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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46화 (46/134)

00046 전투 =========================

"에르논 님. 곁에 사람을 두시려면 부디 신원 파악부터 해주십시오. 그에게 혹시 우리의 중요한 정보를 흘리지는 않으셨습니까?"

카시야를 놓치고 온 루크는 에르논을 차갑게 바라보며 물었다.

"호위병에게 정보를 흘릴 게 뭐가 있습니까? 하지만 그가 정말로 적군의 첩자가 확실합니까?"

"저는 그렇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미하일 메레디스가 저를 잡는 것보다 그 자를 먼저 챙기더군요."

"글쎄요. 그것만 보고 첩자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요."

여전히 카시야를 믿고 있는 에르논을 보며 루크는 짜증난다는 듯 혀를 찼다. 그녀를 놓친 지금에서야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거야 나중에 보면 알 테고, 어쨌든 마법사께서 이번 전투에서 힘 좀 써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제 걱정 마시고, 기사님들이야말로 힘 좀 내주셔야할 것 같은데요? 언제까지 제 힘에만 매달리실 겁니까?"

에르논과 루크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쳐 스파크가 튀는 것 같았다. 주변에 서있는 병사들은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았다. 결국 루크는 별 대답도 하지 않고 막사를 나가버렸다.

루크가 나간 막사 안에서 에르논은 설마, 설마하며 카시야에게 걸어놓은 추적 마법을 통해 그녀의 위치를 확인했다. 루크의 말대로 그녀는 확실히 타셀군 진영에 있었다.

'아냐. 적군 쪽에서 보자면 루크에게 쫓기는 이를 일단 구하고 보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어. 그게 에텔이 타셀 쪽의 첩자라는 뜻은 될 수 없어. 그래. 절대 아닐 거야.'

에르논은 무심한 위로를 건네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적군이라면 자신이 대마법사 에르논인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태연할 수는 없을 터였다. 에르논은 카시야에 대한 믿음을 놓을 수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그녀를 구출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전투가 코앞이니 지금 당장 그녀를 구하러 갈 수는 없다. 데리고 온다 해도 루크가 그녀를 가만 두지 않을 것 같았다. 타셀 쪽에서도 그녀를 함부로 죽이거나 하지는 않을테니, 일단 전투가 끝나고 소강상태일 때 그녀가 있는 곳으로 공간 이동을 해서 그녀를 꺼내오자고 마음을 먹었다. 어딘가 안전한 장소에 머무르게 한 뒤, 나중에 공작성으로 돌아갈 때 그녀를 데리고 가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틀 뒤, 그녀에게 걸려있던 추적 마법이 파훼되었음을 느낀 에르논은 미친 듯이 불안해졌다. 상대 쪽의 누군가가 그녀에게 걸려있던 자신의 마법을 알아채고 끊어버린 것 같은데, 혹시 그 때문에 카시야가 첩자로 의심받고 죽임을 당하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볼 수도 없었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사라졌다가는 공간이동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안다는 게 탄로남은 물론, 제멋대로 행동했다고 공작에게 매질을 당할 게 뻔하다. 그저 그녀의 안전을 기도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자신의 처지가 저주스러웠다.

*

에르논과 타셀이 마주칠 전투가 다가오고 있었다.

카시야는 몸이 낫자마자 황성 및 신전으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떠나겠다고 타셀과 지크에게 건의했다. 케일런 진영에서 들었던 대신관의 살해 사건이 어떻게 된 건지도 알아봐야 했고, 황제 쪽도 최근 이상하게 조용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느새 아다마스 산맥의 회색 늑대와 비슷한 눈매를 하게 된 분대원들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부재중일 때도 꾸준히 훈련을 해온 덕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움직임이 훨씬 좋아져있었다. 이제는 뱃살이 나온 이가 하나도 없었고, 전신에 근육이 꽤 붙어 있었다. 단검술 역시 전보다 좋아져, 제 칼에 제 몸을 베이는 이도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가르쳐야 할 게 너무나 많았다. 카시야가 보기에는 분대원들 모두가 물가에 내놓은 애같이 너무나 위태롭고 아슬아슬해보였다. 시간이 아쉬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상태로 출격할 수밖에 없다.

"나와 스윈델은 신전과 피엔, 레오 팀은 아르카나, 마커스 팀은 아르테비엔에 퍼져 정보를 수집한다. 이 모든 사태를 만들고는 저 혼자 쏙 빠져있는 늙은 너구리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우리가 한번 파헤쳐보자고."

카시야의 굳은 입매와 차갑게 가라앉은 녹색 눈동자가 위험해보였다. 하지만 전에는 그런 그녀를 마녀니 악마니 매도했던 그녀의 분대원들은, 어느새 그녀와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특히 카시야가 적진에서 살아 돌아온 이래 스윈델은 카시야의 오른팔이라도 된 양 그녀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했다. 카시야는 그의 갑작스런 충성이 당황스러웠지만 스윈델로서는 그런 식으로라도 마음의 빚을 갚고 싶었다. 그는 아직도 죽으러 가는 것과 다름없었던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타셀군 전체가 전투 준비로 분주한 가운데 카시야 분대는 타셀의 앞에서 간단하게 출정 명령을 받드는 형식의 예를 취하고는 황성과 신전을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걱정마십쇼. 이번에도 분명 돌아올 겁니다. 보통 괴물이 아니잖습니까?"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타셀의 뒤에서 미하일이 중얼거렸다.

"내가 걱정하는 건 저들이 아니다. 우리지. 슬슬 밀고 들어올 때가 된 것 같은데…."

타셀의 예상을 기다린 마냥 그 다음날 새벽부터 울리기 시작한 뿔피리의 소리에 전군이 날카로운 긴장감 속에서 적군과 맞서 싸울 채비를 서둘렀다. 타셀이 그의 대검을 차고 말에 오르자 적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뿔피리가 다시 한 번 귓전을 때렸다. 그로서도 마법을 처음 쓸 전투라 마음가짐부터가 달랐다.

"전군! 전투태세! 칼리스토니아를 구하라!"

"우와아아아아!"

선봉에 선 타셀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출정명령을 외치자 군대 전체에서 우뢰와 같은 함성이 울렸다.

말발굽이 바닥을 박차며 땅을 진동시켰고, 여기저기서 요란한 뿔피리 소리와 고함 소리가 군사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성을 지니고서는 도저히 제정신인 채로 버틸 수 없는 곳이 바로 전쟁터였으니까. 개미떼 같은 양쪽 진영의 병사들이 서로 맞부딪힐 지점을 향해 달려갔다.

진득한 땀이 배어나온 병사들의 손이 검과 창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고 다들 짐승의 소리와 비슷한 포효를 내지르며 적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귀신들처럼 안광이 흐르는 눈동자들은 자신이 죽여야 할 상대를 찾았다. 곧이어 금속끼리 맞부딪치는 엄청난 마찰음과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지난 두 번의 전투에서는 보이지 않던 타셀이 선봉에 서서 대검을 휘두르자 기세 좋게 부딪쳐오던 병사들이 가을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스러져갔다. 그때 멀리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두 손을 하늘로 향해 뻗는 게 보였다.

"에르논!"

으르렁거리던 타셀은 다시 대검을 크게 휘둘러 주변을 정리한 뒤 미리 약속된 신호대로 검을 하늘로 향해 쳐들었다. 곧 그의 충성스러운 군대가 주변을 에워싸며 그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에르논이 뻗은 손에서부터 마치 벌떼가 날아오르는 것 같은 검은 어둠이 스물스물 피어나 타셀의 군대를 향해 다가왔다. '암흑'이었다. 암흑 마법은 적군만 눈앞이 깜깜해지게 만드는 마법이었다. 갑자기 시력을 잃은 병사들은 당황하다가 적군에게 죽임을 당하곤 했는데, 에르논의 입장에서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좋은 효과를 보는 마법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예상과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에르논의 손에서 뻗어나간 암흑이 주문을 외우는 타셀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며 타셀군의 그 어느 하나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타셀의 예상대로 당황한 것은 에르논과 케일런군이었다. 에르논의 마법을 막을 인물이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 설마, 2황자가 마법사…?"

케일런군의 지도부조차 당황한 가운데 주군이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있다고 확신한 타셀군의 병사들은 더욱 용맹하게 상대를 찍고 베고 찔러댔다.

에르논은 이번엔 화염으로 좀 더 직접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불덩이의 열기가 큰 공격력을 갖기도 했지만 시각적으로도 두려움을 자극하는 마법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타셀이 배리어를 만들어 내리 쏟아지는 불기둥을 막아냈다. 튀어나간 화염이 오히려 케일런군을 공격했다.

창백해진 에르논이 기사 크리스탄에게 소리 질렀다.

"타셀이 마법사라는 얘기는 없었잖아! 이걸 막을 정도면 보통이 아니라고!"

"저, 저희도 금시초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이 정도 정보도 없이 무슨 전쟁을 한다는 거야! 멍청한 놈들아!"

그러나 아무리 소리 질러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에르논은 자신의 공격 마법이 막히는 것을 상상해본 적조차 없었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했다. 자신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어디, 이것도 막아봐라."

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앙다문 에르논은 연이어 압박과 파동을 통해 타셀군을 흔들고자 힘을 썼다. 병사들의 몸을 짓누르는 압박과 대기 자체가 흔들리는 듯한 파동은 암흑이나 화염보다 훨씬 많은 마나를 써야했지만 그만큼 공격성이 좋았다. 에르논은 타셀이 거기까지 막아낼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대로, 파동 마법이야말로 타셀이 기다리고 있던 공격이었다. 타셀은 입가를 비틀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압박 마법이 내리누르는 힘을 막으며 벼르고 벼르던 주문을 외쳤다.

"콘트라플록타티오!"

에르논이 시전한 파동이 타셀의 반(反)파동 마법에 튕겨져 그대로 케일런군을 후려쳤다.

"으아아아악!"

과거에는 타셀군을 날려보내던 무시무시한 마법이, 이번에는 그 힘 그대로 케일런군을 쓰러트렸다. 아니, 그대로가 아니가 오히려 더 증폭된 힘으로 휩쓸었다. 에르논도 괴물 같은 마력과 마나를 소유했지만, 타셀은 그보다 더한 마나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르논이 타셀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것은 마력이었지만, 그것을 가지고 공격을 하려면 마력 폭발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는 과연 그것이 먹힐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죽는 게 나을 정도의 채찍질을 당하겠지….'

에르논은 피가 터져 흐르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또 마력 폭발을 쓰게 된다면, 자신 역시 멀쩡하지는 못할 터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없었다. 전투에서 패한 주제에 멀쩡하게 돌아간다면, 알리스타스 공작이 자신을 용서할 리가 없다. 마력 폭발로 피해를 입는 것이 채찍질보다 훨씬 더 엄청난 고통을 수반했지만, 채찍질 당하는 것만은 사양이었다. 그것은 그의 자존감마저 갈가리 찢어발겼으니까.

에르논은 타셀군이 반파동마법에 쓰러진 케일런군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모습을 바라보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방금 압박과 파동을 시전한 탓에 마나의 소모가 심했지만, 마나가 차오르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잘하면 오늘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에르논은 서서히 몸 안의 마력을 가슴 한가운데로 모으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기가 모여들어 고통스러웠지만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버텨내야 했다. 타셀군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에르논의 머릿속에 카시야가 떠올랐다.

'에텔은 무사할까? 하긴, 뻔뻔한 녀석이니까, 지금쯤 타셀군에서 용병 노릇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녀를 떠올리자 온몸이 불덩이 같아진 와중에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타셀의 얼굴이 분간이 갈 정도로 다가온 상태에서, 에르논은 마지막 힘을 모두 쥐어짜내 마력폭발을 일으켰다.

"엑스플로시오!"

그의 몸에서 엄청난 빛이 터져나갔다.

============================ 작품 후기 ============================

여러분. 월요일 잘 보내셨나요? 잠깐이지만, 여러분이 기다려 마지않는 에르논 데려왔습니다.

1. 타셀이 고민하는 상황같은 걸 '입덕 부정기'라고 하는군요.(감탄!)

2. 타셀이 카시야의 여성성 운운하던 부분 : 다른 분들께서 답해주셔서 제가 덧붙일 말이 많이 없네요. 중세틱한 시대 배경을 참작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시대 안에서 카시야가 이뤄나가는 것들을 기대해주세요.

3. 에르논 주식 사신 분들 엄청 많으시네요. 그런데 어쩌죠? 또 당분간 에르논 보기는 힘들어요;(다 때가 되면 나옵니다. 기다렸다 먹는 사탕이 맛있죠. 기다렸다 나오는 에르논을 물빨핥 해주세요.)

4. 쾅쾅쾅쾅 님 > 스윈델이 엄청 쫄았습니다. 개과천선 하겠답니다.

5. 까킁 님 > '작가님 살려주세요. 에르논이 보고싶어요...에...르..ㄴ..ㅗ..ㄴ..' <- 오! 나 이거 알아요! 범인은 에르논이군요. 다잉메시지 맞죠? ㅋㅋㅋㅋ

+ 징수니 님, 백비비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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