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9 신전(3) =========================
카시야는 흐트러진 호흡을 바로 잡았다.
"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성녀님의 말씀을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 상황을 완벽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살아있으니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세계에서 눈 뜬 게 신의 의도라면, 제 삶의 끝에 있는 게 적어도 파멸은 아니라고 믿어도 되겠습니까?"
"그것 역시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만, 저는 당신이 헤바가 주신 길을 벗어나 파멸로 향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고 있어요. 모든 고난을 이겨낼 힘이 당신 안에 존재하니까요."
너무나 모호하고 결국 카시야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는 듯한 말이었지만, '너에게는 이겨낼 힘이 있다.'는 말이 그나마 용기를 주었다. 게다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 생겼다는 사실에 의외로 후련한 기분을 느낀 카시야는 다시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럼, 저는 제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 보겠습니다. 신이 뭘 원하시는지는 두고 보도록 하죠. 그리고 그것을 위해 알리나 성녀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대신관의 일 말씀인가요?"
역시 신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는 카시야가 할 말을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네. 먼저 말씀해주시니 여쭤보기가 편하군요. 신전에서는 설마 그게 2황자 전하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후후후. 그럴 리가요. 그는 황제에 의해 죽었습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성녀가 단정적으로 말하니 카시야라 하더라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정말입니까? 어떻게 죽었는지도 아십니까?"
"네. 그는 성물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를 보호하는 신성력을 깨트릴 수 있는 무기는 성물 밖에 없거든요."
"신전에서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고요?"
"네. 알고 있죠. 황제는 굉장히 오만해요. 신에게 빌린 힘을 휘둘렀을 뿐인데, 그 힘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있죠. 탐욕과 오만이 그의 눈을 가리지 않았더라면, 신께서 그 힘을 왜 그에게 내렸는지 헤아릴 지혜가 있었더라면… 제국을 통일한 위대한 황제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카시야는 대신관을 죽인 성물이 소문의 그 신검임을 눈치챘다. 신검을 떠올리자 곧바로 신탁에 대한 질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혹시 대신관이 죽은 이유가 신탁 때문입니까?"
"그렇겠죠. 하지만 그 신탁은 저도 알지 못해요. 신탁은 칼리스토니아의 왕과 대신관만이 들을 수 있거든요."
"당신도 듣지 못한다고요? 왜입니까?"
"신탁은 사실 예언이 아니에요. 오히려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시험에 더 가깝거든요."
의문이 풀리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의문이 생겨났다. 도대체 왜 신은 칼리스토니아의 왕만을 편애했는지, 왜 시험 따위를 내리는지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다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대신관은 성녀님이 지목한다고 들었습니다. 새 대신관은 정해졌나요?"
"네. 저는 새로운 대신관을 지목했지만, 신관회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결국 시간문제입니다. 신께서 정하는 것을 신관들이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새 대신관은 누굽니까?"
"당신의 인연 안에 발을 들인 사람이라는 것만 알려드릴게요. 대신관이니 신전이니 하는 것들은 결국 이쪽 사람들의 일이라 제가 먼저 말을 꺼내기가 꺼려지거든요. 어차피 곧 공표될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주세요."
카시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 어차피 새 대신관이 누가 되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지난 대신관의 살해가 2황자가 저지른 짓이 아니라는 것을 신전이 안다는 게 더 중요했다. 신전은 심지어 범인이 황제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니 타셀에게는 여러모로 유리했다.
"신전은… 현재 황제와 1황자, 그리고 2황자 세력의 삼파전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더 까놓고 여쭙자면, 신전은 어느 편에 서 있나요?"
"신전은 언제나 중립입니다. 신의 가호는 모든 이에게 평등하니까요. 황성이 를뤼엔 바로 근처이고, 대신관이나 신관회가 황제의 영향을 받고는 있지만 신전이 황제 편에 서서 1황자나 2황자를 적대할 일은 없을 겁니다.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신전이 2황자의 편을 드는 일도 없을 거라는 말이에요."
"대신관의 죽음에 대해서도 사실을 밝히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네. 물론 황제는 자신의 죗값을 언젠가는 치르게 될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예민한 문제기 때문에 신관회에서는 일단 덮어두고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는군요. 이것 역시 사람들의 정치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제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어요."
카시야는 신전에 대한 몇 가지를 더 묻고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알리나 성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팽팽하게 당겨져 왔던 긴장감 때문에 너무나 피로한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시야는 헤어지기 직전 스윈델에게 했던 말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어차피 이 인생을 살아야 하는 거라면, 지금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을 잊지 말자.'
카시야는 찻잔 바닥에 남은 차를 마저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어떻게 저를 알아보셨습니까? 제가 여자일 줄도 모르셨다면서요?"
별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는데 알리나 성녀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모를 수가 없죠. 당신의 몸에서는 주신의 권능이 닿은 흔적이 너무도 강하게 느껴져요. 내가 보통 인간들보다 훨씬 강하게 느끼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보통 사람들도 자신도 모르게 당신에게 끌리게 될 거예요. 어떤 식으로 그것을 드러낼지는 모르겠지만요."
순간적으로 카시야는 자신이 이 세계에 와서 좋은 사람들만 만났다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다 신의 흔적 때문이었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의심스럽기도 할 법한 저를 타셀이나 미하일, 심지어 적군인 에르논까지 너무나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결국 그들이 저 자신을 보고 친절했던 게 아니라는 말 같았으니까.
카시야의 기분을 알아챘는지 알리나 성녀는 카시야의 곁에 와서 그녀의 뺨에 손을 댔다.
"안 좋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결국 신에게 닿은 경험을 한 것도 당신 자신이잖아요. 이 모든 게 다 당신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당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힘이죠. 당신의 본성이자 영혼인 그것 말이에요."
"죄송하지만 저는 그게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급하게 알려고 하지 않아도 돼요.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발현될 거예요."
"제가 왔다 갔다는 걸, 다른 이들에게 알리실 겁니까?"
"알리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당신은 그저 내 개인적인 손님일 뿐인 걸요. 만나서 기뻤어요. 이건 내 작은 선물이에요."
알리나 성녀는 미리 꺼내둔 듯한 작은 나무함에서 히드레이 교 묵주 반지를 꺼내 카시야에게 건네주었다.
"마음이 힘들 때면 반지의 작은 돌기를 하나씩 짚으면서 기도해보세요.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거예요. 당신은 당신이 가야할 길을 이미 알고 있으니, 그 방향만 잃지 않는다면 두려울 것이 없답니다."
카시야는 그녀의 말에 전부 동의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녀가 주는 선물을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 반지는 왼손 집게손가락에 꼭 맞았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또 뵐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저 역시."
카시야는 신비로운 눈동자의 알리나 성녀에게 인사하고 첨탑의 방을 빠져나왔다.
첨탑의 긴 계단을 내려오면서 카시야는 알리나 성녀가 했던 말을 곰곰이 되새겨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그녀가 이미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뭘 위해 살아야할지 몰라서 고민 중인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었지….'
하지만 알리나 성녀의 그 신비롭고도 안온한 분위기는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원래부터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생각하는 편인 카시야는, 이번에도 역시 깊게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된다는 거잖아? 어떻게 생각해보면 살아가는 방향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고 약속받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꿈보다 해몽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조금 유쾌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카시야는 발걸음도 가볍게 남아있는 계단을 날듯이 뛰어내려왔다.
어두운 신전 뒤편의 뜰에는 처음 담을 넘어 들어왔을 때와는 달리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며 신비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카시야가 그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반딧불이들이 어떤 한 방향으로 날기 시작했다.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카시야는 왠지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반딧불이들이 향한 곳은, 바깥에서는 눈에 띄지도 않던 조그만 쪽문이었다. 카시야는 문득 첨탑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먼 첨탑의 창문에서 알리나 성녀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 같았다. 카시야는 그쪽을 향해 가볍게 목례하고는 쪽문을 열어 신전 밖으로 빠져나갔다.
혹시나 또 카시야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걱정하던 스윈델은, 그 밤이 다 지나기도 전에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 카시야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너무 일찍 와서 실망했나?"
"아,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된 겁니까?"
스윈델이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 마.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으니까. 여기서 말하기는 어려우니, 일단 내일 기도회에 참석한 뒤 피엔으로 향하면서 말해주마. 아직 동이 트려면 시간이 남았으니, 눈 좀 붙여."
스윈델은 왠지 한층 여유로워진 카시야의 태도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쨌든 카시야가 돌아와 안심했다.
"아닙니다. 분대, 아니, 누님이야말로 눈 좀 붙이세요. 피곤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사양 않고."
카시야는 살짝 옆으로 엉덩이를 옮겨 붙이더니 스윈델의 허벅지를 베고 눈을 감았다. 스윈델은 불에 덴 망아지처럼 펄쩍 뛸 뻔했지만 소란 피우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가 담긴 카시야의 눈초리를 읽고는 겨우 이성을 붙들 수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가족끼리 온 이들은 다들 서로의 어깨나 허벅지를 베고 번갈아 쪽잠을 자고 있었다. 남매라는 설정을 따르자면 카시야의 행동이 놀라울 것도 없었다. 카시야는 곧 얕은 잠에 빠졌지만 스윈델은 방금까지 흐려지던 정신이 번쩍 차려지는 느낌이었다.
"그러게 좀 자지 그랬어? 눈 밑이 시커멓다."
기도회 아침, 결국 간밤에 한숨도 잘 수 없었던 스윈델은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남아있는 잠을 쫓았다. 카시야가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자라고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은 카시야만큼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었다. 카시야의 허벅지에 닿았던 귀가 그녀의 체온을 느끼자마자 스윈델은 도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고개를 푹 숙여 졸다가 새벽녘에는 목에 담이 걸리기도 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밤이 지나고 동이 트자 앉아서 기다리던 모든 이들이 전부 일어나 신전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더라도 카시야와 스윈델이 신전 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기도회 중 신관회가 뭔가 발표를 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일단 기도회 자체를 주시하고 있어야하기는 했다.
"들어가기 시작하는군요."
거대한 신전의 정문이 열리고 사제들이 양 옆에 늘어서서 히드레이 교의 가장 긴 기도문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단조로운 음의 성가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신도들은 그 사제들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조용히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엄청난 인파인데도 다들 큰 소리를 내지도 않고 경건한 분위기로 움직이는 모습이, 아닌 게 아니라 굉장히 종교적으로 보였다. 운이 좋았던 건지, 카시야와 스윈델은 가까스로 신전 안에 입장할 수 있었다. 그들의 몇 사람 뒤쪽부터는 신전 주위에서 기도를 해야 했다. 하지만 소란이나 고성은 전혀 없었다. 백성들이 히드레이 교에 갖고 있는 신앙심은 생각보다 대단한 것 같았다. 하긴, 여기까지 와서 기도를 하려는 이들이라면 보통 사람들보다 더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이들이기도 할 것이다.
방금 통과한 신전의 정문 근처에 앉아 기도회의 시작을 잠자코 기다리는 카시야나 스윈델과는 달리 주변에서는 이미 기도를 시작하는 이들이 많았다. 신전 문 옆에 늘어서서 기도문을 암송하던 사제들은 신전 내, 외부의 벽 전체로 퍼져 자리를 잡았다.
해가 둥실 떠오르자 저 멀리 보이는 단상 위로 흰 로브를 입은 누군가가 올라섰다. 그러자 앞쪽에서부터 "오오오오-"하는 소리가 퍼졌다. 감탄이랄지, 흐느낌이랄지 모를 웅성거림이었지만 정확히 알 수 있는 건 그 모두가 앞에 선 이를 숭배한다는 것이었다. 단상이 멀었고 신관들은 모두 흰 로브를 입고 있어 누군지 자세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관이 없는 지금, 신관회의 수석 신관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그가 입을 열어 뭐라는지 알 수 없는 언어로 기도문을 읊기 시작하자 그의 목소리는 신성력으로 신전 전체는 물론 신전 밖에 엎드려있는 백성들에게까지 울려 퍼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모든 이들이 엎드려 기도를 중얼거렸다. 중간 중간 하늘로 손을 뻗어 기도를 하는 자, 제자리에서 몇 번이고 절을 하는 자, 몸을 앞뒤나 좌우로 흔들며 성가를 부르는 자가 있기는 했지만 아무도 그들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 않았고 자신의 기도에만 집중했다. 기도회의 분위기는 확실히 신앙심이 옅은 자라 할지라도 괜히 휩쓸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카시야 곁의 스윈델 역시 뭐라고 중얼거리며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카시야만이 가만 엎드려 주변과 단상을 살피며 특이점이 없는지 확인했다.
============================ 작품 후기 ============================
아아... 우리 독자님들. 너무나 사랑스러웡.
1. 건강상의 문제는 전혀 없습니다. 그냥 졸린거였습니다-_-;; 밥 배불리 먹고 에어컨 튼 방에서 활자를 읽고 있으면 졸린 게 당연하잖아요? 의도치않게 여러분의 걱정을 받게 되어 민망하면서도 행복하군요♡
2. 진홍의 개구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신박하다!
3. Crinita 님 > 카시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시야를 그렇게 만들었던 놈들은 도로 살릴 필요도 없이 벌을 받지 않았겠어요? 카시야는 굉장히 경계선 상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선택받았을 거예요.
4. 에르세뉴프 님 > 22편에 '여기 캐릭터들 몸 되게 자주 씻는다'는 코멘트 남겨주셨던데요. 네. 맞습니다. 목욕신 엄청 많이 나오죠? 저도 쓰면서 그 생각했어요. 제가 목욕씬 성애자인듯! 하앍하앍♡ (사실 그것도 그런데, '씻어내는' 행위에 뭔가 의미를 담아 생각했었습니다.)
5. 금요일이군요. 주말의 시작!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