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3 귀환(2) =========================
"사실 처음에는 에르논인 줄 몰랐습니다. 만만치는 않아 보이기에 스윈델 먼저 보내기는 했지만…. 어쨌든 떠돌이 용병이라고 속이고 도망칠까 했는데 에르논도 뭔가 꺼림칙했는지 저를 자기 용병으로 고용하겠다더군요. 그 후에 제가 마음에 들었던 건지, 아니면 자신의 호위를 위해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게 마나 운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운이 좋았죠."
카시야는 에르논과 알리스타스 공작 사이의 얘기는 빼고 말했다. 지금 말해봤자 알리스타스 공작이 에르논의 목줄을 쥐고 있는 상태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도 했고, 왠지 그 사실을 여기저기 떠벌이고 싶지 않았다.
"알리스타스 공작성에 들어가기는 했는데, 에르논이 저를 몰래 데리고 들어간 거라 성 안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에르논의 방에서 일주일 정도 머무른 게 다였죠. 그리고 케일런군을 돕기 위해 전선으로 향할 때 저도 데리고 간 겁니다. 거기에서 탈출할 때 루크 페레이아에게 딱 걸린 거고요."
"하…! 너, 정말 운이 좋았다고 밖에는 할 수가 없네. 보면 볼수록 희한하단 말야."
미하일은 턱을 괸 채 카시야를 찬찬히 관찰하며 말했다. 안개숲에서 살아 돌아온 이후, 이 미스테리한 기사는 늘 신선한 충격과 흥미를 선사해준다. 물론 지크나 타셀이 경계했던 이유를 미하일 역시 잘 알고는 있었다. 그녀에 대해서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를 속이는 눈빛도 아니었고, 뭔가에 욕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미하일이 보기에도 이런 인간은 처음이었다.
"넌 무엇을 위해 타셀 전하 곁에 있는 거냐?"
미하일은 그녀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녀가 배신을 한다든가, 음흉한 계략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언제고 갑자기 사라져버릴 것 같은 그녀의 태도가 조금은 불안했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 되돌아 온 것은 또 다른 질문이었다.
"…미하일 경은 왜 타셀 전하 곁에 계시는 겁니까? 아니, 그보다… 무엇을 위해 살고 계십니까?"
"응? 나? 나는 타셀 전하와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고 싶다는 꿈을 위해 사는 거지, 뭐. 사내로 태어나고 기사가 됐으면 주군을 도와 썩은 세상을 갈아엎을 정도의 패기는 있어야지!"
미하일은 제 가슴팍을 탁탁 두드리며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의 어느 한 구석에도 미적거리는 느낌이 없어서, 그가 정말로 그의 주군을 위해, 세상을 위한 혁명을 위해 투신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갈아엎으면, 그게 미하일 경에게는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이득? 글쎄…. 인간을 움직이는 건 자신이 얻을 이득이 아니라 행복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냐? 나 같은 경우는 썩은 세상을 갈아엎고 모두를 위해 더 좋은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뿐이고 말야. 내가 나중에 낳을 아이가 내가 만든 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지금의 고생은 오히려 영광스러운 거지."
"행복…."
미하일의 대답에 카시야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곱씹을 뿐 말이 없었다.
"자, 나도 얘기했으니까 너도 얘기해줘. 그래, 넌 어떤데?"
그의 반복된 질문에도 카시야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하일은 끈질기게 기다렸다. 전에 없이 그녀의 내면 가까이 들어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살아있으니까 사는 거고, 명령을 받았으니 움직이는 것뿐입니다. 행복… 이라는 게 뭔지 잘 모르겠네요."
마침내 카시야가 입을 열었지만 미하일은 그녀의 말을 듣고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허무를 마주한 것만 같았다. 이제야 죽음에 무심하던 그녀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살아있을 이유가 딱히 없기 때문에, 죽지 말아야 할 이유도 딱히 없기 때문에….
미하일은 그녀의 손목을 황급히 붙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야! 살아가는 이유야, 지금부터 만들면 되지. 인생 다 산 노인네처럼 그런 얼굴 하지 마라."
카시야는 미하일이 붙든 손목을 내려 보다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늘 장난기로 반짝거리던 눈이,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훗. 제가 피곤해서 그런가봅니다. 마나를 다 써버린다는 게 이런 느낌이군요. 정말… 다 늙어버린 기분이에요. 언제쯤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너무 힘들면, 내 마나라도 좀 나눠줄까?"
"예? 그럴 수도 있습니까?"
"뭐, 흔한 방법은 아냐. 남의 마나가 몸에 들어오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거든. 한 번 시도나 해보자."
미하일은 카시야에게 방향을 바꿔 앉게 하더니 예전에 에르논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등 뒤에 손바닥을 얹었다.
"호흡은 편안하게 해. 기분이 많이 안 좋으면 바로 얘기하고."
카시야는 명상할 때처럼 앉았다. 잠시 후, 에르논이 했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확실히 밖에서 안으로 무엇인가가 섞여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점점 숨이 막힐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크흑…. 미, 미하일 경. 잠시만…."
"속 안 좋냐?"
그가 손을 떼자 기침이 나와 콜록대는 카시야의 등을 미하일이 가볍게 쳐주며 진정시켰다.
"이게 또 상성이 맞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거든. 내 마나를 주는 건 무린가 보네. 내가 마력까지 갖고 있었더라면 좀 더 쉽게 마나를 줄 수 있을 텐데…."
"아닙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쉬다보면 채워지겠죠."
"그래. 지금은 일단 쉬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 너희 분대원들이 너 일어나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으니까 푹 쉬고 얼른 일어나라고."
미하일은 작게 웃으며 드러눕는 카시야 위로 모포를 덮어주고 천막을 나갔다.
미하일이 나가고 조용해진 천막 안에서, 카시야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전생에 대해 곱씹어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살면서 '행복'이라는 것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을 때가 언제인지 고민했다. 물론 기쁨이나 즐거움같이 행복에 가까운 감정에 대한 것을 잘 모르는 그녀였기 때문에 떠올리는 데 어려움이 있기는 했다.
'흐음…. 적들을 무아지경으로 쓸어버릴 때는 확실히 기분이 좋았지. 임무에 성공했을 때… 도, 분명 만족감이 있었던 것 같긴 하고…. 하지만 그런 것들이 행복이었을까? 아냐…. 그것들은 자의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그것들 이외에 기분 좋았던 일이 또 뭐가 있지?'
아무리 전생을 곰곰이 떠올려 봐도 남들이 느낄 법한 행복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생을 살면서는, '기분 좋다.'라고 느낀 상황이 몇 있었다.
'루나엔이나 쿠론이 날 챙겨줬을 때 기분이 좋았지. 타셀 전하가 내 생각을 물어봤을 때도 좀… 그랬던 것 같고. 미하일도 같이 있으면 꽤 유쾌하고. 에르논…. 음. 에르논도 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고마웠어. 그러고 보니 그 치한테 좀 미안하군.'
카시야는 결국 즐거움이나 기쁨과 같은 긍정적인 기분은 '사람'을 통해서 얻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복이니, 삶의 의미니, 그런 건 아직 잘 모르겠으니까…. 일단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하고 잘… 살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게 중요하겠지? 아마, 타셀 전하가 만들려는 세상이 그런 곳 아닐까?'
다행이 이곳에서 눈 뜬 이래로 좋은 사람들만 잔뜩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신이 배려해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때 또다시 루크가 떠올랐다. 세이지 카힐의 얼굴을 하고 있던 루크.
'다음번 만날 때에는 그 얼굴에 냉정해질 수 있을까….'
자신을 죽인 남자였지만, 그와의 관계는 단순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서로 긴 역사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캠프에서 함께 살아나왔다는 것부터가 보통 인연은 아니다. 결국 자신을 죽인 것은 그였지만, 그 덕분에 죽음의 고비를 넘긴 적도 많았다. 그는 카시야의 속내를 알지 못했고, 카시야 역시 그의 속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를 보면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 자식…. 보나마나 날 죽이고 후회했을걸. 그 지옥에 저 혼자 남았을 텐데 그게 기뻤을 리가 없지. 도대체 날 왜 죽였을까? 사용 가치가 없어져서? 입을 막으려고? 하아…. 뭐, 다 지난 일이니 상관은 없지만.'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이기 때문이 자신이 죽은 이후 그가 느꼈을 감정을 알 수 있다. 사실 캠프 X를 함께 거쳤던 이가 자신의 주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분노하기는커녕 안도했었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에 말이다. 그것은 굉장히 기묘한 유대감이었다. 서로 죽이고 싶었지만, 서로 불쌍하게 여겼고, 전생의 카시야가 가장 '사랑'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던 이였다.
전생에 카시야가 느꼈던 감정 중에 가장 강렬했던 감정을 갖고 있었던 이의 얼굴을 마주했었기 때문에, 루크를 처음 봤을 때는 사고가 정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도대체 그가 왜 세이지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는 세이지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루크와는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는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았지만 말이다.
작전회의는 밤이 늦어서야 끝났다. 물론, 끝났다는 것이 완벽한 작전을 짰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에르논의 공격마법을 완벽히 막을 수 있는 것은 그와 비슷한 수준 이상의 마법사가 펼치는 보호 마법 내지는 역공격 마법 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재 에르논을 제외한 대마법사들은 세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전쟁을 방관하고 있었다. 진리를 탐구하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정신세계를 갖고 있는 게 보통의 마법사이니, 에르논이 특이한 것일 뿐, 그들의 태도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에르논도 보통의 마법사들처럼 진리나 탐구하며 세상을 떠돌아다니면 좋겠지만, 그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리스타스 공작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타셀은 피곤한 눈언저리를 문지르며 자신의 막사로 돌아가다가 카시야의 천막으로 눈길을 주었다. 늘 무덤덤하고 강인하던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휘청거리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카시야는 잠들었는지 조용하고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아주 옅게 들릴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내려다 본 그녀의 얼굴은 평온해보였지만, 확실히 예전에는 강하게 느껴지던 그녀의 기운이 아주 약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짧은 시간에 마나 운용법을 익혔다고…? 하여간에 대단하다니까….'
미소 짓던 타셀은 자신의 손바닥을 그녀의 가슴 한복판에 조심스럽게 대고는 자신의 마나를 천천히 그녀의 몸에 불어넣었다. 타고난 마력 역시 강한 타셀이기에 상대의 거부감을 최소화시키며 마나를 넘겨줄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느껴지는 약한 추적마법까지 끊어버렸다. 아마도 에르논이 걸어놓은 것 같았으니까.
쇠해버린 마나가 채워지자 카시야의 눈이 반짝 뜨였다. 어둑어둑한 천막 안에서도 카시야는 그녀의 곁에 있는 자가 타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금 자신의 몸 안에 채워진 마나의 느낌이, 착각할 수 없을 만큼 타셀의 느낌과 똑같았다.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타셀의 청회색 눈동자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전하?"
카시야가 그를 부르자 타셀은 그녀의 가슴에 얹었던 손을 떼었다.
"좀 편해질 거야. 잠을 깨울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아직 수련이 부족하군. 푹 자도록 해."
그의 손가락이 카시야의 눈꺼풀을 가볍게 쓸었다. 그러자 정말 다시 잠이 쏟아져 버틸 수가 없었다. 또다시 깊은 잠에 빠진 그녀를 보며 타셀은 작게 미소 지었다.
============================ 작품 후기 ============================
하아. 진짜 당분간은 연참 자제할라고 했는데
조회 30만 돌파, 선작 6천 돌파 기념 연참은 해야할 것 같아서...
원래 똥줄이 타야 글도 잘 써지는 법이니까요.-_-
그럼 즐거운 주말밤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