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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42화 (42/134)

00042 귀환(1) =========================

타셀이 머무는 막사 근처에 카시야를 위한 임시 막사가 세워졌다. 그 천막 앞에는 뛰어난 무위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타셀군의 가장 뛰어난 군의관이 4시간마다 한 번씩 카시야의 상태를 확인했으며, 타셀과 쌍둥이 기사가 돌아가며 들렀다.

미하일에게 구조되어 돌아온지 이틀이 지난 지금도 카시야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즈렐의 보급 부대 근처에서 에르논에게 잡혀갔다던 카시야가 왜 최전방에서 루크에게 공격당하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어쨌든 꽤 오랫동안 적진에 머물다 온 그녀가 아무런 수확 없이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적진에 오래 머물다 온 카시야에게 적이 심어놓은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경계심도, 그녀를 철벽같이 지키는 이유 중 하나였다.

카시야는 기묘한 꿈을 꾸며 암흑 속을 헤매고 있었다.

"세이지 카힐!"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루크의 환영을 보며 간간이 '세이지 카힐'이라는 이름을 되뇌었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자신의 주인이자, 자신을 죽인 자의 얼굴을. 카시야 자신 역시 그렇듯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다르기는 했지만 나머지는 세이지와 똑같았다. 심지어 그 서늘한 음성까지도.

자신을 죽였던 자의 얼굴임에도 맨 처음 느꼈던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이상한 세계에 떨어진 게 나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하지만 그는 카시야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세이지의 얼굴을 한 자가 이 세계에 있는 것인지, 카시야는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이 삶 자체가 꿈은 아닌지, 아니면 죽은 뒤에 겪는 지옥은 아닌지, 답을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가정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토할 것 같은 환영의 일렁임에 시달리던 카시야는 서늘한 손이 제 이마에 닿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카시야 경."

그녀의 눈앞에는 절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신성 치료사, 아르헨이 웃고 있었다.

"그 사이 마나 운용법을 익히셨더군요. 덕분에 온몸의 마나가 한꺼번에 휩쓸려 나간 상태였어요. 쉬시는 동안 다시 마나가 쌓이기는 했지만 아직 많이 모자라니, 당분간은 요양에 힘쓰는 것이 좋습니다. 기력이 없는 것 외에 몸에 불편한 곳이 있나요?"

조근 조근 그녀의 상태를 설명해주는 아르헨의 미성을 들으면서도 카시야는 정신이 멍했다. 근처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눈동자만 돌려 쳐다보니 타셀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감각이 온전히 들었다. 카시야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또 아르헨의 신성 치료를 받았는지, 특별히 고통이 느껴지는 부분은 없었다.

"불편한 곳은 없습니다. 두 번이나 목숨을 빚지는군요, 아르헨 님. 저번에는 감사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아르헨에게 감사 인사부터 전하던 카시야는 까끌까끌한 목 때문에 곧 마른기침을 했다. 그녀의 등을 가볍게 받친 아르헨이 그녀에게 물을 건넸다. 가볍게 목례한 카시야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정신이 좀 더 또렷하게 돌아오는 것 같았다. 타셀은 어느새 그녀의 침상 가까이로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카시야가 깨어났음을 누군가가 보고했는지 미하일이 다급하게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카시야!"

아직 몸에 힘이 없던 카시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역시 미하일 경이셨군요. 그 자리에서 죽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경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습니다."

힘없이 미소짓는 카시야의 모습은 타셀에게도 미하일에게도 굉장히 낯선 것이었다. 타셀은 심장이 조여드는 것같이 죄책감을 느꼈다. 아무리 강한 기사라고는 해도, 이렇게 처연하기 그지없는 여성을 적진에 몰아넣었다는 생각에 카시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하지만 카시야는 이내 평소의 카시야로 돌아왔다.

"아르헨 님.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감사인사를 드릴 시간이 없군요.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타셀 전하, 미하일 경. 급하게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아르헨은 일어나 타셀에게 예를 취하고 천막을 나갔다. 카시야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가 잠깐 휘청거렸다. 근처에 있던 타셀이 부축하자 그녀는 사양하려 했지만 그녀의 어깨를 감싼 손은 단단히 감겨 풀어지지 않았다.

"미하일. 우리 군 지도부 기사들을 불러오게."

타셀의 명령에 미하일이 긴장된 얼굴로 뛰쳐나가자 천막 안에는 타셀과 카시야만 남았다.

"카시야 경…. 미안하네. 내가 너무 성급했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당연한 명령을 내리신 겁니다. 제 효용 가치를 최대한 고려하신 선택을 하신 거니까요."

카시야로서는 타셀이 왜 자신에게 미안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을 다 챙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신이 루크에게 결국 죽임을 당했어도, 그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제 잘못이지, 그녀를 믿고 보낸 타셀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셀은 왠지 화난 얼굴을 지어보였다.

"자네의 효용 가치라고? 자네 지금 무슨 말 하고 있나? 자네는 물건이 아냐! 난 자네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네."

타셀의 노기띤 음성에 카시야는 당황했지만, 타셀이야말로 그녀가 자기 자신을 사물처럼 대하는 모습에 기가 질릴 것 같았다.

'도대체 이 자는 자기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카시야가 타셀의 부축을 받으며 작전 회의를 하는 막사 안으로 들어가니 미하일의 연락을 받고 모인 이들이 당황스러운 눈빛을 서로 주고받았다. 감히 황자, 아니, 이제 그들이 세울 나라의 왕 내지는 황제가 될 이에게 부축을 맡기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당혹감을 읽은 지크가 재빨리 카시야를 대신 부축해 타셀이 앉는 상석 곁에 그녀를 앉혔다.

"적진에서 돌아온 카시야 경이 급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모두를 모이게 했다. 소란은 피우지 말도록."

타셀이 막사 안을 조용히 만들고는 카시야에게 눈짓해보였다. 카시야는 침을 한 번 삼킨 뒤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조만간… 에르논을 포함한 케일런군이 공격해올 겁니다. 에르논은 안개숲 작전 때 크게 다쳐 한 달 넘게 마법을 쓰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몸 상태가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 케일런군을 돕기 위해 최전방에 와 있습니다. 그의 공격마법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녀의 말에 막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아닌 게 아니라 안개숲 작전 이후 에르논이 보이지 않았다. 최근 두 번의 전투 때에도 보이지 않길래 불안한 희망을 이어갔는데, 결국 그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우리에게 다행인 부분은, 케일런군의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케일런군 진영의 깊숙한 곳까지는 들어가 볼 수 없었지만, 일반 병사들은 현재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못합니다. 군수 물자를 뒤로 빼돌려 백성들에게 되파는 자들까지 보았습니다. 그리고 케일런 진영의 지역은 전부 상황이 좋지 못합니다. 아마 스윈델에게 들으셨을 거라 생각됩니다만, 케일런 측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의 모든 물자를 알리스타스 공작성과 군대로 집중시키고 있으며, 거기에 귀족들의 반발이 점차 심화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직 몸이 성치 않은 카시야는 잠깐의 얘기로도 숨이 가빴다. 몸이 아픈 곳은 없었지만, 기력이 너무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상태를 눈치 챈 타셀이 제 뒤에 있는 테이블에 놓인 물병을 들어 그녀에게 물을 따라 주었다. 카시야는 허겁지겁 물을 마신 뒤 한숨 돌렸다.

"그리고 다들 아시겠지만 신검이 현재 황제의 마지막 카드입니다. 황제가 실제로 그 검을 들 수 있는지 없는지는 확실치가 않다고 합니다. 그것과 연관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대신관이 황제의 영토에서 누군가의 공격을 받아 죽었습니다. 황제는 이것을 타셀 전하의 소행으로 공표했습니다만… 사실이 아니겠지요?"

대신관이 죽었다는 소식은 아직 타셀이 있는 곳까지 퍼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 얘기를 들은 귀족들은 낯빛까지 창백해지며 분노했다. 귀족들도 대부분 히드레이 교의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이다.

"설마…. 설마 황제가… 대신관까지 살해했다고? 미쳤군. 황제는 단단히 미쳤어!"

"우리가 가만있어도 신의 저주를 받아 죽겠군. 대신관을 죽이다니…."

"그걸 타셀 전하께 뒤집어 씌웠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백성들의 신앙심은 두텁습니다. 만약 이 거짓 소문으로 민심이 타셀 전하께 등돌릴 경우, 우리가 나아가는 길에 큰 문제가 될 겁니다."

하지만 타셀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황제가 대신관을 죽여야 했을까?"

그 말에 모두 조용해졌다.

그렇다. 황제는 대신관을 죽일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죽였다는 것은, 리스크를 떠안고도 그를 죽여야 할 이유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황제와 대신관, 둘의 연관점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이어가던 중, 엔드로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신탁…!"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황제와 대신관이 가장 겹치는 부분은,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신탁 밖에 없습니다. 그 둘만이 신탁을 들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카를 왕 시절만 하더라도 나라의 대소사를 신전과 의논했지만, 알테리온 황제 때부터는 신전을 정치와 완전히 분리시켰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굳이 대신관을 죽여야 할 일을 따져본다면 신탁이나 신검에 대한 것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새로운 신탁이 내려진 것은 아닐런지요."

사실을 정확하게 꿰뚫어본 의견이었지만, 그들로서는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확신한다 하더라도 대신관이 죽어야만 했던 신탁의 내용을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방금 엔드로스가 말했던 대로, 신탁은 황제와 대신관, 둘 만이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침음을 삼키던 그들은 결국 그 문제에 관해서는 신전에 사람을 보내 좀 더 알아보자고 한 뒤, 에르논을 막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카시야가 힘들어보였기 때문에 타셀은 미하일을 시켜 그녀를 천막까지 데려다주고 오라고 시켰다. 안 그래도 카시야에게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았던 미하일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부축했다.

"너…. 루크와 어떻게 대적한 거냐? 네가 대단한 놈이라는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새끼한테는 한참 역부족이야. 그런데 어떻게…."

카시야를 그녀의 침상에 앉힌 뒤 곁에 있는 의자를 빼들고 그 곁에 앉은 미하일은,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일어서지 않을 것임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제가 죽지 않아서 섭섭하신 모양입니다?"

카시야는 피식 웃으며 농을 지껄여보았다. 하지만 미하일의 얼굴은 그 답지 않게 진지했다.

"그럴 리가 있겠냐? 그저… 납득이 안 가는 장면이었거든. 내가 거기까지 달려간 이유는, 그 새끼가 내던지는 검기를 분명히 느꼈기 때문이야. 한두 번이 아니었지. 그런데 달려가 보니 검기로 온통 난장판이 된 가운데 아직 죽지 않은 네가 루크 그 새끼한테 잡혀있더라고. 분명히 그 놈 목을 칼로 찌르려다 잡힌 것 같더만.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야, 이 미친놈아. 어디 그 새끼한테 달려들 생각을 하냐? 넌 진짜 겁대가리가 없냐?"

그 상황을 떠올리던 미하일이 문득 카시야에게 화를 냈다. 모르긴 몰라도 루크의 목에 단검을 꽂으려고 달려든 인간은 카시야 하나뿐일 것이다. 미하일 저 자신도 그렇기는 하지만, 루크 역시 상대의 칼끝이 제 가까이 오게 놔두지 않았으니까.

"후우…. 말이 옆길로 샜군. 내가 묻고 싶은 건, 너, 무슨 조화를 부린 거야? 설마 그 자식이 널 가만히 두고 네 주변으로만 검기를 쏘아댄 거냐?"

"반은 운이 좋았고, 반은 그가 봐준 게 맞습니다."

"루크 페레이아 앞에서 운이 좋을 놈은 없어. 설마, 그 검기를 막아냈나?"

"조금은요. 운 좋게 마나 운용법을 터득해서 검에 마나를 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아낸 순간 검은 부서졌고, 저는 튕겨져 나갔죠. 그때 그가 절 죽일 마음을 먹었다면 못 죽였을 리가 없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마음이 바뀐 것 같더군요."

그녀가 마나 운용법을 익혔다는 얘기에 미하일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와…. 이 괴물 새끼. 그런 건 또 어떻게 익혔냐?"

"에르논에게서 배웠습니다."

"뭐? 맞아. 그러고 보니, 너, 에르논에게 잡혀갔댔지? 거기서는 또 어떻게 살아나온 거야?"

미하일의 얼굴은 쉴 새 없이 변하며 그의 놀라운 감정을 드러냈다.

============================ 작품 후기 ============================

아름다운 주말이예요~! 이번 주말에는 비축분을 많이 많이 쓸 수 있기를...ㅠㅗㅠ

(태풍 오면 비상근무 나가야해요...;;;)

남자독자님들이 몇 분 되시더라고요! 제가 일부러 고자만들려고 했던 건 아니고요, 손을 안 들어주셔서 몰랐습니다. 반가워요.^^ 그 중에는 카시야 주식 매입하시는 분도 계시고..ㅎㅎㅎ

남주 주식시장이 활황이네요. 사실 남주를 생각해두긴 했지만, 워낙에 남자 캐릭터가 많이 나오는 소설이라 그 모든 남자 캐릭터들과의 러브라인을 만드는 상상을 한답니다. 타셀, 에르논, 쿠론, 미하일, 지크, 루크, 스윈델, 세이지, 심지어 알리시아 모두 그럴듯한 씬을 만들 수 있다구요~! 나중에 완결 다 낸 다음에 외전 식으로 써볼까요?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었다'라는 소제목으로.ㅎㅎㅎㅎ

+ 백비비, 징수니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이 역시 웰치스 지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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