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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41화 (41/134)

00041 속박(6) =========================

케일런군의 병영을 빠져나온 카시야는 서둘러 달리기 시작했다. 왠지 감이 좋지가 않았다.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군의 주요 물자인 말을 쉽게 얻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전투가 벌어지는 곳 근처에 숲이 펼쳐져 있어서 다행이었다. 물론 조금만 더 나아가면 곧바로 평원이 펼쳐지고 그때 양쪽 진영으로부터 공격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지만, 카시야로서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저기만 넘어서면 타셀군 진영에 더 가까워지겠군. 서두르자.'

숲의 끝이 보였다. 카시야가 눈앞에 펼쳐질 평원을 떠올리며 다시 한 발을 더 내딛는 순간, 뒤쪽에서부터 무시무시한 검기가 쇄도했다. 카시야는 본능적으로 몸을 굴려 피했지만 그녀를 향해 쏟아지던 검기는 그녀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 화살처럼 내리꽂히며 땅을 파헤쳤다. 덕분에 양 진영의 군사 분계선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점에서부터 또 멀어졌다. 에르논이 말한 검기를 이런 식으로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제기랄! 상대가 지나치게 강하다!'

곧바로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차이였다. 상대는 아직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 먼 거리에서부터 그녀가 있는 정확한 지점을 향해 검기를 쏜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순 에르논인가도 싶었다. 마법이라고 해야 할 만큼 놀라웠으니까 말이다.

카시야는 상대의 공격이 잠깐 멈춘 사이 허리춤의 팔치온을 꺼내들고 에르논에게서 배운 대로 검에 마나를 실었다. 이대로 몸을 굴려 피하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 하나가 직접 대검을 휘두른 것과 같은 위력을 지닌 검기를, 아직 마나 운용이 미숙한 자신의 칼로 받아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상대는 쥐를 구석으로 몰듯 다가왔다. 하지만 카시야는 보통 쥐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타셀군 진영 쪽으로 몸을 날쌔게 움직였다. 아니나 다를까, 멈췄던 검기가 다시 날아와 박혔다.

콰앙-!

자신을 향해 내리꽂히는 검기를 살짝 비켜나며 마나를 실은 팔치온으로 쳐냈더니 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파열음이 귓전을 울렸다. 카시야가 막아낸 덕분에 상대가 쏘아 보낸 검기가 파훼되기는 했지만 카시야는 상대방의 위력을 더욱 더 깨닫게 되었다. 멀리서 날린 검기가 이 정도라면, 실제 맞댈 그의 검은 지금의 그녀로서는 절대 막아낼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불길한 예감의 정체가 이거였나!'

타셀군의 진영이 코앞인데, 여기서 막힐 줄이야. 하지만 이곳에서 벌어질 그녀의 운명은 죽거나, 도망가거나 딱 두 가지 밖에 없었다. 죽음을 등지고 선 카시야는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해야 했다.

어디서 또 날아올지 모르는 검기에 긴장한 카시야가 다시 타셀군 진영 쪽으로 한 걸음 옮기자 다시 검기가 덮쳐들었다. 이번에는 몇 번을 연속해서 휘두른 것인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한 검기가 그녀를 향해 내리꽂혔다. 죽음이 코앞에 닥쳤다고 느낀 카시야는 본능적으로 온몸의 마나를 손에 쥔 팔치온에 흘려 넣어 360도로 휘둘렀다. 거기에 부딪힌 검기가 파훼되며 아까보다 더한 굉음이 주변에 울렸다. 가까스로 막기는 했지만 검기와 맞부딪히던 검은 결국 산산조각 나버렸고, 미처 다 막지 못한 검기가 땅바닥에 내리꽂히며 만들어낸 엄청난 풍압에 카시야는 근처에 서있는 나무기둥에 패대기쳐졌다.

"커헉-! 컥!"

몸통을 강타한 충격에 어딘가가 상했는지, 아니면 갑작스럽게 끌어다 쓴 마나 때문인지 카시야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꼼짝할 힘도 없이 널브러진 카시야를 향해, 사박사박, 풀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져왔다.

"허어…. 설마 했는데 진짜 계집이라니…."

지척까지 왔는데도 자신을 죽이지 않고 바라보는 상대에게서는 절대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거기에 조금 배알이 꼴린 카시야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나무기둥에 기대앉았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상대를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누구한테 죽는지는 봐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확인한 카시야는 눈을 크게 홉뜨며 숨을 멈췄다.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오만한 표정의 금발 기사는,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계집 주제에 마나를 운용할 줄 알다니, 제법이었어. 감도 좋고, 몸놀림도 빠르고, 전투에 대한 감각도 있고, 무엇보다 내 검기를 막아냈고…. 첩자만 아니었다면 부대장을 죽였든 어쨌든 거둬서 키워보고 싶을 정도였다만…."

나른하게 말하던 그가 지팡이처럼 짚고 있던 칼의 손잡이를 다시 그러쥐었다.

"멍청한 에르논은 속여도, 난 못 속여. 여기까지 온 것은 정말 칭찬한다. 하지만 이제 그만 죽어줘야겠어."

그가 죽이겠다고 공언했는데도 카시야의 놀라서 굳은 얼굴은 여전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나? 그 정도는 들어주는 자비를 베풀겠다."

그의 말에 드디어 카시야의 입이 열렸다.

"…세이지…? 세이지 카힐…?"

잠깐의 정적이 그들 사이를 흘렀다.

"뭐라는 거냐? 어쨌든 그게 마지막 할 말이냐? 그럼 이제, 끝내자."

그는 무심한 얼굴로 검을 들어 그녀를 향해 내리쳤다. 하지만 그가 가른 것은 그녀가 기대고 있던 나무였다. 정말 순간적인 움직임이라 그 기사, 그러니까 루크 페레이아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놀라고 있었다.

"호오…. 아직 움직일 힘이 남아있었나?"

근처로 몸을 굴려 피한 카시야는, 그러나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갑자기 움직인 탓에 다시 속 안에서 피가 울컥하고 솟구쳤다. 쿨럭거리며 피를 토해낸 카시야는,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들어 루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금 뭔가를 확인한 듯 그녀의 표정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그것은 루크나 곧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혼란스러움'이었다. 하지만 루크는 그녀가 무엇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도 적극적으로 도망가거나 살려달라고 빌지도 않으면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그녀에 대해, 그는 흥미가 생겼다.

그가 '이걸 어쩔까.'하며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카시야는 입 안에 남아있는 핏기를 뱉고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혼란은 아직 다 가시지 않았지만,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빼드는 그녀의 손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루크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마치 아이와 놀아주듯 가볍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눈에도 묵직해 보이는 대검이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모습이 가볍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가 그리는 검의 궤적만큼은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빈틈이 없었다.

그가 조롱하고 있는 것임이 분명하지만, 카시야는 단검으로 그의 검을 흘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사실 그마저도 가까스로 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대검을 흘릴 때마다 단검의 날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그러나 카시야는 포기하지 않고 그의 방심을 노렸다. 그가 가진 대검의 길이가 있어 그와의 거리를 좁히기가 어려웠다. 그때 루크가 잠시 멈칫했다. 그가 타셀 진영 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돌리는 순간을, 카시야는 놓치지 않았다. 재빨리 그의 앞으로 돌진한 카시야는 그의 드러난 목을 향해 단검을 박아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 그는 보통이 아니었다. 단검을 든 카시야의 손목이 그에게 잡혀있었다. 그리고 대검을 쥐고 있었던 그의 팔이 어느새 그녀의 몸을 단단히 붙들어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루크의 고개가 다시 카시야를 향하고 파란 눈동자가 그녀의 에메랄드 색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 둘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게 된 카시야의 얼굴에는 또다시 혼란이 드리웠다. 늘 단단하게 가라앉았던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정적을 먼저 깬 것은 루크였다.

"…정말 흥미로워. 에르논이 꽤나 재미있는 걸 주웠군. 너…. 정체가 뭐냐?"

억지로 붙든 그녀의 몸에서는 죽음을 앞둔 자의 떨림이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도대체 그 눈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자신의 앞에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자는 처음이라 루크는 그녀에게서 흥미를 거둘 수가 없었다. 그는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장 그녀를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를 두고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들어 죽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사이, 그들이 있는 장소에 루크의 숙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는 말발굽의 진동으로 그가 당도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루크는, 카시야의 몸을 놓아주며 상대편이 날린 검기를 가볍게 피했다.

검기를 날린 자는 미하일 탈리온 메레디스였다.

양 진영이 나뉘는 경계선 부근에서 익숙한 검기의 느낌이 터지기 시작하자 미하일은 몇몇의 휘하를 이끌고 급하게 달려온 참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루크가 붙들고 있는 카시야는 더욱 더 놀라운 광경이었다. 미하일은 반드시 카시야를 데리고 돌아가겠다고 다짐하고 카시야에게서 떼어놓듯 루크에게 검기를 날려댔다.

그의 검기를 막아내던 루크는 순간적으로 카시야를 향하는 미하일의 눈동자를 알아채고 카시야를 향해 검기를 날렸다. 역시나 미하일은 카시야를 향하는 검기 먼저 막아냈다. 이로서 카시야가 타셀 진영의 첩자라는 루크의 짐작이 확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하일이 카시야를 보호하는 틈을 타 루크는 근처에 세워둔 말 위로 훌쩍 올라탔다. 그리고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케일런군 진영으로 물러났다. 자신의 휘하들은 그제야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쓸모없는 놈들. 느려 터졌군.'

루크는 욕설을 짓씹다가 다시 미하일 쪽을 바라보았다. 미하일 역시 더 이상 루크를 몰아세울 생각은 없는지 쓰러져있는 카시야를 들쳐메고 도로 말머리를 돌렸다.

마나가 다 소진된 듯한 탈력감에 카시야의 의식은 이미 흐려져 있었다.

"카시야! 이봐! 정신 차려!"

반가운 목소리가 그녀를 부르는 것을 들으며, 그녀는 천천히 암전에 빠져들었다.

*

"야! 분대장이 돌아왔대!"

막사의 출입구가 거칠게 걷히며 누군가가 소리쳤다. 잠시 멍하니 그 누군가를 바라보던 분대원들 사이에서 스윈델이 가장 먼저 뛰쳐나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분대원들이 스윈델의 뒤를 따라 타셀의 막사로 함께 달렸다. 하지만 그들은 막사에 닿지도 못하고 저지당했다.

"멈춰라! 무슨 일이냐!"

"부, 분대장님이 돌아왔다는 게 사실입니까!"

스윈델의 어깨가 흥분과 초조함으로 떨리고 있었다.

"대답해줄 수 없다. 돌아가라!"

"저는 확인해봐야겠습니다. 무사한지만 보고 돌아가겠습니다!"

"지금 항명하는 거냐!"

막사 근처를 지키고 있던 귀족 기사와 분대원들의 소란에 타셀의 막사 안에서 지크가 나왔다.

"무슨 일이냐?"

그의 물음에 귀족 기사보다 먼저 스윈델이 서둘러 답했다.

"카시야 분대장님께서 돌아왔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지크는 그동안 카시야를 사지에 남겨두고 혼자 돌아왔다는 죄책감에 힘들어하던 그를 기억했다.

"…사실이다. 하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고, 아직 의식을 찾지 못했다. 고로 너희 분대장을 아직 만날 수는 없으니, 지금은 일단 돌아가라. 카시야 경이 정신 차리면 알려주겠다."

간질거리지는 않지만 위로의 느낌이 담긴 나직한 말에, 스윈델의 눈이 불그스름해졌다.

"살아는… 살아는 계신 거죠?"

"어. 물론. 쉽게 죽을 놈이 아니잖냐."

지크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녀석은 걱정 마라. 걱정해야할 건 너희들 자신이지. 분대장이 왔으니 너희들 편한 것도 이제 끝이야."

지크의 말에 스윈델을 뒤따라온 분대원들이 피식피식 웃으며 짐짓 과장된 어조로 투덜댔다.

"에헤이! 야! 마녀가 멀쩡히 살아 왔댄다. 이젠 우리가 죽을 차롄가 보다!"

"어이구야…. 그동안 근육 다 녹았는디…. 이걸 어쩌냐."

"야, 가서 훈련 준비나 허자. 응? 우리 목숨부터 챙겨야지."

떨리는 스윈델의 어깨를, 다른 분대원이 감싸 안았다. 그들의 위로 아닌 위로에 스윈델도 지크와 귀족 기사에게 죄송했다고 인사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 작품 후기 ============================

우리 독자님들 코멘트 읽는 낙으로 삽니다, 제가. ㅎㅎㅎ

1. 카시야 모티브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 없습니다. 제가 예전부터 꿈꿔오던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어제 말씀드렸듯 'Cold sun'이라는 노래에서 이미지를 좀 더 구체화시키긴 했습니다.

2. 군만두+웰치스+감금 : 님들 지금 농담처럼 안 들려요; 반쯤은 진담이죠? 그죠? 카톡아이디라도 풀면 웰치스 부자될듯. '내 모든 것을 주겠다'는 님도 계시던데, 넣어두세요. 허허허.

그런데 사실은 자까도 에어컨 빵빵한 방에 틀어박혀서 글만 쓰고 싶다는 게 함정; 생업을 놓을 수 없다는 게 함정ㅠㅗㅠ 제 꿈이 전업자까입니다, 여러분!

맨날 글만 쓰고 살았으면...ㅠㅗㅠ

3. 진홍의카르마 주식시장 활황 : 현재 에르논 주식이 상한가를 치고 있습니다만, 조만간 타셀 에피소드가 등장하면 타셀 주가가 오르겠죠. 타셀은 점잖은 척하는 짐승남이니까. 이러고 있으니 주가조작을 하는 큰손이 된 기분입니다. 허허허.

4. 코멘 읽으면서 빵터진 단어 : 염전, 찌통

5. 코멘 읽으면서 억울한 말 : 여기서 끊으시면 어떡하냐(어디서 끊든 그렇게 말씀하실거잖아요.)

6. 진홍의카르마 남자독자는 두 분이었다고 한다.(샤이라니아 님, 그저사람일뿐 님.)

7. 작가 블로그가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lemonfrog81

메모나 안부 게시판에 궁금한 점 있으시거나 하실 말씀 남겨주시면 댓글 달게요. 조아라는 댓댓글 기능이 없어가지궁...

8. 쇼에나 님, 엘린s00 님, 백비비 님, 바바라1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웰치스 바꿔먹을게요. ㅎㅎㅎㅎㅎ

+ 지금은 비축분이 많이 없어서요, 앞으로 또 열심히 써갖고 이벤트 또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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