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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53화 (5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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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셀이 나선 전투는 타셀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타셀이 마법을 쓸 수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던 케일런군의 수장들은 전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후방부대부터 재빠르게 후퇴시킬 수밖에 없었고, 전방에 남겨져 싸우던 병사들은 속절없이 칼끝에 스러져갔다. 하지만 케일런군의 가장 뼈아픈 손실은 바로 에르논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에르논의 공격을 막아낸 것은 물론, 파동의 힘을 반대로 튕겨내 공격까지 감행한 타셀군은 잠시의 빈틈도 주지 않고 케일런군을 몰아붙였다. 아마 에르논이 마력폭발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루크가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 하더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타셀군이 다가온 시점에서 에르논은 마력폭발을 일으키며 쓰러졌고, 마력폭발만큼은 타셀도 전부 다 막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거침없던 진격이 잠시 멈춰졌다.

그 덕분에 루크를 비롯한 케일런군은 후퇴할 시간을 벌었지만 타셀이 펼친 배리어 덕분에 타셀군의 피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고, 전열을 다시 갖춘 그들은 곧 물밀듯이 전장을 덮쳤다. 그곳에서 에르논을 되찾아오기란 거의 불가능하기도 했고, 누가 보더라도 그가 살아있을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살아있는 병사의 목숨을 보전하기도 바쁜데, 시체를 빼내올 여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참담한 분위기의 케일런군 진영에 케네스 라펠 알리스타스 공작이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각하. 제대로 된 예를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네. 치료를 계속하게."

루크는 침상에 누워 어깨의 상처를 치료하던 상태로 공작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부상자들이 많다보니 마취제로 쓰이는 약초가 턱없이 부족해서 루크 자신은 생살을 꿰매는 중이었다. 상대방의 칼날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허락지 않던 루크였지만, 아군의 도주로를 확보하려고 미하일 이외의 적군들까지 해치우려다보니 빈틈이 생겼던 것이다. 미하일의 검기를 정통으로 맞는 건 가까스로 피했는데도 그의 어깨에는 긴 자상이 남았다. 하지만 덕분에 그를 따르던 기사들의 목숨을 여럿 구할 수 있었다. 케일런군 역시 상급 기사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알리스타스 공작은 곳곳에서 부상자의 신음이 흐르는 병영을 둘러보다가 그를 위해 마련된 막사 안으로 들어서며 그를 안내하던 기사 크리스탄에게 물었다.

"그래, 에르논은 죽은 것 같다고?"

"예. 죄송합니다. 2황자가 마법을 쓴다는 것은 전혀 몰랐었기 때문에…."

"설마하니 2황자가 마법까지 쓸 수 있을 줄이야…. 타셀…. 얌전한 척 하더니 아주 교활하기 짝이 없군."

알리스타스 공작, 케네스의 호박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곧 주변을 물린 그는 품에서 곱게 접은 갈색 비단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비단의 갈색은 염료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는 하얬던 비단 위에 그려진 마법 문양은, 그 문양을 적신 피의 주인을 언제나 추적해왔다. 케네스는 익숙한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마법 문양 위로 에르논의 위치를 알리는 빛이 떠오르지 않았다.

'쯧. 정말로 죽어버렸나. 1황자가 승리하기 전까지는 죽어선 안 되는 놈인데…. 아냐, 천한 놈이지만 어쨌든 대마법사다. 아직 죽었을 리가 없어. 마력 폭발을 쓴 뒤라 마법진에 반응할만한 마력이 모이지 않은 것뿐일 게야. 나중에 다시 한 번 확인해보면 알 수 있겠지. 하지만 타셀 쪽에 포로로 잡혔다면….'

케네스는 여러모로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희망적인 상황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살아있다 하더라도 타셀이 에르논을 살려둘 리가 없지. 조만간 에르논의 목을 창끝에 꽂고 공격해올지도 모르겠군. 에르논, 그 멍청한 녀석. 누가 창녀의 새끼 아니랄까봐 멍청하기 그지없어. 쓸모없는 자식!'

이제껏 에르논을 실컷 써먹어놓고도 케네스는 그를 쓸모없는 놈 취급을 했다.

케네스는 에르논을 '소유'하기 위해 그를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일만 생각하면 열불이 났다.

뒷골목에서 일어난 가벼운 마력폭발의 소문은 암암리에 고위 귀족들 사이에 퍼졌다. 평소 마법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 늘 정보를 끌어 모으고 있던 케네스는 그 소식을 가장 빨리 접한 귀족 중 하나였다. 그 소문을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설마 그 당사자가 자신의 아이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남들보다 먼저 선수를 치기 위해 접근해보니, 그 아이는 자신이 버렸던 창녀의 손에서 길러지고 있었고, 비통하게도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리게 할 만큼 닮은 구석이 있었다. 한 달 동안 실컷 갖고 놀던 창녀를 죽을 만큼 매질해서 숲에 버려놨는데 설마 살아있었을 줄은, 심지어 자신의 아이까지 배었을 줄은 몰랐다. 물론 가장 황당한 건 그 아이가 대마법사의 피를 타고 났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공작가의 사람들은 만약 공작이 그 한 달 동안 공작부인과 동침했었더라면, 아니, 그 창녀가 임신하지만 않았더라도 공작가 내에서 대마법사가 탄생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랬기 때문에 공작의 어머니는 그 창녀를 확실히 죽이지 못했던 것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어쨌든 대마법사의 피를 타고난 에르논을 확실히 손에 넣기 위해, 케네스는 사교계에서 수모를 당할 것을 각오하고 그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른 귀족들이나 황제에게 에르논을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에르논의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는 그만큼이나 희귀했고, 그만큼이나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에르논을 손에 쥘 수는 있었지만, 그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 떠돌던 자신에 대한 추문은 잊을 수가 없었다.

창녀에게 자식을 봤다는 소문이 자신을 얼마나 조롱거리로 만들었던가. 창녀를 침실에 들였다는 것 자체가 그 귀족이 '독특한' 취향을 가졌음을 반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귀족 영애나 부인과 바람을 피우면 될 일이었으니까. 사실 귀족들 중에 케네스만큼 독특한 취향을 가진 이가 적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갖고 놀던 창녀나 노예, 혹은 일반 평민에게 낳은 사생아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에르논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던 귀족들은 에르논의 공작가 입적에 대해 엄청난 입방아를 찧어댔다. 연애소설을 좋아하는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는 한동안 공작과 창녀 사이의 애틋한 로맨스 소설이 인기를 끌기까지 했더랬다.

분통이 터지기는 하지만 에르논이 마법사인 것을 함부로 드러내지도 못했던 케네스는 쌓이던 분노를 에르논을 향해 쏟아냈다. 그가 창녀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골치 아픈 문제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뼛속부터 오만하기 그지없는 알리스타스 공작가는 '남 탓'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작가의 명성만 신경 쓰며, 남들은 평생 한 번 만나보기도 어려운 대마법사를 버러지 취급했다.

하지만 에르논이야말로 케네스가 케일런의 최측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나 다름없었다. 물론 5대 공작가문 중 하나라는 가문의 위세도 대단했지만, 역시나 그 중 하나이자 황제의 사촌씩이나 되는 알반 공작가보다 케일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에르논을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 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케네스의 두 아들은 에르논을 더더욱 증오했고, 에르논을 매질하는 자리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와 채찍을 들었다.

그랬던 에르논이지만 벌써 없어지는 것은 공작의 계산 밖이었다. 케일런군이 타셀군에게 밀리는 모양새인 지금, 에르논이 없는데다 타셀이 에르논에 필적하는 마법까지 쓴다면, 이 전쟁의 결말이 불 보듯 뻔했다. 그는 전에 없이 초조해졌다.

*

"진짜 살려두실 겁니까?"

미하일이 무표정한 타셀을 향해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미하일 옆에 선 지크의 표정도 별로 좋지는 않았다.

타셀의 막사 안에는 또 하나의 침상이 놓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목숨이 겨우 붙어있을 뿐인 에르논이 누워있었다. 마침내 낯짝을 보게 된 '알리스타스 공작의 개'는, 일전에 스윈델이 말했던 것처럼 곱상하고 선이 가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생겼든 간에 타셀에게 있어서는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간 악마일 뿐이었다. 에르논 때문에 다 이긴 전투를 몇 번이나 놓쳤던 미하일 역시 당장이라도 에르논의 목을 따서 적의 진영으로 던져놓고 싶었다.

"카시야 경이 부탁하더군."

"…예? 진짜요? 에르논에게 잡혀있을 때 그가 좀 잘 대해줬다는 것 같기는 했지만, 설마 그 때의 정 때문에 살려달라고 한 건 아니겠지요?"

"글쎄."

눈앞의 에르논을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은 것은 타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개숲에서 그의 마력폭발로 얼마나 많은 병사를 잃었던가. 카시야 역시 그곳에서 죽을뻔한 병사였다. 그랬으니 카시야가 되도록이면 그를 살려달라고 했을 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르논이 원해서 알리스타스 공작의 밑에 있는 게 아니라고는 해도, 그가 카시야를 죽일뻔한 사람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카시야는 덤덤했고, 결국 타셀은 카시야가 에르논을 이용해 전투의 향방을 바꾸려고 한다고 애써 믿었다. 하지만 막상 붙잡은 에르논의 외모를 보니 카시야가 그에게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지고 말았다.

"그나저나 스윈델이 남창이라고 깜빡 속아 넘어간 것도 이해가 되네요. 사내새끼가 비리비리해서는…."

미하일의 발언에 지크가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저게 취향인 여자가 있을 수도 있지."

"…설마 카시야가…? 에, 에헤이. 아냐. 아무리 그래도…. 아니지. 자신과 반대의 타입에 끌리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니까, 의외로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타입에 끌릴 수도 있겠네."

"그렇지. 맨날 웃통 벗고 구르는 근육질 사내새끼들만 보다보면, 귀족적이거나 야리야리한 놈이 좋아 보일 수도 있지."

"…둘 다 시끄러워."

카시야의 취향에 대해 이런 저런 추측을 늘어놓는 미하일과 지크에게 타셀이 낮게 으르렁댔다. 가끔씩만 보이는 타셀의 무시무시한 눈빛에 쌍둥이 기사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화가 난 타셀에게는 절대 농담이 통하지 않았다.

"굳이 카시야 경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나 역시 이 자를 생포할 수 있길 바랐다. 우리 쪽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되면, 그 때 죽여도 늦지 않겠지."

그의 말에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개숲 작전 때 에르논을 생포하면 쓰려고 만들어둔 구속구가 드디어 쓸모를 갖게 되었다. 에르논의 목에는 백금으로 된 굵은 사슬이 걸려있었다. 어떻게 보면 남성적인 장신구로도 보이는 그것은, 오직 에르논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강력한 마력 구속구였다. 그것을 목에 걸고 있는 한 그는 자신의 마력을 쓸 수 없는 것은 물론, 그 목걸이에 손조차 댈 수 없을 터였다.

"혹시 모르니 마력 억제제도 진하게 달여서 먹이도록 해. 감시를 게을리 하지 말고. 저 상태로는 우리 쪽 병사가 에르논을 암살하려는 걸 막아야 할 테지만."

"뭐…. 누가 죽이는 것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금방 숨이 넘어갈 것도 같구만."

어느새 상태가 안 좋아진 에르논이 숨을 꼴깍거리고 있었다. 타셀은 짜증난 표정으로 에르논의 가슴에 손을 얹고 그가 죽지 않을 만큼만 마나를 불어 넣었다. 카시야에게 마나를 넘겨줬을 때에는 그렇게도 뿌듯했던 기분이, 지금은 역겹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지금이라도 힘을 주면 에르논의 가슴뼈 정도야 쉽게 부서트릴 수 있다는 것을 아는지라 더더욱 참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타셀은 머리를 냉철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에르논을 이용해 알리스타스 공작이나 루크 페레이아를 칠 수도 있을 터였다.

"우리 군의 피해 상황과 적군의 상황을 정리해서 보고해라."

에르논의 가슴에서 손을 뗀 타셀은 마지막으로 그를 차갑게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나가면서 미하일과 지크에게 명령했다. 에르논은 여전히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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