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0 피엔(1) =========================
기도회가 시작되자 신전 담 벽에 둘러선 사제들이 성가를 불렀다. 그 목소리 역시 신성력을 통해 를뤼엔 전역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남녀를 구분할 수 없는 정결한 목소리를 타고 신어(神語)가 울려퍼지자 감동을 이기지 못한 신도들 사이에서는 울음소리나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신을 찬양하고 경전을 펴서 낭독하며 신의 은총을 기도했다. 모두가 최면에 걸린 듯 종교 안에 빠져들었지만 카시야는 슬슬 지겹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엎드려 있는 자세가 편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카시야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신관회의 움직임뿐이었다.
'어제 알리나 성녀에게 물어볼 것을….'
신관회에서 대신관의 죽음에 대한 발표는 덮어둔다고 얘기 들었지만, 그 외에 다른 특이사항이 없는지 묻지 못한 게 아쉬웠다.
정오가 다 되었는데도 신관회에서는 별다른 발표가 없었다. 기도회 중에는 식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며 기도 중이었다. 이제 슬슬 일어나 피엔으로 향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어지던 찰나, 단상 쪽에서 신관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카시야는 로브의 모자를 살짝 올려 단상을 주시했다. 그때 단상 뒤편에서부터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이는 게 눈에 띄었다. 알리나 성녀였다. 아니나 다를까, 단상 부근에서부터 신관을 처음 봤을 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성녀님이시다! 알리나 성녀님!"
"알리나 여신님!"
방금까지 그 어떤 소요도 없이 침착하게 기도를 외우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두가 알리나 성녀의 그림자라도 눈에 담으려고 까치발을 들며 탄성을 질러댔다.
"와. 슈퍼스타네."
"예? 그게 뭡니까?"
"아무 것도 아니야."
카시야는 뒷머리를 긁적이는 스윈델을 무시하고 알리나 성녀를 바라보았다. 광란에 빠지려던 군중은 성녀가 손을 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드디어 알리나 성녀의 목소리가 를뤼엔에 울리기 시작했다.
"주신 헤바의 가호가 있을 것이며, 주신의 첫 번째 종 알리나의 축복이 그대들에게 깃들 것이니라. 모진 고통의 계절이 우리를 스치고 있으나 얼음이 아무리 두껍게 얼어도 봄은 오듯, 우리의 시련 역시 도래하는 영광을 맞이하고야 말 것이니, 기도하라. 주신께서 듣고 계심이라."
사람들은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고되고 팍팍한 현실 속에서 그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백성들이니, 신이 그들의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말이 엄청난 위로가 된 것 같았다. 알리나는 말을 끝내고 손을 들어 하얀 빛의 폭발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터져 나온 빛줄기가 신전 안은 물론 담 너머 밖까지 뻗어나가며 빛 가루를 신도들의 머리 위로 뿌렸다. 기적과도 같은 그 모습에 사람들은 더욱 고양된 모습을 보였다. 카시야와 스윈델의 머리 위로도 그 빛 가루가 닿았는데 확실히 간밤에 그녀의 손길에서 느꼈던 따스한 위로의 기운이 머리에서부터 찬찬히 스며드는 것 같았다. 스윈델도 어느새 눈가를 훔치며 히드레이 교 기도문을 암송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시야는 그 사이 알리나 곁으로 걸어 나오는 한 신관이 있음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분명 뭔가를 발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얼마 전, 우리는 고매하신 옐림 대신관을 불의의 사고로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옐림 대신관께서는 주신 헤바의 품으로 돌아가 극의의 평화를 누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대신관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보다 그 분께서 남기신 유산을 돌아보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대신관 옐림께서는…."
신관은 죽은 대신관의 업적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그를 추모했다.
'이미 죽은 자의 업적을 꿰고 앉아서 뭐하게?'
카시야는 조금 시니컬한 기분이 되었다. 신관의 읊고 있는 대신관의 업적이 사실이라면 그는 살아있는 성자와 마찬가지인데, 그런 그가 도대체 왜 황제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그 이유가 더 궁금할 뿐이었다. 길고 긴 연설의 말미에, 신관이 드디어 카시야가 기다리던 말을 꺼냈다.
"…그리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는 알리나 성녀님께서 차기 대신관을 지명하셨음을 알리는 바입니다. 예비 대신관께서는 곧 두 달 동안의 검증기간을 거쳐 히드레이 교의 대신관직을 역임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차기 대신관은 제국 내에서도 신성 치료사로 명망이 높고…."
거기까지 들었을 때 카시야는 저도 모르게 "뭐?"라고 입 밖으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신성 치료사 출신의 대신관은 히드레이 교 역사상 처음이지만 분명 주신께서 목적을 갖고 그를 불러들인 것임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차기 대신관의 발표는 검증기간이 끝나고 그 분께서 진정한 의미의 대신관이 되셨을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신도 여러분께서는 차기 대신관께서 무사히 시험을 통과하시어 주신의 복음을 나누어주시기를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신관회는 결국 차기 대신관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카시야는 신성 치료사 출신의 차기 대신관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와의 인연에 발을 들인 신성 치료사라고는 한 명 밖에 없었으니까. 사람들은 새로운 대신관은 어떤 사람일지 상상하며 웅성댔다. 하지만 카시야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느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기 대신관이 신성 치료사 출신이라니, 충격적이네요."
"…왜?"
"신성 치료사는 히드레이 교 내에서도 하급 사제예요. 그들이 쓰는 신성력도 그 자신이 보유한 힘이라기보다는, 알리나 성녀님의 신성력을 끌어다 쓰는 거라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성녀님을 광적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은 신성 치료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아하. 신관회가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이유가 그것이었나?"
"예?"
"아냐. 네 말대로라면 신관회에서는 차기 대신관을 더 철저하게 검증하려 들겠구나."
"쩝…. 그럴 수도 있죠. 어제까지 시종처럼 부리던 자가 갑자기 제 상관이 된다는데 누가 좋아하겠어요?"
"신관도 결국 사람이라 이거지. 어쨌든 이제 우리가 여기서 볼 일은 다 본 것 같다. 빠져나가자."
"옙!"
카시야와 스윈델은 카시야가 내리쬐는 햇볕에 현기증을 느껴 자리를 옮기는 척하며 신전을 빠져나갔다. 한 시간 후 를뤼엔에서 피엔 방향으로 말 두 마리가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를뤼엔을 빠져나가고 두 시간이 지났을 즈음 그들은 한적한 시냇가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며 신전에서 얻은 정보를 공유했다.
"아, 알리나 성녀님을 직접 만났다고요? 진짭니까? 허…! 말도 안 돼."
"말이 안 될 건 또 뭐냐. 네 말대로 정말 신이긴 신인가 보더라. 내가 갈 걸 알고 있던데?"
"자, 자, 잠깐만요. 저는 아직 누님, 아니, 분대장님이 성녀님을 만났다는 부분부터가 받아들이기 힘들거든요. 와…. 성녀님을 만나다니…. 우와…."
진심으로 부러움과 혼란이 뒤섞인 스윈델의 표정을 보고 카시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아…. 어쨌든, 성녀 말로는 황제가 대신관을 죽였다고 하더라. 그걸 신전에서도 알고 있고 말야."
"에엑? 진짜예요? 정말 황제가 대신관을 죽였대요?"
"그렇다더군. 신전 측은 타셀 전하께 딱히 악감정은 없어. 그렇다고 좋은 감정도 없고. 중립을 지키겠대."
"어쨌든 신전이 우리의 적은 아니라는 거잖아요! 그럼… 좋은… 결과 아닌가요?"
"맞아. 나쁘지 않은 결과지. 그리고 성녀가 말을 아낀 것 같기는 하지만, 그녀가 진짜 신이고 미래를 보는 게 맞다면, 황제는 곱게 죽진 못할 것 같더라."
"당연하죠. 대신관을 죽였는데 천벌을 안 받을 리가 있습니까. 어쨌든 잘 됐네요."
"음. 대신관의 죽음은 큰 악재로 작용할 것 같지는 않아. 어쩌면 황제에게 악재일지도 모르지. 신전이 아무리 중립을 지키겠다고는 하지만, 감히 제 식구를 건드렸는데 그게 곱게 보이겠어? 물론 황제의 권력 때문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뭐, 그건 그렇고요. 피엔에 가서는 뭘 알아봐야 하는 겁니까?"
스윈델의 질문에 카시야는 잠깐 멈칫했다.
사실 그녀가 피엔에 가는 이유는 툴라를 만나 에르논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이유가 컸다. 하지만 그 사실을 스윈델에게까지 알려서 좋을 것은 없었다.
"피엔에서는 찢어져서 다니자. 너는 를뤼엔에서처럼 식당이나 시장,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풍문을 수집해. 나는 뒷골목 안으로 들어가겠다."
"괜찮겠어요?"
"네 걱정이나 해라.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어디, 단검술 좀 봐줄까?"
"어…. 조금 더 가면 피엔인데, 반쯤 죽어가는 모양새면 의심받지 않을까요?"
"…핑계 좋았다. 이번만 봐준다."
그들은 물을 먹고 적당히 쉰 말에 다시 올라타고 피엔을 향했다.
오랜만에 찾은 피엔은 자연스럽게 엘레나 황비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했다.
제 편이 하나도 없는 차가운 궁에서 아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제국의 황비. 백골이 될 때까지 방치되었던 그녀의 시체. 그리고 유일한 가족이던 제 어머니의 유골을 받아들고도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러줄 수 없었던 황자.
물론 지금도 카시야는 타셀이나 엘레나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역시 안 됐다고는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그동안 완전히 잊고 지냈던 자신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난민이 되던 당시의 카시야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녀와 그녀의 부모가 정확히 어느 나라 출신이며 어떤 종교를 가졌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부모의 품에 번갈아 안겨가며 피난 다니느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해 늘 배가 고팠다는 기억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고, 겨우 올라탄 유럽행 낡은 배는 출발 당시부터 이미 정원을 한참 초과한 상태였다. 이상하게도 그 배를 탄 이후의 기억은 꽤나 선명했는데, 불행하게도 그 기억의 시초는 죽음이었다.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음식이나 물을 들고 탈 수 없었던 탓에, 노약자부터 서서히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바다로 던져지는 '아직 덜 죽은 이들'의 모습을 보며, 그 당시의 자신은 너무나 큰 충격과 공포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배의 연료가 유럽에 닿기에는 조금 모자라다는 말에,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노인들부터 강제로 바다에 던져졌다. 그들은 확실히 살아있는 사람들이었다. 힘이 센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을 대놓고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공포의 광기가 지배하는 조그만 배 위에서는 힘의 차이에 따라 계급이 나뉘어졌고,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남의 목숨을 해치는 이기가 행해졌다. 벌벌 떠는 카시야를 안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한참 바라보다가 얼굴 곳곳에 키스하고는, 그 배를 지배하던 이에게 제발 아이만은 무사히 데려다달라고 읍소한 뒤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녀가 카시야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꼭 살아남아야 해."였다.
모르긴 몰라도 스스로 가슴을 찌르던 엘레나 황비의 눈빛은 카시야가 일부러 잊고 지내려 했던 어머니의 마지막 눈빛과 닮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카시야는 고개를 바르르 흔들어 옛 기억을 털어냈다. 이미 지난 과거다. 심지어 전생이다. 카시야는 현생에 집중하기로 했다.
"좋아. 오늘 밤 10시에 이곳에서 보기로 하고 지금부터는 갈라지자. 건투를 빈다."
"분대장님이야말로 몸조심 하십시오. 밤에 뵙겠습니다."
스윈델이 먼저 왼쪽으로 말머리를 틀어 사라졌다. 카시야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천천히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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