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홍의 카르마-45화 (45/134)

00045 마음 한 조각 =========================

그 날 하루 종일 바빴던 타셀은, 그러나 자신의 마음 한 조각이 딴 데 가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머리 한 구석에서 자꾸만 카시야 경에 대한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라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더 바쁘게 자신을 몰아대기도 했다.

하지만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쉬기 위해 자신의 막사로 들어온 타셀은 더 이상 그 생각을 미룰 수 없었다. 검집이 달린 허리띠를 풀어 침상 위에 던져 넣은 타셀은 시종의 도움으로 가죽 갑옷을 벗으며 카시야와 에르논의 사이를 끊임없이 곱씹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기분이 점점 나빠졌다. 도대체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자신의 충성스러운 기사라 믿었던 카시야가 에르논을 두둔한단 말인가. 공작에게 속박되어 있다는 것은 에르논 입장에서는 그다지 알리고 싶지 않은 치부일 텐데 그가 그것을 카시야에게 직접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과 카시야 사이에 형성된 것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신뢰가 에르논과 카시야 사이에 있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고작 이주일 남짓한 사이에 말이다.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지…?'

자꾸만 속이 갑갑해진 타셀은 시종들을 물리고 테이블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청회색 눈동자에는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듯 했다.

'카시야 경이 배신할 리 없어. 가져온 정보도 다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고 상세했다. 에르논을 두둔했지만, 다르게 보자면 그의 약점을 알려준 거지. 그래, 카시야 경은 여전히 나의 충성스러운 신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자신이 없어지는 것은 카시야가 타셀에게 얻는 게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녀는 귀족도 아니었고, 섀도 워커이면서도 타셀에게 대단한 도움을 받은 것도 없다. 신성 치료사 아르헨의 치료를 받게 해준 것을 은혜라고 생각했을 수는 있지만, 애초에 그녀는 죽음에 초연한 사람이었으니 자신이 죽었더라도 별로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녀를 살린 것도 그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안개숲에서의 정보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녀로서는 어쩌면 억지로 살려놓았다고 생각했을 수도….

물론 이 전쟁이 끝나고 자신이 제국을 통일하든 새 나라를 열든, 그녀에게는 그녀의 공에 적합한 포상을 내릴 생각이었다. 적어도 자작 이상의 작위와 영지를 내리고, 자신의 곁에 두어 여러 가지 일을 돕게 하고 싶었다. 특수 병사를 양성하는 일이나 자신 또는 자신의 비가 될 이의 호위를 맡겨도 좋으리라.

그녀에게 내릴 포상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타셀은, 자신이 그녀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한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카시야가 많은 공을 세운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평민 기사에게 주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큰 포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크가 걱정하는 대로 자신은 카시야를 지나치게 걱정했고 의식했다. 그녀에게 들이는 관심과 애정을 다른 귀족 기사에게 쏟는다면 더 큰 충성이나 보답을 받을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카시야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의 마음을 든든하게 잡아주는 뭔가가 있었다. 그녀와 많은 얘기를 나눠본 것도 아니고, 같이 뭔가를 해본 것도 아닌데, 그녀와 마주할 때마다, 그녀의 그 무심한 녹색 눈동자를 바라볼 때마다, 사실은 많은 이들의 목숨을 발판삼고 있다는 두려움과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에 흔들리고 있는 그의 마음이 어쩐지 단단해지곤 했다.

'왜일까….'

처음에는 그저 여자를 너무 못 봐서 그녀를 여자로 보고 있나 했는데, 아나클리프 성에서 아름다운 많은 영애들을 보고나서도 큰 변화가 없었다. 요정이 아닌가, 의심될 만큼 아름다운 알리시아 영애를 만났는데도 카시야를 대할 때 느껴지는 미묘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의심하던 그녀를 키렐의 연못에서 우연히 만나게 됐을 때부터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신뢰하게 되었다. 늘 절제되고 간결한 몸가짐, 단순명료한 말투, 머뭇거리지 않는 행동력, 건조하지만 믿음이 가는 눈빛,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무력, 자신의 능력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객관적인 시선…. 그녀의 모든 면면은 '여성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높은 곳에 홀로 서서 수천, 수만의 목숨을 좌우하고 있는 외로운 그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닮고 싶고 기대고 싶은 든든함을 보여주었다. 아무도 데려오지 못하던 모후를 데리러 떠나던 날도 그랬고, 그녀의 유골을 끌어안고 나타났던 그날 밤에도 그랬고, 모두가 시기 질투하던 연회 때도, 적진으로 향하던 새벽에도 그랬다. 그녀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타셀이 이제까지 봐온 그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자신은 그녀를, 처음부터 어딘지 모르게 애처롭고 안타깝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카시야가 여성이라는 것에 편견을 갖고 있어서 그런가보다고 생각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녀를 자신의 충실한 기사라고 인정한 이후에도 그렇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누구보다 강한 카시야가, 어떤 때에는 강렬하게 여자라고 인식되곤 했다. 지크와 미하일은 이상하게 그녀를 여성으로서는 보지 않던데, 자신은 그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어떻게 그녀를 공격해볼 수 있는지, 어떻게 그녀를 해코지할 생각으로 가득 찬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혼자만 보낼 수 있는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에게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하일이 의식을 잃은 그녀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피를 토했었는지 입 주변과 옷에 피가 묻어 있었고,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푸르스름해 보일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크게 다친 곳은 없다는데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 때문에 서둘러 아르헨을 데리고 왔을 정도였다. 아르헨이 그녀가 마나 운용법을 익힌 것 같다고, 몸에 남아있는 마나가 거의 없다고 했을 때는 또 얼마나 놀랐던가. 막사 안에 보는 이가 없었더라면 그 즉시 자신의 마나를 불어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녀에게 자신의 마나를 불어넣었던 어젯밤이 떠올랐다. 자신이 손댔던 그녀의 가슴 한복판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살짝 물컹하던 느낌까지도.

'하아…. 그러고 보면 그게 욕보인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혹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을까?'

감사 인사까지 하러 왔으니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애써 생각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찜찜함이 남았다.

그런데 어떤 선후 관계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또 카시야와 에르논의 관계에 대한 의심이 불쑥 들었다.

'혹시… 그 자식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뭐 이상한 짓을 당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한번 떠오르기 시작한 망상은 점점 걷잡을 수 없는 곳까지 번지고 있었다. 에르논에게 키스당하는 카시야, 에르논에게 만져지는 카시야, 에르논에게 억지로 안기는 카시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타셀은 가만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보초를 서는 병사에게 당장 카시야를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5분도 되지 않아 그녀가 그의 막사에 도착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그녀의 호흡이 거칠었다.

“쉬는데 불러서 미안하네만, 갑자기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서 말이야."

타셀이 한참 말을 고르다가 그녀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입을 떼었다.

"자세히 말하기 어렵다면 예, 아니오, 로만 대답해도 좋네. 혹시… 에르논에게 이상한 짓을 당했다거나… 억지로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했다거나… 그런 게 있나?"

그의 물음에 카시야는 무심히 과거를 곱씹어보는 것 같았다. 그 잠시 동안 타셀은 자신의 심장이 지나치게 큰 소리를 내며 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글쎄요. 특별한 일이랄 게 없었습니다. 그의 방에서 지내면서 먹고, 자고, 가끔 책을 읽고, 씻고…. 아, 그러고 보니 제가 목욕하고 있을 때 에르논이 들어온 적은 있었습니다만, 뭐 그 정도로 별 일이 없었달까요."

"뭐?"

타셀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거기에 오히려 카시야가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지금 자네 말은 그러니까, 자네가… 다 벗고 씻는데 그 자가 들어왔다는 말이야?"

"예."

"그, 그래서…! 설마, 무슨 짓을 당한 건…."

"아니오. 저를 좀 놀라게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별 신경 쓰지 않았더니 김이 샌 모양이더군요. 알몸이야 좀 보였지만 별 일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카시야가 지나치게 무덤덤해서 타셀은 여성이 남성에게 알몸을 보이는 일이 별 일 아닌가 싶어졌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 카시야가 알몸으로 서있는 상상을 하니, 그게 별 일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혹시, 그의 목을 원하면 말하게. 모가지 정도는 남겨서 올 테니까."

"예?"

카시야는 왜 대화의 방향이 그쪽으로 틀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하…. 전투 중에 적군의 신병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전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지만, 제가 감히 청하자면, 에르논은 죽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침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는 원해서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를 우리 쪽으로 끌어올 수 있다면, 그 편이 더 이득이 될 겁니다."

에르논을 두둔한 카시야의 발언은 그러나 타셀의 심기를 더 추락시켰다.

"노력은… 해보겠네."

눈빛이 험악해지는 것을 보니 타셀이 어딘지 단단히 화가 난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왜 화가 났는지 알 수 없던 카시야는 할 수 없이 인사를 하고 막사를 빠져나가려다가 문득 그가 에르논을 대적한다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한 마디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르논을 살려달라고는 했지만, 사실 타셀이 에르논에게 죽지 않게 더 노력해야 할지도 몰랐다.

"전하."

"…왜, 또 에르논에 관해 부탁할 게 있나?"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오라….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전하께서는 모두의 빛이 아니십니까. 이제는 저도, 전하께서 이룩하시는 나라에서 행복… 이라는 걸 꿈꿔보고 싶습니다."

왠지 그녀가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그녀도 그렇게 느꼈는지 조금 어색해 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주제넘었던 것 같습니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카시야가 다시 인사를 하고 막사를 나갔다. 그러나 타셀은 한참동안 그녀가 나간 막사의 문을 바라보았다. 막연히 '백성 모두를 위한 새 나라를 열겠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잘 그려지지 않던 나라의 모습이, '카시야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생각하자 순식간에 눈앞에 펼쳐지듯 떠올랐다.

'…피곤한가보군. 오늘은 좀 일찍 쉬어야겠어.'

타셀은 자꾸 떠오르려는 어떤 가정 하나를 억누르며 서둘러 침상을 향했다.

============================ 작품 후기 ============================

주말들 잘 보내셨나요? 새로운 한 주도 진카로 시작해주시면 감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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