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1 피엔(2) =========================
말을 마구간에 맡겨둔 카시야는 불과 두어달 전에 이 곳을 찾았을 때와는 달라진 분위기를 느꼈다. 활기와 생동감이 넘치던 피엔이었건만, 지금은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일수록 돈은 뒷골목에 모여드는 법인지, 오랜만에 찾은 툴라의 응접실은 전보다 더 화려해져있었다.
"당신과는 언제고 다시 만날 줄 알았어요."
붉은 머리의 툴라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알리시아가 때묻지 않은 숲 속의 요정과 같은 아름다움을 뿜어낸다면, 툴라는 그야말로 인간의 욕망이 그려내는 아름다움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붉은 머리카락은 풍성하게 굽이쳤고, 상체를 꽉 졸라맨 검정색 드레스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적갈색의 눈동자마저 유혹적이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카시야에게는 성장(盛粧)한 그녀의 모습이 마치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처럼 보였다. 무인(武人)도 아닌 여자 혼자 이 바닥에서 이만한 위치에 오르기까지의 여정이 평탄했을 리가 없다.
"요즘 피엔은 어떻습니까."
별다른 인사도 하지 않고 곧바로 질문을 하는 카시야를 보며 툴라는 피식 웃었다.
툴라가 접수한 정보에 따르면, 카시야는 신비로운 사람이었다. 죽음에서 깨어나더니 인간 자체가 변한 듯 했으며, 갑자기 뛰어난 암살자의 면모를 보였다. 그 조심스러운 타셀 칸 아마리스와 허술한 듯 하지만 냉철하기 그지없는 미하일 탈리온 메레디스의 신임을 받고 있는 여기사이며, 무엇보다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엘레나 황비의 탈출을 성공시켰다. 물론, 불행하게도 엘레나 황비는 더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가장 신기한 건 그런 그녀가 미심쩍다 여기는 툴라 역시 어느새 그녀에게 마음을 내주게 된 것만 같았다는 것이었다. 온갖 더러운 꼴을 다 겪으며 살아온 툴라는 맹세코 단 한번도 이런식으로 마음을 뺏긴 적이 없었다.
"어떤 것 같던가요? 당신이라면 느꼈을 것 같은데…. 사실 '요즘'이라고 한정지어 말하기는 좀 그래요. 1황자가 반란을 일으킨 뒤로 계속 분위기가 나빠지고 있으니까. 최근에는 이 근처도 눈에 띄게 암울해졌죠. 세율은 자고 일어나면 오르고, 우리 같은 뒷골목 상인들이 바치는 상납금 역시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늘어났어요. 그 모든 돈이 다 황궁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그 돈을 가지고 황제가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황제 쪽에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습니까?"
"케일런 황자 쪽과 협상이 타결된 이후로 마법사들과 학자들을 황궁으로 엄청나게 끌어모으는 것 같더군요."
"무슨 수작이지?"
"글쎄요. 저들만 안전하려고 마법진을 그리는 건지도 모르죠. 멜라니아 황비가 임신 중이니 황비궁의 보안을 더 강화하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카시야는 왠지 그것 이외의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마법사를 활용할 수 있는 분야가 무궁무진했기 때문에 그 목적을 어림짐작하지는 않기로 했다.
툴라와 피엔과 황궁에 대한 얘기를 좀 더 나누던 카시야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진짜 묻고 싶었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툴라. 지금부터 내가 물어보는 내용에 대해서, 다른 이들에게는 절대로 발설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무슨 내용인지 들어보고 판단할게요."
툴라가 생글거리며 눈을 빛냈다. 하지만 카시야는 그녀가 남들에게는 함구할 거라는 것을 믿었다.
"혹시, 2~30년 전쯤에 이 피엔의 사창가에서 마력을 지닌 아이가 태어난 적이 있습니까?"
나지막한 카시야의 목소리에 툴라의 움직임이 잠깐 멈칫했다. 적갈색의 눈동자가 카시야의 생각을 파헤쳐보려는 듯 그녀의 녹색 눈동자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으셨어요?"
"…여기서 태어난 본인에게서."
그 말에 툴라의 눈이 살짝 커졌지만 그녀는 곧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그 사람이 허풍쟁이거나, 당신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겠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카시야의 질문에 툴라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씁쓸한 어떤 것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사실, 있었어요. 딱 한 명. 하지만 당신이 그 사람을 만나볼 수 있었을 리 없어요."
"왜요? 에르논이라서?"
직접적으로 실명을 밝히자 툴라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드디어 사라졌다.
"지금… 당신, 에르논을 만났다고 말하는 거예요?"
"어쩌다보니."
"타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신가요?"
"네. 물론. 타셀 전하 뿐만 아니라 우리군 전체가 알고 있습니다. 제가 케일런 진영에 잠입했다가 며칠동안 그에게 잡혀 있었거든요."
카시야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툴라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했다. 떨지 않기 위해 꼭 쥔 주먹이, 그러나 가늘게 떨고 있었다.
"뭘 알고 싶으신 건가요?"
"에르논의 출생과 그가 공작가에 가게 된 그 당시의 상황이요. 그가 진짜 알리스타스 공작의 아이가 맞기는 합니까?"
아예 알리스타스 공작을 언급하기 시작한 카시야에게 툴라는 황급히 손을 들어 카시야의 입을 막았다.
"그 작자 이름을 당신 입으로까지 듣고 싶지는 않네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난 에르논을 그 공작에게서 해방시키고 싶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타셀 전하를 배신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에르논이 케일런 진영의 전력에서 빠져나오면 타셀 전하가 크게 유리해지기 때문이죠. 어쨌든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데 마치 노예처럼 부려지고 있는 에르논이 타셀 전하의 손에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요. 날 도와주실겁니까?"
"당신은 어디까지 알고 있죠?"
관자놀이에 손을 대며 신음을 흘리듯 묻는 툴라에게 카시야가 바싹 몸을 기울였다.
"에르논이 이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 그가 마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공작이 데려갔다는 것, 그리고 공작성에서 공격 마법사로 키워졌다는 것, 그가 공작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종의 이유가 있다는 것."
툴라는 가까이 들이댄 카시야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어떤 상념에 젖어있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툴라. 도와주세요."
카시야의 요청에 툴라는 눈을 들어 카시야를 바라보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알고있는 한 가장 아름다웠던 한 창녀를 떠올렸다.
"…그녀의 이름은, 에스텔이었어요. 빌어먹을 노름꾼의 아내가 되기엔 지나치게 아름답고 착한 여자였죠. 그 노름꾼은 노름판에서 큰 빚을 지자 자기 아내를 사창가에 팔아버렸어요. 그 뒷 얘기야 당신도 대충 예상이 되시겠죠? 하루 하루 몸을 팔며 모진 목숨을 이어가던 그 아름다운 여자는, 정말 재수없게도 엄청난 권력을 가진 공작의 눈에 들어버렸어요. 한낱 뒷골목 창녀가 공작이나 되는 사람을 거부할 수 있는 힘 따위는 없었죠. 한달이나 그 공작성에 붙잡혀 온갖 짓을 당했는데, 그런데도 '더러운 창녀가 요망하게 귀족을 유혹했다'며 매질을 당하고 근처 숲에 버려졌어요. 정말…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이예요."
어느새 툴라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있었다. 카시야는 툴라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얘기를 이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뒷골목의 동료들이 그녀를 찾아냈을 때, 그녀는 이미 엉망이었어요. 데리고 와서 보살피고 치료하니 눈은 떴는데 이미 반쯤 미쳐 있었죠. 그래서 그녀가 아이를 가진 줄을 아무도 몰랐어요. 그때는 이 뒷골목의 모두가 지독하게 가난했고, 굶는 게 일상이다보니, 비쩍 마른 상태에서 배만 조금씩 나오는 그녀가 그저 너무 굶어 그런 줄로만 알았거든요. 하지만 막달이 다가올 때쯤엔 모를 수가 없었죠. 사실, 그 상황에서 태 내의 아기가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어요."
"그게 에르논이었다는 말인가요?"
"네. 그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다들 놀랐죠. 온몸이 하얬거든요. 머리카락도, 눈썹도, 다 새어버린 것처럼 하얬어요. 그런 아이가 눈을 떴는데, 세상에…. 저는 벌써 25년이 지났지만 그 아이의 눈을 처음 봤던 순간이 너무도 선명히 기억나요. 그런 보라색 눈은 처음이었거든요. 자수정 같았어요."
뜻하지 않게 에르논의 나이를 알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눈 앞의 툴라가 생각보다 나이가 꽤 많다는 것까지도.
"하아…. 하지만 그렇게 특이하게 생겼다는 건 어디서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예요. 에르논을 괴물이니, 마녀의 자식이니 하며 괴롭히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그리고 그 괴롭힘이 심해지던 어느날, 에르논은 자기도 모르게 마법을 써버렸어요. 에르논을 괴롭히던 큰 아이들이 전부 나가떨어졌죠. 뒷골목에 마법을 쓰는 아이가 있다는 소문이 어떻게 공작가에까지 흘러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에르논이 공작의 사생아가 아니었어도 무슨 수를 써서든 데려갔을 거예요. 마법사는 귀한 인재니까, 혹시라도 다른 귀족들 귀에 들어갈까봐 걱정했던 건지 재빠르게도 찾아왔더군요. 공작가 사람은 공작의 피를 이은 아이니만큼 자신들이 키워주겠다고 에스텔을 안심시키고는 에르논을 데리고 가버렸어요."
"에르논의 친모는 어떻게 됐습니까?"
"에스텔은 끝까지 에르논이 공작성에서 배불리 먹고 좋은 옷 입으며 지낸다고 믿으며 감사했어요. 자신은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말이죠. 결과적으로 말하면, 에르논이 공작성에 가고 5년 뒤에 죽었어요.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가요. 그리고 내가 창녀들을 위한 길드를 만든 것도, 에스텔 그녀 때문이었어요. 아무리 창녀라 하더라도, 인간이잖아요. 몸뚱아리 밖에 밑천이 없어서, 굶주림에 시달려서 몸을 팔게 되었는데, 그게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야할만큼 죄인 건가요?"
툴라는 회한에 젖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 앞에는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환하게 웃는 에스텔의 환영이라도 보이는 것 같았다.
"당신과 에스텔은 무슨 사이였죠? 지나치게 잘 아는 것 같은데요."
"가족과도 같았죠. 나는 에스텔을 언니처럼 생각했어요. 사실 내 또래 이상의 창녀들에게 물어보면 아마 어느 정도는 다 알 거예요. 우리같은 사람들은 서로가 가족이거든요."
"그러고보니 당신을 밤의 지배자라고 부르던데, 그 '가족'이라는 것과 관련 있나요?"
"후후후. 아직도 내 업장에서는 은퇴한 창녀들이 음식을 하거나 청소를 하며 일을 해요. 그리고 그녀들이 낳은 딸들이 몸을 팔고 있고, 그녀들이 낳은 아들들이 여자들을 보호하죠. 난 까놓고 말하면 포주에 지나지 않아요. 포주라고 하면 사람들은 악당을 생각하지만, 배고픈 나나 에스텔 같은 여자들에게 이 곳의 포주는 일을 물어다주는 고마운 사람이었어요. 저는 그를 삼촌처럼 따르면서 지냈고요, 그의 업장을 내가 물려받아서 키운 거예요. 그리고 나는, 에스텔같이 비참하게 죽는 창녀가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버는 돈의 일부를 은퇴한 창녀들을 위해 쓰기 시작했어요. 불치병에 걸린 이들은 최대한 고통없이 갈 수 있게, 나이가 든 창녀들은 다른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게. 그러다보니 기댈 곳 없는 이들이 내게 몰려왔고, 그들을 키우니 내 힘이 된 것 뿐이에요."
카시야는 툴라를 통해서 사람이 살아가며 행할 수 있는 정의와 선행이 다양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말대로 귀족들의 눈에는 천하디 천한 창녀들과 포주일 뿐이다. 툴라가 데리고 있는 여자들이 몸을 파는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툴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다른 이들을 돕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피엔의 뒷골목에서는 병들고 버려지는 창녀가 없었고, 굶어죽는 아이들이 사라졌다. 황제나 귀족들은 구제하지 못했던 가난한 이들을, 툴라는 구했다.
"에르논이 그렇게 대단한 마법사가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요. 공작성에서 데려간 뒤 그 애의 소식을 들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1황자의 반란군에 알리스타스 공작 휘하의 에르논이라고 불리는 대마법사가 나타났다는 얘길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툴라가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다지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한 것 같더군요."
카시야는 씁쓸한 현실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툴라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랬겠죠. 도대체 우리랑 뭐가 얼마나 달라서 그러는지 몰라도, 그들은 우리가 아는 인간의 범주는 벗어났으니까. 짐승만도 못한 놈들…."
"…혹시, 마법 관련 서적들이 많은 곳이 어디 없을까요?"
알리스타스 공작가의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파르르 떠는 툴라를 향해 카시야가 물었다. 하루빨리 에르논을 속박하고 있는 그 마법을 풀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뜬금없는 마법 서적 얘기에 툴라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건 왜요?"
"에르논을 공작으로부터 빼내오려면 필요한 게 있어서요."
카시야가 말하는 그게 뭔지 궁금할 법도 한데, 툴라는 굳이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글쎄요. 일단, 황궁 도서관에는 있겠죠. 제국의 모든 책들이 다 있으니까."
"하지만 제가 잠입하기는 힘들죠. 거기 이외에는 전혀 없습니까?"
"자신의 성에 도서관을 갖춰놓은 귀족들이 더러 있기는 하죠. 하지만 마법 서적이 많은 가문을 따로 알지는 못해요. …아, 그러고보니, 황궁만큼 마법 서적이 많을만한 곳이 한 군데 있기는 해요. 그 책들이 아직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거기가 어딥니까?"
"혹시 대마법사 헬라스를 아시나요?"
툴라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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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냥꽁냥이 나오지 않으니 선호작 해제가 생겨나고 코멘트와 조회수가 줄어드는군요. 그동안 로맨스를 기다려오신 분들이 많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풀어야 할 이야기가 아직 많다구욥. 저는 맛있는 건 제일 나중에 먹는 타입이거든요. 기다려주시어요.ㅠㅗㅠ
(이러면서도 차기작은 로맨스 뿜뿜 써버려야지! 하는 마음이 들긴 하는군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