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8 속박(3) =========================
"으윽…."
가슴 한가운데로 몰아갈수록 뜨거워지는 마나의 열기 때문에 카시야의 입에서는 작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나를 응축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에르논은 카시야의 등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묘한 눈빛을 했다. 에르논에게 카시야는 애초부터 보통 인간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엄청난 보석의 원석을 주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엔간한 사람들은 에르논의 마법을 보면 겁부터 집어먹고 발발 떨기 바빴다. 하지만 카시야는 겁을 먹기는커녕 돈으로 저를 사라며 건방진 태도를 보였고, 돈을 줬더니 잽싸게 납작 엎드리면서도 비굴하지는 않았다. 매사 심드렁한듯하면서도 기척에 예민했고, 거지와 돼지를 합쳐놓은 것 같으면서도 더럽게 느껴지거나 혐오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때때로 지나치게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방금 손을 대 정체되어있는 마나의 흐름을 풀어주며 느낀 그녀의 등은 꽉 짜인 근육이 느껴지며 강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남자들의 딱딱한 육체와는 전혀 달랐다. 탄력 있고 유연하면서도 단단한…. 이상적인 인간의 육체가 있다면 아마 그녀의 것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밸런스가 잘 맞춰진 몸이었다. 에르논 자신의 허여멀건 하고 비실거리는 몸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육체다.
에르논이 멍하니 카시야를 바라보는 사이, 카시야는 어느새 마나를 갈무리해 양쪽 가슴 사이의 한가운데로 가두는 것에 성공했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솟아있었다. 뜨겁게 느껴지던 열감은 천천히 식어갔다.
"후우우우…."
잔잔한 수면과도 같아진 몸을 느끼며 카시야가 눈을 떴다.
"마나… 라는 것을 가슴 한 가운데로 모으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마나라는 게 뭡니까?"
카시야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에르논이 정신을 차렸다.
"아…. 마나는 네 몸에 흐르고 있는 가장 강력한 기운이다. 생명을 이루는 중요한 근간이 되는 힘이야. 누구나 갖고 있지만 얼마나 갖고 있느냐는 생명의 각 개체마다 달라. 저기 보이는 저 풀에도 마나가 깃들어있지. 아주 소량이지만 저 풀이 살아가는 데는 충분한 마나인거야. 인간의 경우, 마나가 강하면 마법을 쓸 수도 있고, 강한 기사가 될 수도 있지. 반대로 마나가 쇠하면 죽는다. 아, 예전에 어떤 대마법사가 마나를 다 빼앗은 인간들을 병사로 만든 적이 있기는 한데, 그 실험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 마나가 없는 생명은 생명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해."
에르논의 설명을 카시야는 집중해서 들었다. 착실하고 열성적인 학생 같은 카시야의 모습에 에르논은 조금 신이 난 듯, 더 자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너는 마나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써왔던 것 같아. 모르긴 몰라도 수련 같은 걸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마나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말고는 마나 수련의 근본이 달라지는 차이지. 내가 아까 네 등에 손을 대서 한 일은 정체되어 있는 마나에 흐름을 일으킨 정도야. 흐름을 일으키니 네가 마나의 존재를 느낀 거고, 아주 놀랍게도, 너는 본능적으로 마나를 네 의지대로 움직인 거지. 사실, 이 정도의 경지에 오르려면 꽤 오래 수련을 해야 해. 네가 어느 정도 하나 보려고 한 군데로 모아보라고 한 거지만, 솔직히 놀랐다. 몸통 쪽으로만 모아도 대단한 거라고 칭찬해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생글거리는 에르논과는 달리, 카시야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제 가슴팍을 쓸어 보았다.
'동양에서 '기'라고 불렀던 게 마나와 비슷한 건가 보구나. 확실히 마나의 존재를 느끼고 나니, 운용하기 편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야.'
전생에서 얘기 듣던 '기'를 마나와 비슷한 거라고 인식하자 이해가 쉬웠다. 하지만 궁금증은 더 남아있었다.
"방금, 마나의 양이 많으면 마법을 쓸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그럼 저도 마법을 쓸 수 있는 정도입니까?"
"흐음. 마법을 쓰는 것은 마나의 양으로만 결정되는 문제는 아냐. 마나가 많아야 마법을 쓸 수 있지만, 마나가 많다고 무조건 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지. 마법을 쓰려면 선천적으로 타고난 마력이 있어야 해. 간단히 비유를 하자면, 저 모닥불을 봐봐. 땔감이 있어야 불이 붙어서 모닥불이 되지? 저 땔감이 마나다. 하지만 땔감만 있다고 해서 모닥불이 되지는 않지. 불을 일으키는 게 필요하잖아? 그 부싯돌에서 튀겨지는 불꽃이 마력이다. 거기다 뛰어난 마법사가 되려면 온갖 술식과 지식을 습득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하지. 그래서 대마법사가 흔치 않은 거야. 선천적으로 타고나야 하는 데다, 후천적으로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니까."
"그럼…. 주인님만큼 엄청나게 강한 마법사는 도대체 얼마만큼의 마나와 마력이 있는 겁니까?"
카시야가 은근히 에르논을 추켜 세워주자 에르논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꽤 귀여운 구석이 있구나? 아부도 할 줄 알고…. 나야 이 제국 내에서도 손을 꼽을 정도지. 고위 귀족이 창녀의 품에 있는 천한 아이를 데려가야 했을 만큼."
그 얘기에 그의 한스러운 일생이 녹아있는 것 같았다. 하긴, 귀족 사회에서 창녀의 아이를 제 아이라고 인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지저분한 자신의 사생활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인데다 귀족만의 고귀한 피를 더럽히는 짓이라고 여겨질 만한 일이다. 체면과 위세가 전부인 고위 귀족이 망신당할 것을 감수하면서도 그 아이를 데려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한 마나와 마력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아 지금 이렇게 케일런 군대의 구세주가 되었으니, 알리스타스 공작으로서는 제 난잡한 사생활에 감사를 해야 할 정도가 아닌가 싶었다.
"마나라는 것은 수련을 하면 할수록 양이 늘어나. 수련을 더하면 무기에 실어서 더 큰 살상력을 갖출 수도 있고, 인간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도 있지. 넌 앞으로가 기대되는구나."
에르논은 기특하다는 듯 얘기하며 깔아놓은 모포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카시야는 뜻밖에 얻게 된 귀중한 지식과 경험이 신기하고 기뻤다. 캠프 X에서 이것저것 배울 때는 기쁘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지금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될 만큼 즐거웠다. 좀 더 마나 운용을 연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머리가 핑, 하고 돌았다. 비틀거리며 다시 주저앉은 카시야를 보며 에르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실실 웃었다.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마나 수련이나 마나 운용이 그렇게 쉬운 게 아냐. 넌 안 그래도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마나를 움직인 거니까, 지금은 그냥 자. 눈 좀 붙이고 나면 금방 회복될 거다."
여전히 어질어질한 머리에 손을 대고 있던 카시야는 그 말을 듣고 얌전히 모포 위에 드러누웠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졸음이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잠이 들면서도 '처음이라 그런지 마나 운용이라는 게 꽤 피곤한 일이군.'하고 생각한 카시야는, 그녀의 곁에서 몰래 수면 마법의 주문을 외우는 에르논을 의식하지 못했다. 덕분에 그녀로서는 아주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카시야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에르논은 자신도 잠을 청해보았다. 하지만 곁에서 들리는 고른 숨소리는 근처에서 흐르는 개울물 소리나 거의 다 탄 모닥불이 사그라지는 소리에도 덮이지 않고 오히려 점점 또렷이 의식되었다. 에르논은 카시야가 평소에 굉장히 얕은 잠을 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로서 온갖 험한 일을 겪으며 전쟁터를 전전했다니 예민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어서 작은 기척에도 눈을 뜨는 그녀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에르논은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기를 포기하고 일어나 앉았다. 모포를 바닥에 깔았어도 등이 배겼다. 다 스러져가는 모닥불에 땔감을 더 넣고 불을 일으킨 뒤 가만히 쬐고 있던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카시야 쪽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슴과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 이상하게 감동스러웠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편안한 휴식을 선사했다는 생각에 조금 뿌듯하기도 했다.
다시 모닥불을 바라보던 에르논은, 그러나 잠시 후 슬금슬금 기어 카시야의 곁에 가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였다면 그가 움직이는 순간 카시야가 눈을 떴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겪은 마나 운용과 수면 마법 덕분에 그녀는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잠든 상태였다.
'…이상한 여자야.'
늘 우울했던 에르논은 그녀를 데리고 돌아온 후부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죽여대야 풀어질까 말까하던 기분이었는데, 이 무뚝뚝한 여자 용병 하나가 자신을 안정시켰다는 게 신기했다. 살가운 말을 하거나 따뜻하게 위로를 하는 것도 아닌 여자가, 아니, 여자로서의 자각은 있나 싶은 여자가, 그동안 품었던 그 어떤 여자보다 더 그의 마음을 녹였다. 문득 공작가에 잡혀왔던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굶주리던 그의 어미와 그를 찾아온 공작가의 사람은 아이만이라도 배불리 먹여야하지 않겠냐며 다정하게 꼬드겼다. 그의 어미는 굶어죽는 것보다 낫겠지 싶어 그를 공작가에 보냈고, 다정하게 보였던 공작은 그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주문을 외우도록 시켰다. 그러나 그 이후 갑자기 태도를 바꾼 공작가의 사람들은 그에게 지독한 매질을 했다.
"이 괴물 새끼 같으니라고! 천한 놈을 가르치려면 채찍질만한 게 없지! 하필이면 창녀에게서 이런 게 태어나다니."
어릴 때는 왜 맞는지도 모르고 맞았다. 그저 살려달라고, 무조건 복종하겠다고 빌고 또 빌었다. 자신의 힘을 자각하고, 공작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모든 걸 포기하고 공작이 시키는대로 공격 마법만을 연구하고, 그 마법으로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고, 눈 가리고 아웅하듯 영웅 칭호를 받았어도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모두가 저를 여전히 '괴물 새끼'로 바라봤고, 그는 언제나 외롭고 고통스러웠다. 공작성에 갇혀 지내던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를 사람 취급해주던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이 흥미로운 여자는 그를 괴물처럼 보지도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불쌍하게 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영악한 계산을 머릿속으로 굴리며 간드러지는 아첨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를 저와 똑같은 한 사람으로서만 바라봐 주었다. 그것이 드디어 인간으로 인정받았다는 느낌을 주어 더없이 기분이 좋았다.
에르논은 그녀를 놔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 달에 10골드쯤, 아니 100골드라도 줘서 제 곁에 영영 붙어있게 할 작정이었다. 자신의 호위무사도 하게하고, 약초나 독초에 관심이 있는 것 같으니 그런 것도 가르쳐주고, 마나 운용도 가르쳐주고…. 그렇게 살아가도 좋을 것 같았다. 공작도 자신에게 이 정도는 허락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평범한 인간으로 대해주는 사람을 처음 만난 에르논은,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그녀에 대한 강한 소유욕을 느꼈다.
카시야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에르논은 자신이 점점 그녀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의 숨결이 느껴지자 둘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깝다고 깨닫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뒤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조금의 호기심과 조금의 설렘으로, 그는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내리눌렀다. 잠깐이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따뜻하고 말랑한 감촉에 오히려 놀란 에르논은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그의 호흡과는 달리, 카시야는 여전히 평온하고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문득 자신의 행동이 엄청나게 민망해진 에르논은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다가,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그 자리에서 당황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또 우스워져서 그만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한참 큭큭대며 웃던 그는 다시 한 번 잠든 카시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모포를 뒤집어썼다.
'앞으로도 오래 오래 같이 있을 테니, 서두를 필요는 없지.'
자꾸만 피식 피식 새어나오는 미소를 겨우 거둔 그는, 다시 애써 잠을 청했다.
모닥불은 곧 꺼지고 말았지만, 밝은 달이 비추는 어느 숲 속의 개울가에는 발긋한 온기가 떠다녔다.
============================ 작품 후기 ============================
진홍의 카르마 38회만에 처음으로 키스씬도 아니고 뽀뽀씬이 나왔습니다!
뽀뽀를 향한 여정이 길고 길었군요;;
카시야가 깨어있었다면 그깟 입술 박치기 쯤, 쉽게 해줬을텐데... (추가금액은 받았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