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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48화 (48/134)

00048 신전(2) =========================

식사를 마친 후로도 카시야와 스윈델은 를뤼엔의 기념품 가게와 카페, 음식점, 시장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주고 받는 얘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신성도시로 모여든 제국민들에게 황제는 인기가 없었다. 특히 대부분이 대신관의 죽음에 황제가 연루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2황자 전하께서 의심받을까봐 걱정했는데."

"뭐든지 의심스러운 초기에야 거짓말을 믿지 않지. 하지만 지속적으로 그 거짓말을 유지하면 결국 그게 먹혀. 황제가 노리는 게 그거겠지. 아직 마음을 놓을 일은 아니다."

스윈델은 매사 경계를 늦추지 않는 카시야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너무 긍정적인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그때 카시야가 어떤 기념품점 앞에 멈춰 섰다.

"응? 뭔가 있습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다…."

스윈델의 시선을 느낀 카시야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다가 결국 도로 기념품 가게로 향했다. 그리고는 매대에 놓여있던, 히드레이 교 문양이 끄트머리에 수놓아진 빨간 리본을 하나 집어 들고는 선물 포장까지 해달라며 돈을 치렀다. 스윈델의 눈이 둥그레졌다.

"분대자… 아니, 누님…께서 리본을 사실 줄은 몰랐는데요."

그녀를 향한 충성심과는 별개로 리본을 들고 있는 카시야를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스윈델의 시선을 무시하며 카시야는 품 안에 포장된 리본을 집어넣었다.

'루나엔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못 본 지도 꽤 오래 된 주근깨의 소녀를 떠올리며 카시야는 피식 미소 지었다. 자신이 엘레나 황비를 구출하기 위해 떠나던 때 약초 주머니를 건네주었던 루나엔에게는 늘 뭔가를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허 참…. 누님이 남자였다면 애인이라도 있나 할 텐데 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님이 빨간 리본을 머리에 두르실 것 같지도 않고…."

"신경 쓰지 마라."

카시야는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물고 가던 걸음을 이어갔다.

기도회가 열리는 날 신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전날 밤부터 줄을 서야한다는 얘기를 들어서 카시야와 스윈델은 전날 밤에 신전을 향했다. 그러나 그들이 들었던 어드바이스는 기도회를 경험하지 못했던 이가 한 말임이 틀림없었다. 신전 앞에는 이미 그 전날부터 줄을 선 이들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었다. 맨 앞 쪽에 앉아있는 이들은 3일 전부터 돗자리를 깔고 있었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었다.

"이런…. 이러다가 신전 안으로는 못 들어가겠는데?"

신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줄을 서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 녹아들며 신전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신전은 황궁보다는 작았지만 카리나 궁보다는 큰 규모였다. 궁과 다른 것은 경비병이 없다는 것 정도였다.

"경비를 서는 병사가 없군."

"누가 멍청하게 신전을 공격하겠어요?"

"지금 우리만 해도 몰래 신전 안으로 침투하려고 하잖아."

"아…. 그, 그게…. 누님. 꼭 그래야할까요? 천벌 받을지도 몰라요."

스윈델은 진심으로 천벌을 받을 거라고 믿는 눈치였다.

"난 이미 천벌을 받아서 괜찮아."

"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만 껌뻑거리는 스윈델을 보며 자조적으로 웃어보였을 뿐인 카시야는 인적이 뜸한 신전의 뒤편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기도회를 위한 신전 입장은 정문 밖에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녀가 가끔 기도를 하러 들른다는 신전 안쪽의 첨탑 부근은 지나가는 개 한 마리 없었다. 카시야는 담 벽에 무심하게 갈고리를 던져 고정시키고는 제대로 고정됐는지 확인하느라 밧줄을 두어 번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너는 기도회 중 신전 주변을 살펴. 절대 튀는 행동은 하지 말고. 혹시 내가 이틀 뒤에도 나오지 않으면 먼저 피엔으로 향해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또 자신만 먼저 보내려는 카시야의 말에 스윈델은 경직된 얼굴로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시야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스윈델. 네가 나를 걱정해주는 건 고맙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잊으면 안 돼. 우리는 시골에서 올라온 에텔과 르윈이 아니라 타셀 전하의 특수 분대원들이기 때문이다."

스윈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그럼 차라리 제가 안으로 잠입하겠습니다. 분대장님이 밖에 있다가 제가 안 나오면 피엔으로 먼저 가십시오."

큰맘 먹고 비장하게 내뱉은 스윈델의 말에 카시야가 코웃음 쳤다.

"건방진 소리 하지 마. 내가 안에 들어가는 이유는 네가 안에서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아직 안 되기 때문이야. 더 이상 이견 받지 않겠다. 나중에 보자."

그 말을 끝으로 카시야는 갈고리에 달린 밧줄을 잡고 능숙하게 벽을 타고 올라 뒤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벽 너머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던 스윈델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는 신전의 정문 쪽으로 향했다.

*

"알리나 님. 내일은 하루 종일 피곤하실 테니 오늘은 일찍 쉬시지요."

하얀 로브를 입은 여자 신관이 어두운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한 여인에게 간곡하게 부탁하듯 휴식을 권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저의 모든 행동은 알리나 여신의 의도이시니, 저는 거기에 어떤 피로감도 느끼지 않습니다. 유지니아 신관이야말로 일찍 쉬도록 해요. 어깨에 피로가 쌓였군요."

신관을 향해 몸을 돌린 여인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살짝 쓸었다. 그 작은 행동으로 신관은 제 몸이 훨씬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럴 때마다 눈앞의 '인간의 형상을 한 여신'에게 경외감을 느꼈다. 이렇게나 숨 쉬듯 자연스럽게 신성력을 쓰는 이는 전 제국에 알리나 성녀밖에 없었으니까.

"그럼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꼭 불러주십시오."

마지막까지 충성스러운 신의 종을 향해 여인은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신관이 자리를 뜨자 여인은 다시 창가로 다가가 어두컴컴한 밖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오팔 같은 눈동자는 특정한 어느 한 점을 주시하고 있었다. 방금 신전의 담장을 넘어 들어온 그 사람을 말이다. 그녀가 기다려온 사람이었다. 이 세계의 인과율에 지배받지 않는 존재. 예언할 수 없는 존재. 그리고 이 세계의 많은 것을 바꿔놓을 존재. 언젠가 만날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대신관의 죽음으로 만나는 날이 앞당겨진 것 같았다.

두어 달 전 전신을 찌르르 흐르던 주신 헤바의 완전한 권능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인간들의 삶에 직접적으로는 관여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지배하는 주신이, 아주 드물게도 인간계에 직접 간섭했다. 몇 백 년에 한 번 씩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그런 일을 일으키는 신의 의도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필요했으니 행해졌을 것이라고만 여길 뿐이었다. 그렇게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을 경험을 한 이는 결국 알리나 성녀를 만나게 되어 있었다. 처음이 아닌 일이긴 하지만 멀리 있는 아버지 신의 흔적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심호흡했다.

그녀는 창가의 촛불 빛은 물론 자신이 있는 방까지 이어진 계단 벽에서 타오르는 횃불도 좀 더 밝게 돋웠다. 자신에게 오는 길에 불편함이 없게 하고 싶었다. 그녀는 방금 벽을 타고 넘어 들어온 이가 곧바로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입고 있는 옅은 푸른색 드레스의 주름을 잘 펴고 창가에 기대서서 그가 제 방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리는 기척이 났다. 알리나 성녀는 그 하나하나의 기척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가만 쳐다보았다. 마침내 나무문이 열리며 인영이 어른거렸다.

"어서 오세요. 드디어 주신(主神) 헤바의 수수께끼를 만나 뵈옵니다."

너무나도 수상한 첨탑의 계단을 올라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듯 그 끝에 있는 문을 열고 발을 들인 카시야는 자신을 맞이하는 목소리에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너무나 평온한 얼굴을 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푸른 기운이 도는 은발이 허리 아래까지 닿았고 눈동자는 빛에 따라 여러 색으로 반짝이는 유백색이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그저 아름다운 아가씨일 뿐이었다. 물론 그것으로 충분히 신비로워보였지만.

"설마….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나요?"

"네.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당신이 혹시… 알리나 성녀?"

"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시야는 그녀가 자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고, 전 제국에서 가장 추앙받는 '살아있는 신'이 자신을 만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물론이죠. 당신은 헤바께서 제게 내리신 수수께끼인 걸요. 하지만 여성분이실 줄은 몰랐네요."

자신을 바라보는 알리나 성녀의 눈매가 불쌍한 것을 보는 것처럼 서글퍼지자 카시야는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알리나는 조용히 카시야에게 다가가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굉장히 위로받는 느낌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그 희고 고운 손에 볼을 살짝 비볐다.

"많이 힘들죠?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당신이 이겨내야 할 카르마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요."

카시야는 알리나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갑자기 솟구치는 억울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카시야가 매달리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떼었지만 이내 격해진 호흡 때문에 말을 계속 이을 수가 없었다. 카시야는 제 속에서 온갖 감정이 뒤섞여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꼈다. 만약 눈앞의 이 성녀가 정말로 자신의 전생과 죽음, 갑자기 맞게 된 현생을 다 알고 있다면 내가 왜 다시 살아났어야 했냐고 따져 묻고도 싶었고, 어떻게 하면 이 윤회를 벗어날 수 있냐고 답을 구하고도 싶었다.

알리나는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는 듯 슬픈 미소를 지으며 카시야가 진정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차라도 한 잔 하시겠어요? 페를로냐 차는 기분을 진정시켜준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알리나가 카시야의 손끝을 붙들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카시야는 그 미약한 힘을 거부하지 못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카시야는 엉망진창으로 흔들리던 제 중심을 잡아 쥐듯 어금니를 꽉 물어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손바닥으로 서둘러 얼굴을 문지르고는 조용히 찻잎을 차 주전자에 떨어트리고 있는 알리나를 관찰했다. 뜨거운 물을 끓일만한 화로는 보이지 않는데 차 주전자로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물이 쪼르르 따라졌다. 방 안에는 이내 청량한 차향이 퍼졌다. 알리나는 유백색의 조그만 찻잔에 차를 따라 카시야의 앞으로 밀었다.

"드셔보세요. 마음이 한결 편해질 거예요."

카시야는 그녀의 말을 얌전히 따랐다. 아닌 게 아니라 뜨거운 차임에도 속이 맑게 개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과 마음이 한결 맑아지기는 했지만 알리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질문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다행이 알리나가 대화의 물꼬를 텄다.

"궁금한 게 많지요?"

"…네. 저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중요한 건 다 알고 있죠. 엄청난 카르마를 진 분이라는 것. 신의 권능으로 차원을 넘어 죽음을 거스른 분이라는 것. 이겨내야 할 카르마가 거대하지만, 능히 그럴만한 힘이 있는 분이라는 것까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카르마?"

카시야의 눈은 또다시 혼란으로 흐려졌다. 하지만 알리나는 평온한 얼굴로 제 몫의 차를 홀짝였다.

"카르마. 그것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말이에요. 당신이 지은 죄에 대한 갚음이라고 볼 수도 있고, 당신이 이겨내야 할 굴레라고 볼 수도 있고, 당신이 이뤄내야 할 운명이라고 볼 수도 있죠. 왜 하필 당신인지, 그것은 저도 몰라요. 주신의 뜻을 한낱 종이 다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주신께서는 당신을 통해 당신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많은 이를 깨우치고자 하시는 것 같다고 짐작할 뿐이에요. 사실 이런 경험을 하는 이가 흔치는 않지만 아예 없었던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당신 이전의 마지막 '죽음을 거스른 이'는 이 세계의 많은 부분을 바꿔놓았습니다. 당신이 이런 힘든 길을 가는 것은 당신 자신 때문만이 아니라 이 세계의 많은 이들의 운명과 연관되어 있어요. 당신은 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신에게 선택받은 건지도 모르죠."

알리나의 설명에도 카시야의 얼굴은 밝아질 수 없었다. 결국 왜 이렇게 됐는지는 알 수도 없고 무를 수도 없다는 말이니까. 그저 살아나가야 할 뿐.

"이 세계를 구원하기는커녕, 저는 제가 살아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많이 혼란스러울 거예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입니다. 헤바께서 마련해주신 길을 당신은 걷고 있으니까요."

카시야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 혼란이 가시지 않은 눈을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방 안의 촛불의 일렁임에 따라 카시야와 알리나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 작품 후기 ============================

비축분도 다 떨어졌는데

왜 글을 쓰려고만 하면 졸음이 쏟아질까요;;;;

과연 일일연재는 무사히 마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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