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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37화 (37/134)

00037 속박(2) =========================

에르논은 어두워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심심해진 카시야는 이젠 더 새로울 것도 없는 에르논의 방을 구석구석 살폈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종이 쪼가리들에는 도대체 뭐라고 쓰여있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 이 세계의 말과 글을 자연스럽게 알고 있던 카시야가 읽지 못하는 글이니, 외국어이거나 마법 관련 언어 같았다. 마구잡이로 쌓여있는 책들 역시 카시야가 읽을 수 있는 글자로 되어 있는 것은 몇 권 되지 않았다. 그 중 하나를 꺼내들어 펼쳐보니 제국 내에서 나는 독초와 약초를 기록한 식물도감이었다. 그것이 꽤나 흥미로워서 카시야는 바닥에 주저앉아 촛불 빛에 책장을 한 장씩 넘겼다. 사진이 없는 세계이니만큼 그림들은 더욱 정교했다. 혼동할 수 있는 식물의 차이를 확대해 그려놓았고 각 식물의 특징인 부분에 대해 자세한 주석이 달려있었다. 거기에는 예전에 루나엔이 주었던 약초인 '병풀'의 온전한 모습까지 그려져 있었다.

'아… 그 약초가 원래는 이렇게 생긴 거였군. 엄청 흔하게 생겼네.'

책 위로 얼굴을 가져가 자세히 보는데 곁에서 문득 목소리가 울렸다.

"글을 읽을 줄 아는구나. 약초와 독초는 많이 알수록 좋지."

에르논이 카시야를 기특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이 자는 기척이 전혀 없어.'

보통 사람보다 엄청나게 민감한 카시야도 에르논의 기척을 알아챌 수는 없었다. 그녀가 에르논이 남창이 아니라고 알게 된 것도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그의 첫 등장 때부터였다.

"허락 없이 책을 봐서 죄송합니다. 너무 무료해서…."

"아냐. 괜찮아.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면 읽어도 좋아. 하지만 당분간은 어렵겠다. 공작께 우리 군의 최전선을 방문하고 오겠다고 해놨거든. 내일 출발하자."

갑자기 케일런군의 최전선을 방문한다니,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가늠하느라 카시야는 복잡한 얼굴빛을 띠었다.

"…산책을 하필이면 전쟁터로 가십니까?"

"왜? 그나마 좀 재미있는 곳인데…. 기분도 풀고 페레이아 경도 도울 겸해서 가려고. 개미 같은 놈들을 싹 쓸어버리면, 기분이 좀 나아지겠지. 아, 혹시 다칠까봐 그래? 걱정마라. 너 하나쯤은 내가 충분히 지켜줄 수 있으니까."

카시야는 어쩔 수 없이 그럼 그러자고 대답은 했지만, 자신의 제안 탓에 아군이 에르논의 공격에 당할 것을 생각하니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눈치를 봐서 맞은편의 아군으로 도망친 다음 에르논의 등장을 미리 알릴 수 있다면, 에르논을 몇 번 상대했던 타셀과 지크가 뭔가 방법을 강구할지도 모른다. 카시야는 제발 그럴 수 있기를 바랐다.

"이봐. 자나?"

저녁 식사 후 각자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지 10분이 채 안 되었을 때, 에르논이 갑자기 카시야를 불렀다. 사실 그는 아직 그녀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주인이 부르는 게 제 이름이 된다던 카시야의 말에 그녀에게 붙여줄 이름을 고민하느라 아직도 '이봐', '너' 등으로 부르고 있었다.

"아닙니다. 말씀하십시오."

"…아냐. 그냥 불러봤어."

문자 자체의 의미와는 달리, 마치 무슨 일이시냐고 물어봐달라는 듯한 뉘앙스가 뚝뚝 떨어지는 어투였다. 카시야는 귀찮으니 그냥 잘까 하다가 뭔가 더 캐낼 게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어 한 번 더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냐. 그냥…. 저기…. 네 얘기 좀 해봐. 고향이 어디야?"

오늘은 왠지 감이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다고 느끼며 카시야는 작게 한숨 쉬었다. 보아하니 잠이 오지 않아 수다나 떨자고 부른 것 같았다.

"글쎄요. 어릴 때부터 떠돌아 다녀서 어디가 고향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나 형제와 함께 떠돌아 다닌 건가? 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같이 있었던 남자는 누구였지?"

"어릴 때는 부모가 함께 있었습니다만… 이래저래 다 죽어버렸죠. 그때 그 녀석은 길에서 만난 친구일 뿐입니다. 떠돌이들은 그 때 그 때 방향이 같은 놈들과 어울려 다니거든요. 누군지도 잘 모르지만, 사실 잘 알 필요도 없는 사이죠. 제가 가지 않았으니, 지금쯤 또 다른 동료가 생겼겠네요."

전생과 묘하게 비슷한 흐름 때문에, 전생 기준으로 대답을 해도 얼추 말이 되는 변명이 되었다. 거기다 적당히 거짓말을 섞어주면 훨씬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완성된다.

"그랬구나…. 바깥세상은 어때? 네가 가본 곳 중에 제일 아름다운 곳은 어디냐?"

이번 질문은 조금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가본 곳이라 봤자 황궁이나 카리나 궁, 그 외에는 전쟁터나 변경지역 뿐이니. 하지만 카시야는 이번에도 머리를 잘 굴렸다.

"용병한테 아름다운 곳 따위를 물어보시면 어떡합니까? 사람 죽이는 곳만 떠돌면서 살았는데….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따라 다닐 때에는 분명 아름다운 곳도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거기가 어딘지 잘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아, 딱 한 번 황궁이 있는 근처의… 이름이 뭐더라… 피엔? 피엔인지 티엔인지…. 거기는 사람들이 활기가 넘치고 번화해서 신기하더군요. 길에서 파는 빵이나 과일도 맛있고. 거기 정도가 제일 아름다웠달까요?"

"피엔? 큭. 거기가 아름다웠다고 기억하다니, 너도 참 힘들게 살았구나. 난 피엔이 제일 끔찍한 곳이다. 그 뒷골목에서 태어났지…. 거기서는 배고프다는 기억 밖에 남은 게 없어."

에르논이 피엔의 뒷골목에서 태어났다는 얘기를 들은 카시야는 숨을 들이켰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 귀족이 아닌 것이다. 귀족은커녕 빈민 출신이라는 얘긴가! 피엔의 뒷골목이라고 하니 강렬한 붉은 머리카락의 미녀, 툴라가 떠올랐다.

'혹시 그녀는 에르논에 대해서 아는 게 있을까…? 밤의 지배자니 뭐니 불리는 것 같았으니까.'

툴라의 모습을 떠올리던 카시야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뒷골목에서 태어나셨다면….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빈민 출신이시라는 겁니까?"

"…그 비슷하지. 고귀한 씨가 더러운 밭에 뿌려졌다고 할망구가 노발대발했지만…. 큭큭. 고귀한 씨? 발정난 개새끼가 아랫도리 단속을 못하고 다니는데, 여자가 무슨 죄야?"

자조적인 에르논의 독백에 가까운 얘기에 대충 사정이 파악됐다. 피난 간 카리나 궁에서조차 변태 성욕을 풀고자 밤마다 창녀들을 들이던 황족과 귀족들이었으니, 그 버릇이 옛날이라고 달랐으랴.

어떤 귀족이 창녀를 가지고 놀다 임신을 시켰는데, 그 아이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마법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태어나버렸다면…? 이 세계에서 마법 능력이란 아무나 가질 수도 없었고, 후천적으로 배울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저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것. 그렇기 때문에 누군지 몰라도 그 귀족은 천한 창녀의 품에서 나온 에르논을 데려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데려오고 나서도 그를 얼마나 핍박했을지 상상이 되었다.

"설마 그 발정난 개새끼가… 알리스타스 공작님이신 건…?"

"더 알려고 하지 마라. 너하고 상관도 없는 얘기잖아. 나도 괜히 말이 많았다. 얼른 자."

본인이 말을 꺼냈으면서 먼저 역정을 낸다. 스스로도 너무 많은 얘기를 했다는 경각심이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알리스타스 공작을 '발정난 개새끼'냐고 물었던 카시야에게 불호령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이 되었다.

'이건 언젠가 써먹을 수 있는 정보겠어…. 그리고 역시 툴라를 다시 만나보는 게 좋겠군.'

자신의 감이 잘 안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도로 수정한 뒤, 카시야는 다시 얕은 잠에 빠졌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카시야를 먼저 성 근처의 숲으로 공간이동 시켜준 에르논은, 잠시 후 말 두 마리를 끌고 그녀가 있는 곳에 나타났다. 에르논이 오기전에 얼른 도망갈까 싶었던 카시야는, 최전선의 적진에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바꿨다.

"말을 타고 가면 한 닷새쯤 걸릴 거야. 내가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다는 건 비밀이니까, 너도 입조심해라."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주인님을 처음 따라갔을 때부터 궁금했던 사항입니다만, 혹시 성에서는 주인님께 호위무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까? 마주친 사람이라고는 하녀 둘뿐이라서요."

"응. 원래는 성 안 사람이 되려면 이것저것 확인 작업을 거쳐야 하는데, 귀찮아서."

카시야는 그 확인 작업을 하는 이유가 자신 같은 첩자를 걸러내기 위함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럼 전쟁 지역으로 가시면서 혼자 나오신 겁니까? 다른 병사들을 안 붙여주던가요?"

"하! 그딴 오합지졸들은 없는 게 도와주는 거야. 괜히 거치적거리기만 하고."

"…저는 괜찮으시고요?"

"아. 그래도 내 대신 칼 맞아줄 방패 하나는 데리고 다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너는 그래도 여러 전쟁을 겪었다며? 밭 갈다 잡혀 온 어리바리한 병사보다야 낫겠지."

"어제랑 말씀이 다르십니다. 저 하나쯤은 지켜주시겠다면서요?"

"큭큭큭. 겁먹지 마라. 약속 지키마. 그런데 너, 그러고도 호위무사냐?"

"용병의 전 재산은 이 몸뚱이 하나 밖에 없어서요."

잡담은 그 정도에서 그쳤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달린 그들이 발을 멈춘 곳은 산 하나를 가로지르던 중반쯤이었다. 실개울이 흐르는 곳에 이르자 에르논은 야영을 결정했다. 그들은 지친 말들에게 물을 먹이고 줄을 길게 풀어 근처의 풀을 뜯어먹게 놔두었다. 에르논이 개울물에 세수를 하는 동안, 카시야는 근처에 떨어진 나뭇가지와 마른 낙엽을 모아왔다.

"부싯돌로 쓸 만한 돌을 찾아야겠네요."

"응? 왜?"

"모닥불을 피워야 하니까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르논은 손가락을 휘둘러 나뭇가지와 잎사귀 더미 위에 불을 일으켰다.

"…그거 꽤 편리하군요."

카시야의 말에 에르논이 잘난 척하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점심을 먹었던 마을에서 사온 빵과 육포를 꺼내 모닥불 곁에서 저녁을 먹고 나자 산 속에는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사그라지는 불꽃에 간간이 나뭇가지와 낙엽을 얹어가며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더없이 평화로웠다. 어딘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밤이었다.

카시야는 습관처럼 기감을 넓혀 주변에 위험요소가 없는지 살폈다. 보이지 않는 신경이 바닥에 흡수되어 주변으로 퍼져나가듯 주변을 훑었다. 그들의 주변에는 조그만 산짐승 한 마리 느껴지지 않았다.

"너… 의외로 마나를 꽤 운용하는구나."

"네? 마나요? 그게 뭡니까?"

"어? 그럼 방금 그거… 모르고 하는 거였어?"

"방금 그거라뇨?"

"네가 방금 마나를 약하게 퍼트려서 주변을 감지한 거 말야."

"그거야 그냥… 오감이 좀 예민한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카시야의 말에 에르논이 피식 웃었다.

"오감이 예민한 것 가지고 그렇게 멀리까지 파악이 가능한 줄 알아? 마나를 운용할 줄도 모르면서 그렇게까지 써왔다는 게 더 신기하네. 이리 와 봐. 내가 좀 봐줄 테니까."

카시야는 아까부터 그가 운운하는 '마나'라는 것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법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예상 불가한 세계인데, 마나는 또 뭐란 말인가. 골치가 아파왔다.

그녀는 일어나 에르논의 곁에 가서 앉았다.

"나한테 등을 보이고 앉아. 정좌하고 양 손은 무릎에 놓고 호흡을 편하게 들이 내쉬어."

그가 시키는 대로 늘 하던 명상의 자세를 잡고 앉아 가만히 호흡하고 있으려니 등에 에르논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이윽고 그 손바닥이 앉은 자리에서부터 뭔가가 휘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기분이 좀 이상할거야. 놀라지 말고, 눈을 감은 상태에서 네 몸 안의 마나가 움직이는 걸 느껴봐."

카시야는 그의 말대로 눈을 감고 내부에 집중했다. 에르논의 손바닥에서부터 시작한 기이한 느낌은 점차 상체 전체로 퍼지더니 팔, 다리와 손발 끝에까지 퍼져나갔다. 기체나 액체가 대류 하는 느낌이 나면서 몸 전체를 균등한 상태로 만들어가는 것 같았다. 약간 어질어질하면서도 평소보다 훨씬 깊은 명상에 잠긴 느낌이었다. 이대로 기감을 펼치면 이 산 전체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제 네 몸 안에 느껴지는 마나를, 가슴 한 가운데로 모으려고 해봐. 심장 말고, 말 그대로 가슴 한 가운데로."

에르논의 말이 마치 꿈속에서 들리는 말처럼 웅웅거리는 것 같았다. 카시야는 기체가 제 가슴 한복판으로 모여 한 점에서 수렴되는 상상을 하며 마나를 모으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잘 되지 않았지만, 호흡에도 신경 쓰며 집중하자 꿀렁거리는 듯하던 감각이 손끝에서부터 서서히 사라지며 어떤 힘이 가슴 한 가운데로 응축하는 것이 느껴졌다.

============================ 작품 후기 ============================

와.... 제가 순진했군요.

제가 원래는 코멘 100개가 달리면 3연참이라고 하려다가 '에이, 세자리 수는 무리겠지.' 싶어서 90개로 낮춘 거였거든요.

그리고 더 큰일날뻔 했던건, 애초에는 코멘트 20개당 1편씩 올릴까 했었다는 거죠. 그런데 그건 아무래도 좀 불안해서 3편까지로 제한한 겁니다!(칭찬한다, 과거의 나!)

도대체 이 많은 분들이 다 어디서 나오신 건가요?

특히 맨처음 '게임을 시작할까요?'라던 분의 코멘트를 보고 오싹했던 기분이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군요;;;;

여하튼 덕분에 많은 분들께서 제 글을 봐주고 계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저는 조회수랑 선작수랑 추천수가 자가 증식하는건가 싶었거든요.-_-;

마음 같아서야 10연참이라도 하고 싶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제가 일일연재를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4연참만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원래는 코멘 90개 채워지는게 느릴까봐 연참분은 나중에올린다고 한거였는데 그럴 필요가 없게돼서 그냥 한번에 다 올립니다.

제 글이 여러분들의 즐거운 하루에 쪼오끔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이 기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백비비님, 후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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