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7 신전(1) =========================
신전은 황성 아르카나 근처의 를뤼엔이라는 소도시에 있었다. 히드레이 교의 신전은 제국 뿐만 아니라 근처 다른 나라에도 있었지만, 칼리스토니아 제국의 황성 옆에 있는 를뤼엔은 성지로 여겨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곳의 신전은 히드레이 교 신전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와 권위를 자랑했다.
주신 헤바와 사랑과 용서의 여신 알리나를 섬기는 히드레이 교의 를뤼엔 신전에는 이 종교의 최고 권위자인 알리나 성녀와, 그 밑으로 한 명의 대신관, 스무 명의 신관, 수백 명의 사제가 머무르고 있었다.
"알리나 성녀? 아까는 알리나가 신 이름이라며?"
를뤼엔 근처의 숲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앉아 늦은 저녁을 먹으며 카시야가 스윈델에게 물었다.
"네. 신 이름이죠. 성녀는 그 알리나의 현신이라고 믿어집니다. 성녀가 죽으면 새로 나타나는 성녀에게 알리나가 계속 깃들게 된다고들 하죠."
"얘기만 들으면 성녀라는 게 알리나의 숙주같이 느껴지는데?"
"그,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천벌 받아요!"
스윈델은 마치 누가 듣기라도 하는 양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카시야의 입단속을 했다. 그가 아무리 카시야에게 충성한다고 해도 그 역시 칼리스토니아 제국의 신실한 백성 중 하나였다.
카시야는 전생에 보고 겪었던 종교의 덧없음을 떠올렸다. 자신이 보기에는 전부 똑같은 종교 같았는데, 서로들 이교도라고 하며 칼과 총을 겨눴다. 그 종교의 신은 서로 사랑하라고, 서로 귀히 여기라고 가르쳤다는데, 그들 중 누구도 그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절대자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려고 과잉 충성하는 것 같았달까.
하지만 이 세계에서 종교가 갖는 포지션은 전생에서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 카시야 본인도 체험했지만, '신성력'이라는 힘이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인 것이다.
"그 신성력이라는 거 말인데, 그건 히드레이 교 사제 정도만 되면 쓸 수 있는 힘인가?"
"사람에 따라서는요. 모든 사제가 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사제가 얼마나 많은데요. 하지만 신관급은 다들 신성력을 쓸 수 있다고 하더군요."
"난 아르헨 치료사님의 신성력 밖에 모르는데, 신성력이라는 게 또 어디 쓰이는 거야?"
"마법이랑 비슷한 부분이 있고요, 주로 치유에 쓰이고, 인간에게 깃든 사악함을 물리친다고도 하더라고요. 미래를 보고 예언을 하기도 한다는데, 사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평민들은 평생 살면서 신성력을 목격하기가 어려워요. 저 역시 한 번도 본 적은 없거든요. 이번 기도회에서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네 말대로 일반 백성은 신성력 한 번 목격하기 힘들다면, 왜 다들 그렇게 히드레이 교를 믿는 거지?"
"뭐….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기댈 곳 하나는 있어야 하잖아요?"
스윈델의 시니컬한 대답에 카시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내일 아침 이 숲을 나가면 바로 를뤼엔입니다. 어쩌실 생각이세요?"
"우선은 를뤼엔을 돌아다니면서 풍문을 수집하고, 이틀 후부터 열리는 기도회에 참석하러 촌에서 올라온 무지렁이 흉내를 내면서 신전에 들어가 보도록 하지. 대신관이 죽은 지 꽤 됐는데 새로운 대신관은 뽑히지 않는 건지도 알아봐야 할 것 같고, 대신관의 죽음에 대해 신전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좀 파악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황제와 대신관만 듣는다는 신탁이 진짜 내려온 건지, 도대체 그 내용이 뭔지가 가장 궁금하지만…."
말을 마친 카시야가 바닥에 깔아놓은 모포 위에 벌렁 드러눕자 스윈델 역시 모닥불 위에 땔감을 더 얹고 주변을 정리한 뒤 누웠다. 모닥불은 타닥 타닥 하는 소리를 내며 숲에 내려앉은 밤을 장식했고, 멀리서 알 수 없는 짐승이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한참 말이 없던 스윈델이 입을 열었다.
"그 때….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었습니까."
"음? 뭐가?"
"…에르논한테… 잡혀갈 때요."
"첫째, 나도 그때는 에르논인 줄은 몰랐고, 둘째, 누구 하나라도 반드시 무사하게 돌아가야 했으니까. 그게 우리 임무였잖아. 네가 도망가고 내가 그를 잡아두는 게 임무를 완수할 확률이 더 높았거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그런 생각해서 뭐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고 죽을 일이 안 죽고 끝나나?"
"하지만…! 인간이잖습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스윈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카시야는 문득 그가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이 부러워졌다.
"왜… 죽음이 두려운데?"
"예?"
카시야의 질문에 스윈델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죽음이 두렵냐고."
"살아있는 것들은 다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스윈델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면서도 카시야를 자신 없게 쳐다보았다. 그녀가 뭔가 더 깊은 뜻이 있어서 묻는 것인가 싶은 듯했다. 하지만 카시야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렇군."
더 긴 답을 기다리던 스윈델은 아무 말이 없는 카시야를 떨떠름하게 쳐다보다가 눈을 감고 자는 듯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결국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돌아누웠다.
'나는 살아있는 게 아닌가보구나.'
카시야는 스윈델의 말에 이런 결론 밖에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생각에 왠지 가슴께가 아렸다. 숨이 막힐 것처럼 속에서부터 뜨거운 뭔가가 콱, 하고 솟구쳐 괴로운 느낌이 들었다. 분명 몸 어디가 안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감정만으로도 물리적인 충격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러나 그게 무슨 감정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음날 새벽, 어스름이 걷히기 시작한 푸른 산길을, 허름한 쥐색 로브를 걸친 카시야와 스윈델은 말을 타고 터벅터벅 내려갔다. 얼마 전까지도 홧홧했던 여름의 열기는 어느새 꽤 식어 새벽은 제법 싸한 기운이 흘렀다. 둘은 아무 말도 없이 건조한 눈으로 를뤼엔의 경계를 넘었다. 신전이 있는 곳이기 때문인지 도시 전체는 어딘지 모르게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건물들이 꽤 밀집한 를뤼엔의 중심부에 닿자 해는 이미 완전히 떠 하얀 도시를 신의 은총처럼 비추고 있었다. 거리와 골목에서 집 앞을 쓰는 빗자루 소리가 정결한 도시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카시야가 를뤼엔으로 급하게 출발한 것은 이틀 후에 제국 곳곳에서 신자들이 몰려드는 기도회가 있기 때문이었다. 신전에 다가갈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덕분에 를뤼엔의 여관에는 남은 방이 거의 없었다. 돈이 없는 신자들은 를뤼엔 외곽에서 노숙을 하거나 천막을 치고 기도회를 기다리기도 했다. 기도회가 시작되면 신전은 신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고, 다 수용하지 못한 신자들은 신전 근처에 빼곡히 자리를 깔고 앉아 멀리서나마 알리나 성녀 혹은 대신관의 축복을 받고자 했다.
를뤼엔 내에 떠도는 풍문을 수집하기 위해 카시야와 스윈델은 조금 비싼 값을 주고 여관의 방 하나를 겨우 잡았다. 침대 한 개에 의자 하나가 겨우 있는 조그만 방이었지만 예전에 피엔에서 묵었던 방값의 세배를 치러야 했다. 말 두 마리를 마구간에 맡기는 값은 추가로 줘야 했다.
"다들 비슷한 차림새라 우리가 눈에 띄지는 않을 것 같네요."
스윈델은 길거리를 둘러보며 살핀 결과 자신들의 모습이 아주 평범하다고 생각하고 조금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카시야의 생각은 달랐다.
"에르논에게 당하고도 안일한 생각이냐? 우리와 똑같이 로브를 쓴 감시자가 있을 수도 있어. 최대한 기를 감춰라. 앞으로 너와 나는 시골에서 올라온 독실한 히드레이 교도 남매인거다. 내 이름은 에텔, 네 이름은 르윈이라고 하자. 아버지가 병환이라 헤바 신의 가호를 빌러 온 거야. 알았나?"
"예. …그런데 남매면, 누가 동생인 겁니까?"
스윈델이 눈치를 보며 묻자 카시야가 건조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저기…. 저도 올해 스물두 살로 분대장님과 동갑입니다만."
"그래서?"
"…아닙니다, 누님."
카시야는 별 생각도 없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눈빛에 지레 겁먹고 식은땀을 흘리던 스윈델은 재빨리 '누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하긴, 생각해보면 아무리 연기라고 해도 이 수라같은 분대장을 이름으로 부르거나 편하게 대할 수는 없을 것 같으니, 자신이 동생역을 맡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많지도 않은 짐을 푼 둘은 점심식사를 하기로 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여관의 식당은 이미 꽉 차 있는데다 다들 조용히 식사하는 분위기라 그들은 여관 근처의 떠들썩한 식당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스윈델의 말처럼 지방에서 부지런히 올라온 평민 신도들의 차림새는 다들 비슷했다. 를뤼엔 근처까지야 편한 차림으로 왔겠지만 를뤼엔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자신의 허름한 차림새를 가리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을 갖기 위해 어두운 색의 로브를 뒤집어썼다. 를뤼엔 전체가 검은색 내지는 쥐색 로브를 뒤집어 쓴 히드레이 교 사제들로 뒤덮인 것 같은 상황 덕분에 식당으로 들어선 카시야와 스윈델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식당 주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이신가요?"
식당 주인의 물음에 카시야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니 그가 근처에 빈 테이블로 안내해주었다. 정식 두 개를 시킨 뒤 카시야와 스윈델은 귀를 열고 주변의 얘기에 집중했다.
"이번에는 성녀님을 볼 수 있을까?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신전 안에 들어가려면 밤새 줄을 서야 하니, 아버지 체력으로는 무리예요. 바깥에서 신관님이라도 볼 수 있으면 만족해야죠."
"참, 아직 새로운 대신관님은 뽑히지 않았다지?"
"그러게요. 별 소식이 없네요. 그나저나… 진짜로 2황자가 대신관님을… 그랬을까요?"
"설마…. 2황자는 심지어 국경 쪽에 있다던데? 대신관님은 황궁에 들렀다 돌아가다가 습격을 당했다잖아. 대신관님쯤 되시는 분이 웬만한 자객한테 당하지는 않으셨을 거고…. 기다려보면 알겠지. 천벌 받는 놈이 범인 아니겠어?"
"도대체 대신관님을 왜 죽였을까?"
"윗분들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알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신관님을 죽이다니…. 누구 짓인지는 몰라도 곱게 죽진 못할 거여."
"새 대신관님은 어떤 분이 되실까?"
"혹시 이번 기도회 때 성녀님께서 발표하지 않으시려나?"
역시나 사람들의 관심은 대신관의 죽음과 새로운 대신관의 임명 쪽에 맞춰져 있었다. 성녀가 신전의 최고 권위자이지만 실질적으로 신전의 대외적인 일을 하는 것은 대신관이었다. 성녀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신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에게 얼굴을 비추는 것도 성녀보다는 대신관의 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신관의 거취에 더 관심이 많았다.
"르윈. 혹시, 대신관은 어떻게 임명되는지 알아?"
카시야가 스윈델에게 물었다.
"대신관은 성녀가 지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성녀가 대신관을 지목하면 신전 내부적인 검증 과정을 거친다는데 그건 비밀에 부쳐져 있고요. 거기에 대해서도 소문이 많아요. 고난 수행을 한다느니, 신성력 검증을 한다느니…. 하지만 아무도 모르죠."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녀와 대신관은 어느 정도의 위치인거야? 황제보다 더 위라고 생각하나?"
"성녀는 당연히 황제보다 높죠. 신이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대신관은 황제와 비슷하거나 그 조금 아래예요. 결국 히드레이 교 신전도 제국 안에 있는 거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 존경하는 순서로 보자면 대신관이 황제 위겠죠."
"도대체 황제는 제국을 완성 하고나서 한 일이 뭐야?"
"지금 진짜 몰라서 물어보시는 겁니까?"
"…아니다."
카시야도 스스로 멍청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 작품 후기 ============================
1. Ryumafld님 댓글 중 '...포로로 잡혀수...'를 보고 '수'가 '서'의 오타가 아니라 공, 수 할 때의 '수'라고 읽은 저 자신에게 한동안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언제 이렇게 돼버렸을까...
2. 에무룩... <- 이거 왜 이렇게 귀엽죠??
+ 하늘제비꽃 님, 노란범 님, 바바라1 님, 백비비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