남긴 식사를 먹어도 되겠느냐고 물었고, 그런 카시야를 보는 에르논의 눈빛은… 조금 이상했다.

"참 신기한 일이지? 넌 분명 거지에다 돼지를 섞어놓은 것 같이 천한데, 왠지 기분 나쁘지는 않아. 분명 더럽게 느껴져야 하는데…."

"사내자식들보다야 제가 좀 깨끗하게 씻기는 하죠."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 그런데 너, 날 따라온 뒤로 한 번도 안 씻었잖아."

"안 그래도 슬슬 씻어야겠다 싶었습니다. 한 달에 못해도 두세 번은 씻거든요. 제가 좀, 깔끔한 편이라서요."

그러면서 에르논의 몫이었던 빵을 우걱우걱 씹는 카시야를 보며 에르논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 지금 당장 씻어. 어쩐지 어디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 했더니…! 네가 그러고도 여자냐!"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립니다, 주인님. 일단 이거 마저 먹고요. 그리고 용병이 남자, 여자 따져서 뭘 합니까? 저를 안기라도 하시게요? 그럼 추가금액이 드는데…."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카시야를 바라보던 에르논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서라.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구나."

그런 에르논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인 카시야는 마지막 남은 빵조각을 갖고 스프 그릇의 바닥을 싹싹 닦아 낼름 집어먹었다.

"저는 어디서 씻으면 됩니까? 주인님께서 씻으라니 씻어드려야죠."

마치 제 종에게 씻어달라고 부탁한 꼴이 되어버린 에르논은, 그러나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을 뿐, 그녀의 태도를 탓하지 않았다. 며칠 사이에 그 역시 카시야의 태도에 익숙해진 것이었다. 그는 설렁줄을 잡아당겨 하녀를 부른 뒤 자신이 쓰는 욕실에 물을 받아놓으라고 명했다. 보통 귀족이나 지배층은 절대 자신의 욕실에서 제 종이 씻게 허락할 리가 없다. 카시야는 의아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에르논은 일반 귀족과는 다른 분위기였기 때문에 '저 사람은 혹시 평민 출신이 아닐까?'하는 가정을 해봤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후, 카시야는 하녀의 안내로 오랜만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실에 발을 들였다. 하녀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목욕 시중을 들려고 했지만, 카시야는 누군가의 시중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 친절이 굉장히 껄끄러웠다. 결국 자신은 귀족이 아니니 시중을 들 필요가 없다며 하녀를 욕실 밖으로 내보내고, 천천히 옷을 벗어 따끈한 욕조에 몸을 담갔다. 하녀가 두고 간 비누와 해면으로 몸을 씻고 머리를 감으니 꽤 기분이 좋았다.

사실 카시야는 씻는 것을 좋아했다. 아니, 좋아한다기 보다는 일종의 강박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죽인 뒤에는 제대로 된 샤워나 목욕을 하지 않으면 제 몸 어딘가에 타인의 피가 묻어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몸을 다 씻어낸 카시야는 나무통 욕조의 한 쪽에 머리를 기대고 반쯤 멍한 정신으로 수증기 가득한 허공을 바라보았다.

'하아…. 이러고 있으니 진짜 웃기네. 나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이 세상에서 눈을 뜨니 타셀의 신하였고, 다른 군주들보다는 그가 나았기 때문에 그를 따르고는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장 최근 하게 된 생각은 '전쟁이 싫다면 이 제국을 벗어나 다른 나라로 가서 살면 되는 거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인구 몇 없는 산악 지방에서 양이나 키우며 조용히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평화로운 나라로 가서 평범하게 살다가 남들처럼 가족을 꾸려보는 것도 신선한 체험이 될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카시야에게는 그런 것도 다 의미가 없었다.

수증기 때문에 천정에 매달렸던 물방울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이따금 욕조에 떨어져 '퐁당'하는 물소리를 만들어냈다. 카시야는 욕조 안에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갔다. 숨을 참고 물에 잠긴 채 제 눈앞의 수면을 바라본다. 성 안에서 전해지던 잡다한 소리들이 이제 거의 들리지도 않는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읍'하는 숨 참는 소리와 심장 고동 소리, 때때로 코와 입에서 빠져나온 기포가 떠오르며 내는 소리가 전부다. 카시야는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생은 전생보다야 확실히 인간적이고 즐겁다고 할 수 있는 삶이었지만, 그녀는 이 삶을 살아가야 할 목표나 꿈, 애정 같은 것이 없었다. 살아도 그만, 안 살아도 그만이라면, 굳이 살아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수면에 인영이 드리웠다.

카시야는 몸을 일으켜 숨을 들이켰다. 욕조 옆에는 에르논이 서 있었다.

"물속에서 꽤 오래 버티네."

"훔쳐보고 계셨습니까?"

"무슨 생각 했어?"

"별 생각 안했습니다."

카시야는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은 욕조에서 빠져나왔다. 흘러내린 물줄기가 바닥을 적셨고, 에르논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녀의 나신을 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거리낌 없이 에르논 곁의 의자에 놓인 수건을 집어 들어 몸을 닦았다. 태연하게 욕탕으로 들어온 자신 때문에 놀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에르논이었는데, 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카시야는 한술 더 뜬다. 결국 얼굴이 붉게 물든 쪽은 에르논이었다.

"넌 여자로서의 수치심도 없나? 아니면, 내가 남자로는 보이지 않는 거야?"

"여자가 용병으로 살다보면, 산전수전 다 겪는 법이라서요."

카시야는 그럴 듯한 답변이라 생각하며 대답했다. 사실 캠프 X에서 훈련을 받을 때, 여성으로서의 수치심이나 정절에 대한 욕구 같은 건 모조리 파괴당했었기 때문에,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는 그녀의 말은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에르논에게는 일말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널 험하게 다루는 주인도 있었나?"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용병을 곱게 다뤄주는 주인이 신기한 거죠. 아, 창녀처럼 다뤘냐는 뜻이었다면, 그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물론, 제가 그걸 즐긴 건 아니었습니다만."

카시야는 머릿속에서 그녀의 여성성을 파괴했던 캠프 X의 교관을 떠올리며 답했다. 전날 잔인하게 처녀성을 잃었는데도 그 다음날 또다시 죽음의 전투에 내몰렸던 여자 아이들 중 일부는 자살을 하고 말았다. 카시야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올 것이 왔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는 것은 스스로가 노예임을 받아들였다는 뜻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든 모럴이 희미해지는 와중에 마지막까지 남은 생존본능이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도록 만들었다. 체지방이 거의 남지 않아 끊긴 월경으로 인해 임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그렇게 무심하게 물기를 닦아낸 몸에 셔츠를 입고 있는데 문득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힘들었겠구나."

이번에야말로 놀란 눈을 한 카시야가 에르논을 쳐다보았다. 에르논의 눈빛에는 동정심과 슬픔이 가득했다. 상대편 병사들을 대규모 공격 마법으로 죽여대는 자가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제게는 자유가 있으니까요. 물론 돈 주는 주인을 위해 일하긴 하지만 그건 계약일 뿐. 저는 제가 원하는 주인을 고를 수 있고, 받은 돈으로 맘껏 떠돌아다닐 수도 있죠. 그런 면에 있어서는… 제가 주인님보다 좀 나은 것 같군요."

카시야는 에르논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은근슬쩍 그를 도발했다. 방금 저를 향한 그의 눈빛에 비치던 감정이, 혹시 '동병상련의 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역시나 그녀의 말에 에르논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카시야가 바지의 단추를 여미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마저 털어낼 때까지도 에르논은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그녀가 이만 나가자는 뜻으로 그의 옆에 서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욕탕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 네 처지가 나보다 낫다."

조그맣게 웅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를, 카시야는 놓치지 않고 새겨들었다.

밖으로 나오니 마침 목욕 시중 하녀가 욕탕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녀는 욕탕에서 함께 나오는 두 사람을 깜짝 놀란 게 분명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다가, 제가 너무 오래 쳐다봤다는 걸 깨달았는지 다시 황급하게 고개를 푹 숙였다. 언뜻 본 그녀의 귓가가 빨갰다.

'에르논의 취향이 특이하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려나…?'

카시야는 남일 보듯 심드렁하게 여기고는, 다시 허름한 에르논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날 하루 종일 에르논은 이상한 태도를 보였다.

평소에도 말이 많거나 번잡스러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온종일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멍하니 바라볼 때가 많았다. 때때로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카시야는 또다시 에르논의 상황을 떠보기 위한 말을 던졌다.

"주인님. 기분이 울적할 때는 가볍게 산책이라도 하시면 훨씬 좋습니다. 방에만 계시지 말고 성 안이라도 걸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 이 상황이라면 어떤 시종이 건네도 어색하지 않을 말이었다. 그리고 에르논은 심하게 방에만 처박혀있는 게 맞았으니까. 여기에 갑자기 오게 된 게 일주일이 다됐지만, 그 날 이후 에르논은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덩달아 카시야까지 방에 감금된 것이나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그래서 카시야는 그가 혹시 이 방에 진짜로 감금된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보았다. 알리스타스 공작에게 모종의 이유로 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말이다.

카시야의 산책 제의에 에르논은 우울한 눈빛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긴…. 네가 많이 답답하겠구나. 늘 바깥을 떠돌아다니던 사람이, 방 안에만 있으려면 답답할 만도 하겠지."

에르논은 무슨 생각인가를 곰곰이 하더니 잠깐 공작을 뵙고 오겠다며 방을 나섰다. 하지만 카시야를 대동하지는 않았다.

============================ 작품 후기 ============================

흐음... 날도 더운데 우리 가볍게 이벤트나 하나 해볼까요?(이벤트라고 하기에 좀 부끄러운 수준입니다만.)

8월 2일 코멘트 갯수에 따라 8월 3일 업로드 편수가 달라집니다!(단 8월 3일분 본편은 밤 12시 7분에 올라가고요, 추가 연참분은 오후 2~3시경에 올라갑니다.)

50개를 넘으면 1편, 70개를 넘으면 2편, 90개를 넘으면 3편을 연참하겠습니다.

중복 코멘은 개인당 2개까지 허용이고요, 의미없는 자음, 모음 등은 자제 부탁드립니다. 숨어계신 독자님들... 우리 인사 나눠보아요~!

이러다 평소만큼도 코멘트 안 달리면 상당히 민망하긴 하겠습니다만, 저도 다른 작가님들처럼 이런 이벤트 해보고 싶었거든요. ㅠㅗㅠ

비축분이 많지 않아서 넉넉하게 풀지 못하는 점 용서해주세요. 일일연재 압박도 있어서...;;;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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