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4 악마의 계약자(1) =========================
어느덧 해가 졌다. 비상식량을 구입하고 피엔의 입구에서 스윈델을 만난 카시야는 타노버를 향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웬 타노버입니까? 거기에 뭐가 있나요?"
"음. 확인해봐야 할 게 있어서. 혹시 헬라스라는 대마법사를 아나?"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뭣 때문에 그러십니까?"
"과거에 죽음의 기사인지 귀신 병사인지를 만들었다던데…."
"아! 그 악마요? 알죠! 제국에서 그 악마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모두가 당연히 아는 것을 묻는 카시야를 볼 때마다 그녀가 기억을 잃은 것이 실감난다고 생각하며, 스윈델은 헬라스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그 마법사 이름이 헬라스인줄은 처음 알았네요. 사람들은 다들 '악마'나 '악마의 계약자'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생각해내는 것들이나 이뤄내는 것들이 악마랑 계약한 것 같다고 말이죠."
"혹시 그가 만들어낸 죽음의 기사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아는 게 있나?"
"저도 직접 보지는 못했고 전해 들었습니다만, 일단 다들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하고 표정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움직이기는 움직이는데, 뭐랄까, 여럿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움직이기도 했다더군요. 헬라스가 움직이는 것이었을 테니 그럴만도 하지만요. 하지만 그걸 눈앞에서 직접 보면 정말 소름 돋는대요."
스윈델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지 제 팔뚝을 쓸었다.
'꼭두각시들을 만들었었나 보군. 하지만 그 군사 전체를 헬라스 단 한 사람의 마력으로 움직였다고? 그 정도로 강한 마력이 있었다면 차라리 황궁으로 직접 가서 황제를 없애버리는 편이 쉬웠을 텐데….'
카시야는 헬라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정말 반역을 꾀했었다면 죽음의 기사들을 만드는 것보다 쉽고 빠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 정도의 마력을 가진 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천만다행하게도 그 악마가 만들어낸 죽음의 기사는 실패로 끝났죠. 겁없이 달려들기는 하는데 스스로 생각하고 싸우는 게 아니기도 하고, 무력이 세지도 않아서, 죽이기는 굉장히 쉬웠다더라고요. 그 악마가 아주 작정을 하고 죽음의 기사 군단을 만들었는데 제국군에 싱겁게 패했고, 그 악마는 반역죄로 잡혀 죽었답니다."
"그게 불과 10년 전이라고? 제국을 완성한 이후로도 문제가 많았군."
"네. 아마 그쯤 됐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제국이 평화로운 적은 거의 없었어요. 제국이 완성 된지도 15년 정도밖에 안 됐잖습니까. 완성이라고는 하지만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분쟁은 늘 있었으니까요."
이 세계 사람들은 전쟁에 너무 익숙했다. 삶의 일부분이 전쟁일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그 악마는 왜 물어보십니까?"
"아. 뒷골목에서 우연히 주워들어서. 어쨌든 그는 이젠 죽고 없다는 거지?"
"그렇죠. 그 때 죽음의 기사를 만든 걸 다른 대마법사들도 엄청 비난해서, 다들 힘을 합쳐서 그를 잡아 죽였거든요. 소문으로는 황궁 성벽 밖에 효시됐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죽은 건 확실할겁니다."
카시야는 헬라스의 저택에 부디 에르논의 속박 마법과 관련된 책이 있기를 바라며 박차를 가했다.
타노버의 룬 마을에 도착한 것은 피엔에서 출발한지 만 하루가 되었을 즈음이었다. 과거에는 꽤나 사람이 살았을 것 같이 곳곳에 허물어지다 남은 집터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지금은 을씨년스럽게 잡초가 무성한 마을이었다. 그것은 리치엘 저택 근처로 다가갈수록 심해져서, 저 멀리 저택이 보이기 시작한 부근부터는 사람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기분 나쁜 곳이네요. 여긴 왜 온 겁니까?"
"저 저택에서 찾아봐야 할 게 있거든. 일단 오늘은 마을에서 묵고 내일 아침에 저 저택으로 갈 거다. 하지만 괜히 입을 놀리지는 마. 우리는 를뤼엔에서의 기도회를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남매, 에텔과 르윈인거다. 알았지?"
"네? 네에…. 알겠습니다."
스윈델은 영 내키지 않는 대답을 하며 저 멀리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괴기스런 저택을 쳐다보았다. 웬만하면 가까이 다가가기 싫은 곳이었다.
카시야와 스윈델은 도로 민가가 그나마 남은 마을로 들어가 한 여관에 방을 잡았다. 마을의 살풍경한 모습 때문인지 사람들도 영 매가리가 없었다. 여관 1층의 식당이 그 마을의 가장 큰 식당이었는데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손님이 많지 않았고, 그나마 있는 손님들도 아무 말 없이 제 앞에 놓인 음식만 먹고 있을 뿐이었다. 카시야와 스윈델은 독실한 히드레이 교도인척 하느라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히드레이 주기도문을 외웠다.
"입은 것도 그렇고, 기도하는 모양새도 그렇고…. 혹시 를뤼엔에 다녀오시는 건가요?"
음식을 갖고 나온 여관 안주인이 흥미가 생긴 듯 살갑게 물어왔다.
"아, 예. 기도회에 갔다가 이제 고향으로 내려가는 중입니다."
"그럼 혹시 성녀님을 눈으로 직접 봤나요?"
"너무 멀리서 봐서 사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성녀님의 축복은 받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예요."
스윈델은 능숙하게 여관 주인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카시야는 제법이라 여기며 식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물자가 부족하다거나 전염병이 도는 것도 아닌데 이 마을은 확실히 어딘지 힘이 빠져 있었다.
"이 곳은 처음입니다만, 굉장히 조용한 마을이네요."
카시야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안주인은 조금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딱히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뭐, 좋게 말해 조용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께름칙한 거겠죠? 하지만 불과 10년 전쯤만 해도 여기는 꽤 큰 마을이었답니다.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요. 그 망할 백작 아들만 아니었어도…. 쯧."
"아, 이곳이 그 대마법사가 나온 지역이었죠? 아주머니도 혹시 그 악마 얼굴을 본 적이 있으세요?"
카시야가 모르는 척 대마법사의 얘기를 꺼냈다. 그제야 그 마을이 헬라스가 살던 곳임을 깨달은 스윈델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카시야를 쳐다보았다.
"얼굴을 보다 뿐이겠어요? 난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고요. 그 집에서 대마법사가 나왔다고 해서 얼마나 위세가 대단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 악마는 옛날에도 음침하니, 보기에 기분 좋은 인상은 아니었죠. 어쨌든 그 인간 하나 때문에 마을 전체가 풍비박산난 거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민다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그 백작 저택은 아직도 남아있는 거죠?"
"그 악마가 씐 집에 누가 가까이 가고 싶겠어요? 그 집에 물건을 훔치러 간 사람 중에 돌아온 사람이 없대요. 손님들도 그 저택 근처는 피해 가세요. 큰일 납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관 주인은 어리바리한 시골 남매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푸근한 미소를 지어보이다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여관 주인이 사라지자 스윈델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카시야에게 물었다.
"헬라스의 저택을 찾아온 겁니까? 어쩐지 그 악마에 대해 묻더라니…. 정말 그 저택에 가시려고요? 가서 뭘 할 건데요?"
"찾아야 할 게 있어. 무서우면 넌 여기 있던가."
"하, 참 나. 무섭긴요. 분대자, 아니, 누님의 지옥훈련도 겪었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스윈델은 짐짓 여유로운 척 했지만 카시야의 눈에는 그의 초조함이 빤히 보였다. 스윈델의 담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저택을 찾아가 보는 건 필요할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카시야와 스윈델은 여명이 밝을 때쯤 여관을 출발했다.
여관을 출발할 즈음엔 분명 맑은 하늘이었건만, 저택이 가까워질수록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저택 근처는 음습한 안개가 가득 껴 있었다.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멀리서는 그 저택이 보였는데, 그 저택 근처로 다가가자 안개가 가득했다.
'아닌 게 아니라 뭔가 이상하긴 하군.'
아직 마법으로 뭐가 가능한지 다 알지 못하는 카시야였지만 리치엘 백작저와 그 주변에 독특한 힘의 기운이 서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윈델을 흘끗 바라보니 그는 이미 창백해져 있었다.
"무서우냐?"
"무, 무섭긴요! 시원하니 좋네요! 하하!"
카시야는 피식 웃으며 말의 속력을 줄였다. 어느새 백작저의 대문에 다다라 있었다. 저택의 대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지만 녹이 슨 창살이 삐걱대며 매달린 모습은 방문자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었다. 말에서 내리려고 바닥을 내려다 본 카시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흙바닥 위에는 많이 흐려지긴 했지만 분명히 말발굽 자국이 남아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폐가라면, 그런 것이 저택 대문 앞에 남아있을 리 없다.
"저택까지는 정원 외곽 쪽을 돌며 접근하자. 따라와."
대문에서부터 저택 입구까지 난 길 위에 버젓이 말발굽 자국을 남기는 것은 위험하다고 느낀 카시야는 말에서 내려 대문 앞에 난 자신들의 말발굽을 지우고 정원의 비껴난 길을 따라 걸었다.
리치엘 백작가의 위세가 대단했었는지, 대문에서부터 저택 입구까지는 꽤 멀었다. 말을 저택의 후문 쪽에 메어 둔 그들은 조심스럽게 저택의 뒷문을 밀어보았다. 방문자를 꺼리는 저택의 분위기와는 달리, 문 자체는 수월하게 열렸다. 카시야는 기감을 넓혀 인기척을 살폈지만 저택 안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택 내부는 얼마 전까지도 사람이 살았던 것처럼 정갈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창문에는 뜯어진 곳 없는 묵직한 커튼이 제대로 달려 있었고 벽마다 화려한 그림이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먼지는 쌓여있었지만 어디 하나 이지러진 곳 없는 물건들이 넘어지지도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0년이 넘게 버려졌던 폐가라기엔, 생각보다 너무 멀쩡한데?"
"바, 바로 그 부분이 더 꺼림칙하다고는 느끼지 않으십니까?"
달달 떠는 스윈델을 뒤로 하고 카시야는 성큼 성큼 걸어 저택 안을 살폈다.
"가, 같이 좀 가요!"
스윈델이 질겁을 하며 따라왔다.
"보통 귀족 저택에서는 서재나 서고를 어디다 둘까?"
"책은 아무래도 습기에 약하니까 지하에 서고를 두지는 않죠. 제가 기사로 있던 자작가에는 2층에 서재가 있었습니다."
"네 말대로 지하나 1층에는 없을 것 같으니 2층을 찾아보자."
카시야와 스윈델은 넓디넓은 저택의 문을 하나씩 열어보며 서재를 찾았다. 결국 2층 복도의 끝에서 도서관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거대한 서재를 찾은 그들은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라며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뭘 찾으시겠다는 겁니까?"
"책을 하나 찾아야 해."
"이 많은 책들을 언제 다 찾아보시게요?"
스윈델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카시야 역시 막막한 참이었다. 일반 서재 수준을 생각했다가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다. 뽀얀 먼지가 공기 중에 떠다니는 것 같은 서재 안의 그 엄청난 장서를 둘러보며 카시야는 집게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의 돌기를 만지작거렸다.
'어디서부터 찾는다….'
어딜 둘러보아도 책들은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이 책들을 한 권씩 뽑아보며 찾으려면 일주일을 갖고도 무리였다. 그때 그녀의 기감에 저택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말발굽의 진동이 걸려들었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경직된 카시야를 보며 스윈델은 바짝 긴장했다.
"…누군가 오고 있다."
나직한 카시야의 목소리에 스윈델의 눈이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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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잇! 광복절 특사도 있는데, 광복절 연참도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마침 선작도 7,000 찍었네요!)
대한 독립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