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2 피엔(3) =========================
"헬라스?"
"네. 지금은 죽은 대마법사죠. 한 10년 전쯤에 죽음의 기사라고, 마나를 억지로 다 뽑아낸 뒤 자신의 마력만을 주입해 만든 귀신 병사를 만들어서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자였는데, 그가 사실 리치엘이라는 백작가의 아들이었어요. 그리고 제가 아주 오래 전에 그 가문을 아는 고객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그 저택에 헬라스가 모아둔 마법 서적이 엄청나다는 거예요. 그가 워낙에 악명을 떨쳐서 리치엘 백작가는 멸문이 됐는데, 헬라스가 그 저택에 무슨 마법을 걸어둔 건지, 알테리온 황제가 그 저택을 건들지는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이제는 거의 폐가라는데, 만약 소문처럼 정말로 아무도 그 저택을 건들지 않았다면, 그가 모아둔 책들이 그대로 남아있지 않겠어요?"
문득 에르논이 마나를 가르쳐주며 얘기했던 게 떠올랐다. 옛날에 어떤 대마법사가 마나를 다 빼앗은 인간들을 병사로 만든 적이 있지만 실패로 끝났다고 했던가.
"그 저택이 어디 있는지, 당신은 알고 있겠죠?"
카시야의 말에 툴라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나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정보를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지만, 에르논의 일이라니까 알려주는 거예요."
카시야가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툴라는 일어서서 응접실 벽면에 있는 테이블의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고 깃펜과 잉크까지 트레이에 담아 돌아왔다. 그리고는 종이 위에 제법 그럴 듯하게 피엔 주변의 지도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여기가 황궁이 있는 아르카나고 여기가 피엔, 그리고 피엔에서 데런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가다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타노버가 있어요. 이 타노버와 뮤렐 지방의 경계 근처에 룬이라는 아주 작은 마을이 있죠. 바로 여기가 옛 리치엘 백작가의 저택이 있는 곳이에요. 과거에는 타노버와 뮤렐 전체가 리치엘 백작가의 영지였다고 하더군요."
"감사합니다. 거기에 제가 찾는 책이 있기를 바랄 수밖에요."
"행운을 빌겠어요. 하지만 왠지, 당신은 뭐든지 해낼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한숨처럼 짧은 웃음을 짓던 카시야는 툴라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때 툴라가 카시야의 옷자락을 잡았다.
"잠시만요."
카시야를 다시 앉혀놓고 문 밖으로 나갔다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손수건에 곱게 싸인 무엇인가가 들려있었다.
"혹시 그 아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걸 전해주시겠어요?"
카시야는 툴라가 건넨 그것을 펼쳐보았다. 손수건 안에는 나무 구슬을 꿰어 만든 목걸이가 하나 있었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나무 구슬은 때가 탄 채 반들반들했고, 금속 부분은 녹이 슬어 있었다.
"이게 뭡니까?"
"에스텔의 유품이에요. 인조 보석 하나 살 돈이 없었던 창녀가, 그래도 자신을 꾸미느라고 목에 걸었던 목걸이죠. 에스텔이 죽었을 때, 그녀의 유품이랍시고 남길 만한 게 그것밖에 없더라고요."
꼬질꼬질 때가 탄 나무 구슬이 에스텔의 한스러운 인생처럼 알알이 열 지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를 다시 만나면 꼭 전해드리죠."
"고마워요."
카시야는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미소를 짓는 그녀를 뒤로하고 조심스럽게 건물을 빠져나왔다.
아직 정오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카시야는 아직 썰렁한 뒷골목을 정처 없이 걸어 다녀 보았다. 돌을 까는 것도 무리였는지, 군데군데 흙길이 이어졌고 도로 옆을 흐르는 하수도에서는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에르논은 이 골목에서 태어나서도, 공작성에 들어가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친모 역시 그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지는 못했겠지만, 그로서는 그 불완전한 애정조차 그리웠을 것이다.
'에텔이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에스텔에서 따온 것 같네.'
아마도 그가 아는 가장 따뜻한 여성이었을 이의 이름. 그가 왜 자신의 이름을 그의 어머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그에게는 우연히 만난 용병만큼도 살가웠던 이가 없었던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르논은 자꾸만 그녀의 전생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입 안이 썼다.
카시야는 뒷골목을 헤매다가 허름한 식당으로 발을 들였다. 소시지 요리가 전문이라는 그 식당은 아직 오전이 다 지나지도 않은 시점부터 소시지와 함께 맥주를 팔고 있었다.
낯선 이가 가게로 발을 들이자 식당 주인부터가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를 훔치고 의자를 정리하던 주인은 어서 오시라는 인사는 물론 주문을 받으려는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카시야는 무심히 주문을 했다.
"소시지와 맥주 한 잔."
식당 주인은 여전히 그녀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지만 이내 어슬렁어슬렁 주방으로 걸어가 그녀가 주문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당에는 한 사람, 두 사람씩 손님이 들어왔다. 모두가 다 그 동네 사람들인지, 다들 카시야를 흘끔거렸다. 하지만 카시야는 귀만 열어둔 채 턱을 괴고 앉아있었다. 그녀가 여상한 태도로 일관하자 다들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근처에 앉은 남자 셋은 장의사들 같았다.
"…북서쪽 시체 구덩이에는 이제 자리도 없어. 뭐 이렇게 죽어나가는 놈이 많어."
"죽일 놈 죽였다는데 그런가보다 해야지, 뭐. 자리 모자라면 제일 안쪽 자리부터 도로 파내서 새 시체를 묻으면 돼. 어차피 유족도 없는 시체들이니까 문제 생길 건 없지."
"그런데 시체 몇 구는, 사형수였다고 보기에는 입은 옷들이 꽤 좋더라."
"덕분에 우리가 짭짤한 부수입을 올리는 거니까 감사해야지. 낄낄."
사형수를 처리했다는 것을 보니 황궁에서 나오는 시체들을 처리하는 것 같았는데, 카시야는 그들의 말에 흥미를 느꼈다. 그때 식당 주인이 그녀와 그들이 시킨 소시지를 들고 나왔다.
"방금 사람 내장을 보고 왔는데도 소시지를 먹을 수 있는 거 보면, 우리도 참 비위가 좋아. 그지?"
"참 나. 비위 따지는 거 보면 네 놈은 아직 배가 덜 고픈 거야. 죽은 놈 내장으로 만든 소시지라도 배만 채울 수 있으면 상관없겠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난 내장이 다 나와 있는 시체보다는, 마치 뭔가에 빨려 죽은 것 같이 비쩍 마른 시체가 더 기분 나쁘더라고."
"도대체 그 시체들은 뭣 땜에 그렇게 됐으까잉. 뭐, 처리하기 간편하니 좋긴 헌디, 아무래도 영 찝찝혀서…."
"아, 쓸 데 없는 소리들 말고 밥이나 처먹어. 어이! 여기 맥주 세 잔 더!"
카시야는 제 앞에 놓인 접시의 싸구려 소시지를 포크로 잘라 입에 넣었다. 질 좋은 고기보다는 도축 부산물이나 밀가루가 훨씬 많이 섞여있어서 훌륭하다 할 수는 없었지만, 맥주에 곁들이기에는 짭짤하니 괜찮았다. 맥주는 물이라도 탄 듯 맹맹했는데 이런 뒷골목에서 질 좋은 홉이나 맥아를 충분히 넣을 수 있었을 리 없으니 이해할 만도 했다.
카시야는 별 생각 없이 들어왔던 식당인데 그 거리에서는 나름 맛집인지 정오가 지나자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손님이 몰렸다. 웅성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쓸 만한 정보를 걸러 듣고 있었는데 벌써부터 술에 취한 자들이 생겨난 모양이었다. 가게 안쪽에서 점점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너 지금 뭐라 그랬어!"
"미친놈이 귓구멍까지 막혔냐? 계속 이따위로 할 거면, 다음 주부터는 너 빼고 일하겠다고!"
"시벌, 이제까지 궂은 일 다 시켜놓고는 뭐가 어쩌고 어째?"
그 뒤로는 주먹이 얼굴을 치는 소리,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 나무 그릇이 바닥에 떨어지며 내는 소리, 욕설 소리로 시끄러웠다. 이 정도로 어수선한 곳에서는 더 얻을 정보가 없을 듯해서 카시야는 잔 바닥에 남은 맥주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 안쪽에서 시작된 싸움은 주변인들도 점점 말려들기 시작해 마치 격투장이 된 것처럼 다들 엎치락뒤치락하며 몸싸움을 했고, 손에 잡히는 건 아무거나 집어던지는 통에 카시야 쪽으로도 음식물이 덕지덕지 묻은 그릇이 날아왔다.
하지만 카시야는 슬쩍 몸을 뒤틀어 그것들을 피한 뒤에 식당 주인을 찾아 식사 값을 건넸다. 그런 패싸움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닌 듯 식당주인은 단지 짜증난 얼굴일 뿐이었지만, 날아오는 집기를 능숙하게 피하면서 자신에게 돈을 건네는 카시야를 바라보는 눈에는 놀라움이 드리워 있었다.
카시야는 시끌벅적한 식당을 나와 방금 식당에서 대화를 나누던 장의사들이 말하던 '시체 버리는 구덩이' 쪽을 향했다. 그들의 말대로 피엔의 북서쪽이자 황궁의 남서쪽으로 조금 말을 달리자 시체 썩는 냄새가 풍기는 언덕이 있었다. 그 언덕 위에 서자 눈앞의 평지에는 비석 대용의 돌덩이 하나씩을 얹은 무덤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무덤의 봉분은 따로 없었고, 시체를 땅에 묻은 뒤 그 위에 돌이나 비석을 만들어 얹어두었는데, 카시야의 눈앞에 펼쳐진 그 땅에는 사형을 당하거나 연고가 없는 자의 시체를 묻어서 그런지 시체를 관에다 넣지도 않았고 깊게 묻지도 않아서, 매장한지 얼마 안 된 무덤 위에는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거기까지 가는 중에 아무도 마주치지 않아 대충 짐작하기는 했지만, 그 곳의 꼴을 보니 왜 사람들이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다 떠나서 냄새부터가 역했다.
하지만 카시야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에서 내려 시체를 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덤 중 구더기가 거의 없는 것을 찾아 발끝으로 파헤쳤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파지도 않았는데 시체의 다리토막이 발끝에 걸렸다. 카시야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감을 펼쳐 봐도 근처에는 살아있는 자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무덤 위의 돌을 옆으로 굴리고 흙을 다 파헤치니, 장의사들의 말처럼 기괴할 정도로 비쩍 마른 남자의 시체가 드러났다.
'확실히 이건 뭔가 인위적인데…?'
오랜 시간 기아에 시달린 시체라고 보기에도 꺼림칙할 정도로, 시체는 피골이 상접해있었다. 그러나 카시야가 그 시체의 사인이 굶주림이 아니라고 확신한 이유는, 그렇게나 비쩍 마른 시체인데도 손톱이나 머리카락은 멀쩡했기 때문이다. 손톱과 머리카락의 상태만 본다면 꽤나 젊은이의 시체였다.
그 때 장의사들이 한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치 뭔가에 빨려 죽은 것 같이 비쩍 마른 시체가….'
그들의 말처럼, 멀쩡하던 사람이 뭔가에 쪽 빨린 것 같은 형상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죽인 거지?'
카시야는 풀리지 않는 의문을 곱씹다가 결국 포기하고 시체를 다시 묻기 위해 그 위로 흙을 덮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순간 뭔가를 발견한 카시야는 도로 흙을 파냈다.
'이게 뭐지?'
흙을 제대로 치우지 않아 미처 보지 못했던 시체의 명치 쪽에는 에르논의 명치에 있는 것과 비슷한 문양이 시커멓게 그려져 있었다. 에르논의 것과 똑같지는 않았지만 연관성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비슷한 이미지였다. 카시야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체의 눈꺼풀을 벌려 그의 눈동자를 확인했다. 오늘 묻은 시체라 그런지 아직 남아있는 눈알은 제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풀어진 동공의 눈동자는 연하늘색이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 보랏빛이 실낱같이 존재했다.
'마법사의 시체다…!'
카시야는 한동안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불길한 기운에 잠식당했다. 그녀의 직감이, 이 시체는 사형수가 아니라 살해당한 마법사라고 말하고 있었다. 황제는 뭔가 알 수 없는 실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국 전체에서도 마법사는 귀한 인재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황제는 그 마법사들을 황궁으로 끌어 모으고 있었고, 이렇게 기괴한 시체를 몰래 갖다버리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카시야는 다시 시체를 묻었다. 옆으로 밀쳐두었던 돌덩이를 갓 덮은 흙 위에 올려두면서 그 밑에 깔린 이의 명복을 빌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기분이 정말 좋지가 않았다.
============================ 작품 후기 ============================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ㅗㅠ
이렇게나 많은 격려들을 해주실 줄은 몰라서.. 제가 징징거린 것 같아 죄송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제가 쓰는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아.. 이럴 때 연참 뽝 해주면 정말 훈훈한 마무리거늘... 비축분 간당간당한 자까는 일일연재분도 겨우 올립니다.ㅠㅗㅠ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