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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40화 (40/134)

00040 속박(5) =========================

다음날 아침부터 말을 몰자 점심때가 지나지 않아 케일런군 진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언뜻 봐도 타셀군보다 병력의 숫자가 많아 보였지만, 군사의 질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는 타셀군 쪽이 더 나아보였다. 카시야 델 로만 대령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 병영은 병사들의 사기부터 고취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대마법사 에르논이 온다고 해서 희망을 가졌을 병사들이 이 모양이라면, 에르논이 오기 전 상태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물론 카시야로서는 그들이 무기력한 편이 나았지만 말이다.

에르논은 그래도 병영 내에서는 대마법사 취급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다 패해가는 상황을 몇 번이나 뒤바꾼 그이니, 병사들에게는 그야말로 구세주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들을 안내하는 병사가 진지 내의 깊숙한 곳까지 그들을 안내하려하자 에르논이 발걸음을 멈추고 카시야를 뒤돌아보며 품 안에서 조그만 패 하나를 꺼내주었다.

"에텔. 이 근처에서 적당히 놀고 있어."

마치 키우는 강아지에게나 할 법한 말투였다. 하지만 카시야는 개의치 않고 그에게 깍듯이 인사한 후 그가 멀어지자 몸을 돌려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낯선 그녀에게 창이나 칼을 들이대는 병사가 있어도 에르논이 쥐여 준 패만 보여주면 그들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부대장쯤으로 보이는 어떤 이는 그녀의 곁에 졸졸 따라오면서 병영 내의 여기저기를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에르논이 쥐여 준 패가 꽤나 대단한 것 같았다.

'정말 잘 됐어. 에르논인 걸 알았을 때에는 솔직히 앞이 깜깜했는데, 이렇게나 나를 도와줄 줄이야….'

정말 그와 만나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마나 운용에 대해서도 한참 나중에야 알았을 것이 분명하다. 거기다 이렇게나 친절히 적군의 병영 내를 안내받다니…. 임무는 굉장히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으로 적진의 주요 시설을 세심히 훑는 카시야의 곁에 서서 살살거리던 부대장은, 더 이상 궁금증을 참기가 힘들었는지 질문을 했다.

"저기… 에텔 님께서는 실례지만 에르논 님과는 어떻게 되시는 분이신지요?"

눈치를 보며 양손을 비벼대는 모양새가 꽤나 비열해보였다.

"에르논 님께서 제 주인님이십니다. 저는 호위병으로 고용된 용병이고요."

그녀의 대답에 부대장의 모든 행동이 굳어버린 듯 딱 멈췄다. 흔들리던 눈동자를 진정시킨 그가 확인하듯이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에텔… 님은, 그저, 용병… 이시라고요…? 귀족도 아니고, 그냥, 돈 받고 일하는, 용병?"

"네. 그렇습니다."

간결한 카시야의 대답에 부대장의 태도가 방금 전까지와는 상당히 달라졌다.

"아이, 씨…. 이 거지 용병 새끼가, 용병이면 용병이라고 미리 말을 할 것이지, 어디 감히 귀족을 조롱해?"

"물어보지 않으시길래요. 저는 에르논 님 명령대로 에르논 님께서 나오실 때까지 이 근처를 돌아볼 뿐입니다."

"이게 말대답을 하네? 너, 지금 에르논 님하고 같이 왔다고 뵈는 게 없어? 에르논 님과 같이 왔든, 말든, 너 같은 거지새끼 하나 죽인다고해도 문제될 거 없거든? 당장 내 앞에서 무릎 꿇지 못해?"

그는 평민보다 못한 떠돌이 용병에게 살살거렸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운지 과하게 성을 내었다. 그 같잖은 꼴에 모가지를 따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빠져나가는 길을 어렵게 만들 것은 없겠다 싶어 순순히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습니다만, 언짢으셨다면 용서해주십시오."

부대장은 거기에서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무릎을 꿇자 이내 기세등등해진 부대장은 곧이어 쥐고 있던 가죽 장갑으로 그녀의 머리를 내리쳤다. 하지만 그녀가 소리를 내지도 않고 자세가 흐트러지지도 않자 더 화가 났는지 가차 없이 계속 내리치다가, 제 분에 못 이겨 발로 그녀를 차기 시작했다.

"건방진 새끼! 빌어! 싹싹 빌라고! 이 거지 새끼! 죽여 버리겠어!"

비대한 그가 가죽장갑으로 내리치고 발로 차봤자 별로 아프지도 않았지만, 소란이 커지면 곤란할 것 같긴 했다. 카시야는 슬쩍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 병사가 몇 있었지만 부대장이 발광하는 꼴을 하루 이틀 보는 게 아닌 건지, 아무도 크게 관심 갖지 않았다. 흘끗 보다가 '쯧쯧.'하고 입을 차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다. 카시야는 씩씩대는 부대장의 다리를 붙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으리. 정말 죄송합니다. 비루한 몸이지만, 저쪽 구석에서… 제가 나으리의 기분을 풀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의 허벅지를 야릇하게 어루만지는 카시야의 손길에 부대장은 발길질하려던 다리를 멈췄다. 카시야가 눈짓한 구석은 수풀이 우거지고 어둑어둑한 그늘이었다. 그의 얼굴에 음탕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호오…. 그래, 이제야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깨달은 것 같구나. 좋다. 네가 얼마나 성의를 보이느냐에 따라 내가 용서를 해줄 수도 있지."

그는 카시야의 팔뚝을 잡고 일으켜 세우더니 누가 봐도 급한 것처럼 숲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라진지 5분도 되지 않아 카시야가 혼자 도로 밖으로 나왔다. 그가 내리치던 장갑을 끼고 목을 따서, 장갑만 벗어던지니 피가 튄 곳은 없었다. 카시야는 그가 발로 찼던 옆구리를 벅벅 긁으며 다시 병영 안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방금과 같은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가능한 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했다.

지도부의 막사가 있는 곳까지 둘러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아까 죽인 부대장의 시체를 누군가 찾아낼지도 몰랐고 이상하게 안 좋은 예감이 들기 시작해서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병영의 외곽으로 움직였다. 그녀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지만 당당하게 적진을 활보하는 첩자를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누군가가 병영을 빠져나가는 그녀를 붙잡고 어딜 가냐고 물었지만, 에르논이 준 패를 보여주며 '에르논 님의 심부름을 가고 있다. 마법에 필요한 것을 찾아오라는 명령이다.'라고 둘러대니 무사 통과였다. 지나치게 쉽게 빠져나간다는 감이 있어서 카시야는 오히려 서둘렀다. 에르논 쯤 되는 마법사라면 단번에 그녀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 최대한 빨리 사라져야 했다.

같은 시각 루크의 막사 안에서는 루크와 에르논이 불편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이제 몸은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에르논 님."

에르논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한참을 기다리게 만든 루크가 자리에 앉으며 인사했다. 안개숲에서 큰 피해를 입고 돌아온 에르논을 걱정하는 것 같은 안부 인사였지만 그 안에 비아냥이 숨어있다는 것을 에르논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안개숲에서 당한 것은 어느 정도 에르논의 자만심이 자초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염려 덕분에요. 급박한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문장 자체로는 지나치게 굽힌 것 같았지만 심드렁한 에르논의 표정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닙니다. 에르논 님께서 쾌차하시는 게 더 중요한 문제죠. 아무튼 에르논 님께서 와주시니 크게 안심되는군요. 좀 더 예를 다해 맞이해드리고 싶습니다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곧바로 전략 회의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루크의 파란 눈동자에서 냉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루크가 보기에 에르논은 아직 제 감정조차 제대로 숨기지 못하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다만 그 애송이에게 너무나 큰 힘이 주어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감정이 하루에도 몇번씩 널뛰기를 하는 놈이 어마어마한 마력과 마나를 갖고 있으니, 같은 편이라 하더라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다만 오늘 본 에르논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언제나 우울한 눈빛의 그였는데, 오늘은 왠지 모르게 생기가 있다. 삐뚤어지긴 했어도 미소를 지을 줄 아는 것을 보니 이 괴물도 인간 같아 보인다. 하지만 루크는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혼자 처쉬어댔으니 생기가 돌만도 하지, 하고 넘겨버렸다.

루크는 에르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에르논은 루크에 대해 동경심 같은 것이 있었다. 까놓고 보면 루크나 에르논이나 출생 배경이 비슷했다. 노예에게서 난 루크나, 창녀에게서 난 에르논이나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될 운명이었다는 것은 같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타고난 마력 때문에 공작가에 끌려가 억지로 속박 마법에 걸려 노예처럼 사는 자신과는 달리, 루크는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인물이다. 누군가에게 속박당해 있지도 않고, 이 전장에서 싸우는 것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이다. 루크의 그런 당당함이 에르논으로서는 부럽기 그지없었다. 태양처럼 빛나는 루크를 보며, 에르논은 자신을 음습한 늪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를 질투하지만, 반면에 그를 동경했다. 그래서 루크 앞에서는 늘 더 우울해지는 에르논이었다. 하지만 '에텔'이라는 존재가 있는 지금은 조금 나았다. 그녀 앞에서는 편해질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떤 병사가 헐레벌떡 뛰어와 소리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에르논 님! 함께 오셨던 분을 좀 찾아주십시오! 그 사람이 저희 부대장님을 살해하고 도망쳤습니다!"

막사 안으로 급하게 들어온 이의 그 외침에, 에르논은 손에 들고 있던 지도를 떨어트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에르논 님과 함께 온 자가 있었나?"

늘 혼자 다니는 에르논이 누군가와 함께 왔었다는 소리에 루크가 물었다.

"예. 에르논 님께서 고용하신 용병이라고 했다는데, 저희 부대장님과 함께 사라지는 것을 본 병사가 있습니다. 부대장님이 너무 오래 돌아오지 않으셔서 찾아봤더니… 목을 베여 살해당한 상태였습니다."

루크가 더 물어보려는 찰나 에르논이 말을 가로챘다.

"에텔이 그 부대장이랑 왜, 어디로 사라졌다는 거냐? 네 몸에 있는 피를 다 쥐어짜내기 전에 솔직히 말해라."

"아, 그… 그게…."

그가 말을 머뭇거리자 에르논의 보라색 눈이 반짝였다. 그러자 그에게 말 그대로 온몸을 쥐어짜내려는 듯한 압박이 가해졌다.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부, 부대장님이 그에게 공대했다가, 그가 용병이라는 사실을 알고 귀족을 모욕했다며 마구 때리셨다고 합니다! 맞고 있던 그 용병이 사죄하겠다고 해서, 부대장님이 그를 데리고 숲으로 들어가신 듯합니다!"

서서히 풀어지는 압박에 그 병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발발 떨었다.

에르논은 카시야가 부대장을 죽였다는 사실보다 그 부대장이 카시야를 때리고 욕보이려 했다는 사실에 더 분노했다. 우발적으로 부대장을 죽인 카시야는 벌 받을까봐 두려운 나머지 도망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설마 그녀가 이렇게 빨리 자신을 벗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에르논은 당황했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아냐. 어쩌면 지금은 에텔이 사라져버린 게 다행일지도 몰라. 부대장을 죽였다니 루크는 절대로 에텔을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지금으로서는 에텔이 최대한 멀리 도망치는 게 나아. 지금은 도망치게 놔두고, 나중에 어떻게든 찾아내면 되니까….'

어차피 그녀가 자는 사이, 약하게나마 추적 마법을 걸어두었었다. 하지만 루크에게는 절대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었던 에르논은 시치미를 뚝 떼었다.

하지만 루크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에르논에게 용병에 대해 물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고용한 용병입니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아, 자잘한 일들은 맡기려고 고용했죠."

"알리스타스 공작께서… 허락하셨습니까?"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보고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용병…. 신원은 확실합니까?"

"떠돌이 용병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지금, 신원도 확실치 않은 자를, 이곳에 데리고 왔다는 말씀입니까?"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루크의 말에 에르논은 입을 다물었다. 뚱해있는 그 표정은 마치 불만에 찬 어린 아이와 다름없었다. 루크는 당장 칼로 에르논의 목을 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으며 보고하러 들어온 병사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그 용병이 마지막으로 발견됐던 곳으로 안내해라."

그러자 에르논이 부스스 일어섰다.

"제가 찾겠습니다."

"아닙니다. 에르논 님께서는 아직 미령하신 듯하니 결전의 날을 위해 몸을 보전하십시오. 그리고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해당 용병은 찾는 즉시 척살하겠습니다."

"그, 그건…!"

"지금은 전시입니다, 대마법사! 사사로운 관계로 큰일을 그르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제가 처리하지 않더라도 공작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겁니다."

뭐라고 반박할 말을 찾던 에르논은 그가 진짜로 공작에게 일러바칠 것 같다는 생각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명치에 새겨진 문양이 아파오는 것 같았다. 그런 에르논을 쏘아보던 루크는 병사들의 안내에 따라 카시야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췄다는 곳까지 움직였다.

============================ 작품 후기 ============================

저는 이제 또 부지런히 비축분을 쌓아야 하겠군요.

그런데 여러분! 글을 뽑아내라고 하실거면! 양심적으로 저한테 군만두랑 웰치스는 주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8ㅁ8)/

내일 퇴근할 때는 카페인 음료를 사들고 와야겠슴다.

최근 반복적으로 듣는 노동요는 Aimer의 , 애드 시런의 입니다. 특히 Cold Sun은 이 글을 쓰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노래예요. 거의 이 소설 주제갑니다.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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