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홍의 카르마-44화 (44/134)

00044 귀환(3) =========================

다음날 아침,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기력이 회복되었음을 느낀 카시야는 간밤에 본 타셀의 모습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그의 느낌이 강한 마나였는데 자고 있는 사이 자신의 몸에 동화됐는지 크게 이상한 느낌이 없었다. 침상에서 일어나 가볍게 맨손 체조를 하며 굳었던 몸을 푼 카시야는 아직 푸른 기운이 가시지 않은 병영의 아침을 바라보며 아침 훈련을 하기 위해 공터를 찾아 나섰다. 막사 사이를 걷는 카시야를 발견한 몇몇은 서로 눈빛을 주고 받으며 그녀의 생환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병영 뒤편에 펼쳐진 공터에서, 카시야는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며 몸을 풀었다. 조금씩 체온이 오르기 시작하자 속도를 올린 카시야는 문득 맞은편에서 병사 몇 명이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카시야가 훈련하는 공터에 들어서더니 아무 말 없이 그녀가 달리는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그들이 그녀의 분대원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카시야는 피식 웃고는 다시 훈련에 몰두했다. 온몸이 후끈해질 정도로 달린 그들은 평소 하던 것처럼 유연성을 기르기 위한 스트레칭을 이어갔다. 한 시간은 금방 흘렀다. 훈련을 마치고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 천막으로 가는데 그녀의 분대원들은 별 인사 한 마디 없이 그저 그녀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하지만 낯 간지러운 환영 인사보다 더 뜨끈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카시야 역시 그들에 대해 뭐라 한 마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훈련에 대해 구시렁대지 않았고, 지쳐서 헥헥대지도 않았다. 그녀가 없는 사이에도 꾸준히 훈련을 해왔다는 반증이었다. 다른 부대원들이 아침 식사를 하는 카시야 분대를 흘끔대며 쳐다봤지만 그들은 음식에 코를 박고 먹어댈 뿐, 역시나 조용했다. 하지만 그런 무심한 분위기도 카시야를 향해 달려온 쿠론에 의해 여지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카시야!"

커다란 덩치의 쿠론은 멀리서부터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슬쩍 미소가 일어난 입가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카시야는 달려드는 그를 껴안고 그의 등등 툭툭 쳐주었다. 쿠론은 이미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으허, 으허어엉…. 괜찮냐, 너? 으어어엉…."

"괜찮으니까 이러고 있지."

몸을 뗀 쿠론은 카시야가 어디 부러지지는 않았는지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하지만 갓 운동을 끝내고 식사를 한 카시야는 열기가 폴폴 피어오를 뿐, 어디가 아파보이지는 않았다. 그제야 안심한 쿠론은 눈물을 훔쳤다. 카시야는 그를 향해 웃어보이며 그의 안부를 확인했다.

"너도 무사했구나. 전투가 두 번이나 있었다고 해서 걱정했다."

"우리 살아 돌아가기로 했잖아. 내 걱정은 안 해도 되는데 너, 네 몸 좀 아껴!"

걱정이라지만 쿠론이 처음으로 그녀를 타박했다. 그 모습에 왠지 웃음이 터져나온 카시야는 고맙다는 말 대신 쿠론의 어깨를 토닥였다. 간밤에 떠올렸던 '행복'이라는 것이 이런 작은 기쁨같은 것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타셀과 미하일, 분대원들, 쿠론까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린 누군가가 있었다는 게, 정말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곧이어 에르논이 합세한 케일런군이 떠오르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군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온몸에 퍼져갔다.

감동적인 재회를 마치고 카시야는 다시 타셀의 막사를 찾아갔다. 아무래도 간밤에 마나를 넘겨준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할 것 같았다.

"전하. 카시야 경이 찾아왔습니다."

"음. 들라 해라."

타셀은 고개를 들어 막사로 들어오는 카시야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기력이 많이 회복된 상태였다. 카시야는 정중하게 예를 올린 뒤 감사를 전했다.

"어제밤엔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몸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막사 안에는 드물게도 타셀 혼자였다. 붉은 머리 쌍둥이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니다. 몸이 좋아졌다니 다행이군. 움직이는 데 불편함은 없는가?"

"전혀 없습니다. 혹시 전하께서는 불편하지 않으신지요."

"자네가 걱정할만큼 약골은 아니야. 점심 전에 작전회의가 다시 소집될테니, 막사에서 대기하게."

"예. 알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카시야는 인사를 하고 뒤돌려다가 멈추었다. 에르논에 관한 것을 타셀에게는 말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음? 카시야 경?"

그런 그녀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타셀에게, 카시야는 그녀로서는 굉장히 드물게 머뭇거리다가 서서히 입을 떼었다.

"전… 하.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은 전하께서만 알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간결하게 말을 하는 카시야가 그녀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자 타셀은 계속 말해보라는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카시야는 자신이 할 말이 가져올 후폭풍을 예상하면 입이 잘 떨어지지가 않았다.

"마법사 에르논은… 알리스타스 공작에게 억지로 속박되어 있습니다."

"…뭐?"

역시나 타셀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어떻게…? 대마법사를 누가 속박할 수 있다는 말인가?"

타셀 역시 카시야가 처음 가졌던 의문을 똑같이 가졌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속박 마법을 걸었습니다. 그는 원해서 저기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지?"

"그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둘이 꽤 친했나보군."

타셀이 말에는 기묘한 불쾌감이 어려있었다. 방금까지 웃음기가 어려있던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카시야는 타셀이 저를 의심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에르논을 변호해주고 싶었다. 억울하고 원통한 삶을 산 에르논이 노예처럼 부려지다 비참하게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자신은 어쩌면 에르논을 통해 전생의 자신을 겹쳐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생각일 뿐, 휘하의 많은 병사를 에르논에게 잃은 타셀로서는 그게 자의든 타의든 상관없을 터였다. 더군다나 앞으로 있을 전투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이가 에르논에게 죽을지 모른다. 전장에서 많은 이를 지휘하는 타셀의 입장에서야 에르논은 가능하다면 죽여 없애는 쪽이 승리를 위해 이득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신이 타셀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일단 그 사실은 나 혼자 알고 있겠네. 그 속박을 풀 방법을… 아직 모르는 것이겠지?"

"…예.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얘기입니다."

"알았네. 나가보게."

타셀이 차갑게 내뱉은 말에 카시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막사를 나왔다.

타셀의 말대로 작전회의는 점심을 먹기 전 소집되었다. 분대장급까지 모인 막사 안은 사람으로 꽉 차서 비좁았지만, 긴장감이 팽팽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까지 너무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제, 카시야 경을 통해 에르논이 케일런군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대장과 연대장들이 모여 대응을 구상해본 결과, 에르논은 내가 막아보기로 했다. 미하일 경은 루크 페레이아를 확실히 막아주길 바라고, 아나클리프 경과 갤리언 경은 1부대가 정면으로 쓸고 내려갈 때 기다리고 있다가 양쪽으로 적들을 감싸주기 바라네. 저번 전투 때 당했던 놈들이니 아마 정면돌파를 할 확률이 높아."

태연하게 작전회의를 진행하는 타셀의 말에 모두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어리둥절해 있을 때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질문을 던졌다.

"전하. 죄송합니다만, 방금… 에르논을 전하께서 막으신다고 하신 게 맞습니까?"

모두의 눈이 타셀을 향했다.

"그렇다. 어디까지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데까지 해보는 수 밖에."

타셀이 마법을 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기사들이 무엇부터 물어봐야할지 몰라 어물거리며 웅성댔다.

"이제까지 황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숨겨왔지만, 전하께서는 마법을 쓰실 수 있습니다. 아마, 우리 군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마법사이실 겁니다."

지크의 설명에 모두가 놀란 눈을 했다.

이미 타셀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카시야도 타셀이 직접 에르논에 대적하겠다는 얘기에는 놀라워했다. 타셀이 에르논의 공격마법의 위력을 더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본인이 직접 나서겠다고 했다는 말은, 적어도 그의 마법에 밀려 죽음의 위협에 처하지는 않을 정도로 자신있다는 얘기여야 했다. 타셀이 죽는다면 이 전쟁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그건 절대 안 될 말씀입니다! 에르논 그 자의 위력을 전하께서도 보지 않으셨습니까! 전하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똑같은 걱정을 한 중대장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모든 기사와 병사들의 뇌리에 남은 에르논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특히 마지막에 본 안개숲의 마력 폭발은 절망적일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타셀이 대마법사의 위력에 필적할만한 마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는 눈치였다.

"우리가 반란 진압군이었을 때는 황실에서 파견된 마법사나 신관들이 있어 그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내가 나서는 것 밖에 별 수가 없다. 뭐,  어떻게든 막아보겠네. 내가 그를 막아낸다면 그쪽이 오히려 당황하겠지. 우리는 그 틈을 노린다."

시끌시끌하던 작전회의는 한 시간 넘게 진행되고서야 개운치않은 뒷맛을 남기고 끝났다. 다들 타셀이 나서는 것을 말렸지만, 그의 말대로 타셀이 아니라면 에르논을 막을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타셀이 어린 시절부터 몰래 익혀오던 마법의 종류는 주로 보호 마법이었다. 공격 마법을 연습할 곳도 없었고, 공격으로는 이미 검술에서 뛰어난 실력을 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개숲에서처럼 에르논이 대규모 마력 폭발을 일으킨다면야 다 막아낼 길이 없지만, 에르논 역시 그 일로 인해 크게 피해를 입었었다니 다시 시도할 확률은 적었다. 만약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스승 밑에서 본격적으로 배웠더라면 더 뛰어났을 마법 실력이었지만, 현재로서는 자신이 보호 마법에라도 실력을 쌓아뒀다는 걸 감사하게 여길 수 밖에 없었다.

"에르논이 주로 사용하는 대규모 공격 마법은 압박, 화염, 염동, 암흑, 파동 등입니다. 마력 폭발도 있기는 하지만, 카시야 경의 말로는 그가 아직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니 그것까지는 무리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개별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직접적으로 살상할 수 있습니다."

"대규모 공격에 대한 파훼는 문제 없다. 개별 마법이 좀 더 골치 아프지. 누구를 노릴지 재빨리 파악하기도 힘들고, 내가 알지 못하는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우리에게 유리한 점은, 이제 황제가 우리를 골탕먹일 수 없다는 거지. 우리에게 파견됐던 황실의 마법사들이 과연 우리를 도왔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전하의 안전입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전하께서 직접 에르논에게 대응하시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여전히 타셀의 신변을 걱정하는 갤리언 백작은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방법이 없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셀은 이제까지 안으로만 숨겨야 했던 자신의 힘을 펼쳐보일 때가 왔다는 것을 느꼈다. 황제에게 들키면 곧바로 살해당할 정도로 큰 힘이 자신의 아들에게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된 엘레나 황비는 그의 힘을 억누르는 약까지 먹이며 아들의 힘을 숨겼다. 그 정도로 그들 모자는 바람 앞의 촛불같은 목숨을 부지해왔다. 황제를 치기로 마음먹고 키렐에서 변방으로 출발할 때부터 마력 억제제를 끊은 덕에 그의 청회색 눈동자에는 보랏빛이 살짝 어려있었다. 에르논같이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가 될만큼의 어마어마한 마력은 가지지 못했지만, 그가 가진 것보다 훨씬 많은, 괴물같은 마나의 양으로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걱정말게. 절대… 우리를 농락하지 못하게 만들 테니까. 나머지 부분에서 경들이 잘 해줘야 하네."

"예! 알겠습니다!"

타셀의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확인한 수뇌부들은 속으로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겉으로는 그의 주군만큼 단단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작품 후기 ============================

기후변화가 피부에 와닿네요. 헉헉... 다행이 태풍은 빗겨갔다는군요.

끙끙끙끙 님 > 소제목을 번호 붙여가며 매번 적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가 올리면서 실수 할 것 같기도 하고, 목록으로 들어가서 봤을때 독자님들이 선택하기도 편할 것 같아서요. 제 개인적으로 소제목 하나로 잡혀있는 게 별로 안 예뻐 보이더라고요;

+ 징수니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