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9 속박(4) =========================
"생각보다 놈들의 전열이 정비가 잘 되어있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황제 측에 군사를 더 요청해야 합니다. 아니면 용병을 더 사오던가요."
"이쪽은 아무래도 놈들이 매복하고 있을 확률이 큽니다. 눈에는 띄겠지만 정면돌파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루크 페레이아의 막사 안에서는 회의가 한창이었다. 타셀 쪽이 변경 귀족 연합과 만난 게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들의 전열은 놀랍도록 탄탄하게 짜여 있었다. 그것이 모두가 타셀이 황제에게 등을 돌릴 준비를 오래 전부터 해왔다고 보는 증거였다. 두 번의 전투를 겪으며 맞닥뜨린 미하일은 여전히 무시무시한 위용을 자랑했다. 케일런군의 희망인 루크 페레이아는 미하일을 막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불꽃처럼 붉게 타오르는 미친 짐승을 얼음처럼 차갑게 휘몰아치는 검귀가 막는다. 그들이 맞부딪치는 주변에 다른 병사들은 감히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미하일은 루크가 막는다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문제가 달랐다. 타셀은 아직 전장에 보이지도 않았는데 케일런군은 이미 고전하고 있었다. 반란군과 제국군으로 만나던 당시에는 황제가 암암리에 제국군을 방해했었기 때문에 타셀의 허를 찌를 수 있었지만, 이제 그런 방해가 없어지고 전군의 병력과 작전에 대한 통수권을 타셀이 완벽하게 휘두르는 상황이 되자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으로도 타셀군은 우위를 점했다.
그런 케일런군 진영에 희소식이 날아든 것은 두 번째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방금 알리스타스 공작성에서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에르논 님께서 이쪽으로 오고 계시답니다!"
"오! 마법사가 오면 숨통이 좀 트이겠군."
작은 전력 차도 전투의 승패를 가를 수 있을 만큼 엎치락뒤치락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에르논의 방문을 기꺼워했다. 하지만 루크는 에르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우울한 눈빛을 보면 밥맛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니 에르논을 반갑게 맞아줄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는 했다.
"언제쯤 도착한다던가?"
"사흘 전에 출발했다고 하니, 길어도 이틀 정도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알았다."
루크는 에르논을 병력으로 집어넣은 새로운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안개숲에서 살아 돌아오긴 했으나 한동안 의식을 잃고 마법을 쓰지 못했던 에르논이 현재 얼마나 큰 힘을 쓸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그가 오면 이번 전투는 승리로 끝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
"신기할 정도로 금방 능숙해지는구나. 타고났어."
이틀 만에 검에 마나를 실을 수 있게 된 카시야를 보며 에르논은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봐도 전쟁터에서 용병으로 죽어가기에는 아까운 인재였다. 마나를 실은 검을 휘둘러 쓰러트린 아름드리 나무를 다시 마나의 양을 조절하며 베어가던 카시야는 조금씩 마나를 사용하는 감각을 익혔다.
"검에 마나를 싣는 게 능숙해지면 그 마나를 상대방을 향해 날리는 것도 가능해진다. 보통 검기라고 부르는데, 풍부한 마나와 뛰어난 검술 실력, 강인한 체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일이긴 해. 하지만 너도 가능성이 있어 보이니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도록."
"마나에 대해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여러 가지 가르쳐주마."
에르논은 카시야의 인사에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를 더 강하게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른 마법사들이 제자를 들이는 이유가 이런 감정 때문인가 싶었다.
"이틀 정도만 더 가면 우리 편 진영이 나올 거다. 내가 패를 하나 줄 테니까 전투가 벌어지는 쪽으로는 가지 말고, 근처에서 놀아. 돌아갈 때가 되면 부르겠다."
"밥은 어디서 먹나요?"
"넌 온통 밥 생각뿐이냐?"
잠든 카시야 몰래 입을 맞췄던 기억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깨어있는 카시야는 정말 지나치게 털털했다. 그래서 에르논은 그날 밤 내가 좀 미쳤었나보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안 그러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해질 것 같았으니까.
카시야는 에르논 덕분에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에르논이나 다른 병사들에게 들키지 않고 도망갈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에르논이 먼저 알아서 저를 놔준다고 하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좋은 주인 만나 팔자 편 용병처럼 적진 안을 대충 살펴보다가 사라지면 될 것 같았다.
사용하던 검을 닦고 검집에 넣으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에르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딘지 어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크흠. 그러고 보니 내가 너한테 아직 이름을 안 지어줬지? 이름까지 주인한테 지으라니 건방지기 짝이 없어. 이름 짓기도 귀찮으니까 대충, 에텔이라고 할게."
"…에텔?"
그녀의 반문에 에르논의 귓가가 붉게 물들었다. 일주일 넘게 고민한 이름인데 그녀가 마음에 안 들어 할까봐 조바심이 났다.
"왜? 마음에 안 드냐? 어쩔 수 없어. 내가 널 개라고 부르면 개인 거고, 에텔이라고 부르면 에텔인 거야. 그냥 지어주는 대로 얌전히…."
"예쁜 이름이네요."
짐짓 역성을 내던 에르논의 말문이 막혔다. 살짝 미소를 지은 카시야의 얼굴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그렇지? 주인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다, 생각하고 소중하게 여기거라."
"알겠습니다."
일어선 카시야에게 등을 돌리고 말을 매어놓은 곳으로 걸음을 향하던 에르논이 입을 열었다.
"…에텔?"
"네. 주인님."
"어…. 빨리 오라고."
자신이 붙여준 이름에 대답하는 카시야를 보며 뿌듯해진 에르논은 소년처럼 신이 났다. 하지만 그의 그런 기색을 눈치 챈 카시야는 마음이 조금씩 불편해지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첩자이고, 그를 배신하게 될 것이다. 카시야는 에르논이 차라리 화를 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카시야는 고개를 털었다.
'임무에 집중하자….'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차갑게 가라앉았다.
말을 달리다보니 어느새 저 멀리 병영의 모습이 아스라이 드러났다. 촘촘히 세운 막사들과 높게 꽂은 깃발들이 케일런 진영의 규모를 말해주고 있었다.
"오늘은 이 마을에서 묵자."
"하지만 쉬지 않고 달리면 오늘 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야. 난 저기 도착하는 순간 일해야 하거든. 굳이 아득바득 일하러 갈 필요 있어? 저놈들은 내 소중함을 좀 더 절절히 느껴봐야 해."
그럼 애초부터 전쟁터에 산책을 가겠다는 생각을 말았어야지, 하고 생각하는 카시야였지만 딱히 토 달지 않고 근처의 여관을 찾았다. 전쟁터와 멀지 않은 지역이라 그런지 마을은 크지 않았다. 마을에 여관은 따로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거주하던 사람이 피난을 가서 빈 집에 들어가 쉬기로 했다. 살던 사람들이 짐을 꼼꼼히 싸고 피난을 떠난 건지, 아니면 남아 있는 물건들을 주변 사람들이 다 싹쓸이해 간 건지 집 안은 썰렁했다. 다행이 벽난로와 이어진 굴뚝은 막히지 않아서 불을 피울 수 있었다. 마을에 딱 하나 남은 식당은 이미 만석이었기 때문에 그릇을 나중에 가져다주겠다고 하고 음식을 사와야 했다. 하지만 카시야나 에르논이나, 사람이 꽉 찬 식당에서 비좁게 앉아 음식을 먹는 것보다는 빈 집의 식탁에 앉아 편하게 먹는 게 여러모로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별 문제는 되지 않았다.
"식품이나 물자가 많이 모자란가 봅니다. 닭고기 야채 볶음인데 닭고기는 보이지가 않네요."
"그러게. 차라리 병영에 가면 더 맛있는 걸 먹을 수 있겠어. 군수 물자 쪽은 넉넉한 편이니까."
그 말에 다시 한 번 케일런과 타셀의 차이를 느끼는 카시야였다. 케일런군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은 금방 피폐해졌다. 식량과 물자를 무차별적으로 가져가버리니, 남은 백성들이 제대로 살 수가 없었다. 그리고 타셀은 그런 지역을 수복할 때마다 최선을 다해 재건을 돕고는 했다. 이것만 봐도 누가 이 나라를 다스려야할지는 분명해보였다. 물론 이런 얘기를 입 밖으로 낼만큼 에르논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카시야는 대신 그에 대해 좀 더 캐보기로 했다.
"주인님. 제가 주제넘은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1황자 전하 쪽을 구원한 것은 주인님이라고 들었습니다. 대마법사 에르논 님에 대한 소문은 어딜 가나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공작성 내에서 주인님에 대한 처우가 그다지 좋다고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 그런 겁니까?"
카시야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에르논은 조금 놀랐다. 보통 귀족들은 이런 식으로 직접적인 질문은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 무심한 용병은 귀족이 아니니, 그저 궁금한 걸 바로 묻는다. 그게 나쁘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이라 당황했다. 귀족들 상대로 생활하다보니 자신도 귀족물이 다 들었다고 자조하면서, 에르논은 입을 열었다.
"정말 여러모로 네가 나보다 나은 처지라니까. 너는 내가 돈을 주고 고용한 용병이지, 노예는 아니잖아? 하지만 나는 알리스타스 공작의 노예다. 개목걸이도 있어."
카시야는 그가 지금 진짜 노예라는 건지, 아니면 상징적인 표현을 쓴 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 쿠론에게 들은 바로는, 대마법사라 불리는 자들은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고 자유롭게 떠돌아다닌다고 했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면 그건 그의 의지일 뿐이라고. 그만큼 그들은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대체 누가 대마법사를 노예로 둘 수 있답니까?"
카시야의 의아한 눈빛에 에르논이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슬퍼보였다. 한참 아무 말도 없이 가만 앉아 포크 끝으로 야채만 뒤적이던 에르논은 깊게 한숨을 쉬더니 제 앞섶을 풀었다. 단추가 하나씩 열릴 때마다 그의 새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하지만 세 번째 단추가 풀리자 새하얀 피부와 대조적인 새까만 문양이 보였다. 마치 불로 지져 생긴 그을음인 것처럼 새까맣고 흉측한 문양이….
"이게 개목걸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스스로 개목걸이를 쓰게 만들었지. 내가 마력을 갖고 있는 줄도 모르던 때에 그가 시킨 대로 읊은 속박 술식이라서 그게 뭐였는지 기억도 안나. 그 술식을 알아야 해방 술식을 만들 텐데, 원래 술식을 모르니 풀 수도 없어. 이 빌어먹을 개목걸이 때문에, 이 개목걸이 저주를 건 놈이 남들보다 뛰어난 마력을 지닌 나 자신이라서, 이걸 풀 수가 없어서…!"
에르논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말을 끊고 한참 숨을 골랐다. 뱃속에서 역류하는 분노를 되삼키듯 침을 삼킨 그는 다시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제 공작이 감시자도 없이 나 혼자 어디 내보낼 수 있는 이유를 알겠지? 난 절대 그를 벗어날 수 없거든."
카시야에게 이름을 붙여줄 때까지만 해도 소년 같던 그의 얼굴에 쓰디쓴 비소가 드리웠다. 미칠 듯한 분노를 이만큼 침잠시키기 위해 얼마나 오랜 세월 좌절하고 고통 받아야 했을지, 카시야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속박 술식에 대해 조사해보시진 않으셨습니까?"
"왜 안 해봤겠어? 속박 마법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책이란 책은 다 찾아봤지. 그런데 내가 그럴 줄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내가 닿을 수 있는 모든 서재와 도서관에 이 술식에 대한 책은 없더라. 아마 내가 이 저주를 풀려고 노력하는 걸, 제 손바닥 위 보듯 훤히 들여다보고 있겠지."
두 사람은 다시 말이 없었다. 카시야는 세상에 대한 그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도 그랬지 않은가. 모든 인간성과 감정을 거세당하고서도, 자유를 포기했으면서도, 노예임을 받아들였으면서도 뱃속 깊은 곳에서는 풀리지 않는 울분이 무서울 정도로 착실히 쌓여갔다.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고 그 대상을 적이라고 규정지었다. 하지만 그 울분은 적을 미친 듯이 죽여도 풀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만 더 보여주십시오."
카시야의 요청에 에르논은 머뭇거리다가 제 셔츠를 다시 열어 하얀 가슴팍을 보여주었다. 흉물스러운 속박의 문양은 그의 명치 쪽에 주먹만 한 크기로 동그랗게 새겨져있었다. 카시야는 그의 앞에 무릎 굽히고 앉아 그 문양 위를 다시 따라 그리듯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접촉에 에르논의 몸이 움찔했다.
"아,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냐. 괜찮아."
문양을 자세히 살펴본 카시야는 그의 셔츠 단추를 다시 채워주고는 다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언젠가는… 풀었으면 좋겠네요."
또다시 그녀의 무심한 한 마디에 큰 위로를 받는 에르논이었다.
============================ 작품 후기 ============================
카시야는 남자의 가슴팍을 열어제끼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졌는데요, 혹시 여기에 남자 독자분도 있나요?
만약 계시다면 남자 독자분께서 이 소설의 감정선에 공감할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