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5 악마의 계약자(2) =========================
서재는 들어온 문 외에는 다른 문이 존재하지 않았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쪽으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어. 스윈델, 이 뒤에 숨어서 최대한 조용히 있어. 잠드는 것처럼 네 기운을 옅게 해야 된다. 전에 내가 명상하는 법 가르쳐준 거, 잊지 않았겠지?"
"그, 그, 그렇기는 한데, 누, 누가 온다는 겁니까?"
"나도 몰라. 기사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사람 같지도 않아. 조용히 지나가주기만을 바라야지. 단검은 손에 쥐고 있어라."
하지만 스윈델의 손은 이미 떨리고 있었다. 카시야는 그의 뺨을 가볍게 쳤다.
"정신 차려! 넌 타셀 전하의 특수 분대원이다. 지금 네 동료들 역시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이고 있어! 부끄럽지는 말아야지."
그제야 떨림이 잦아들었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그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떠올랐다. 그런 그의 뺨을 다시 툭툭 치고, 카시야 역시 근처의 책장 뒤에 몸을 숨겼다. 저택에 방문한 이가 저택의 1층이나 다른 방에 볼 일이 있길 바랐지만 안 좋은 예감대로 그들은 곧장 서재로 다가왔다. 그들은 2층으로 올라오며 조심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태도로 대화를 나누었다.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이거 무슨 똥개 훈련도 아니고, 매번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거 짜증나 죽겠다니까."
"어쩌겠냐. 여기 있는 책을 갖고 나갈 수는 없으니."
"역시 대마법사랄지…. 이 저택에 무슨 마법을 걸어둔 건지는 스승님도 전혀 모르시겠다지?"
"그냥 일반적인 마법은 아니라고 하더라고. 기존 마법을 몇 번이나 더 꼬아서 만든 술식 같은데, 대마법사의 술식을 일반 마법사가 따라갈 수 있겠냐."
"조만간 몇 명을 여기 상주시키면서 헬라스가 쓴 책만 필사를 시킬 거라는 소문이 있더라. 근데 여기 오래 머물면 사람이 살짝 맛이 간다던데, 괜찮으려나?"
"우리만 안 걸린다면야 상관없지. 쓸 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필사할 준비나 해라."
서재에 들어온 그들은 서재 가운데 있던 테이블 위에 뭔가를 풀어놓는 것 같더니, 익숙한 태도로 서재 2층에 가서 어떤 책을 끄집어냈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소리를 들어보니 꽤나 묵직한 책 같았다.
"자아, 어디 보자. 이 술식도 아니라고 하니까, 이번엔 이걸 베껴 가야겠구나."
"넌 오른쪽 페이지 베껴, 난 왼쪽 할 테니까.
"빨리 하고 가자. 소문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 집은 역시 기분이 나쁘거든. 지금도 누군가 여기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아,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난 귀신 얘기에 약하다고."
카시야와 스윈델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그들이 '누군가 있는 것 같은 느낌'에 관심을 꺼주길 바랐다. 그 이후로는 그들도 종이 위를 긁는 펜촉의 소리만 사각사각 내며 필사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얘기를 들은 카시야로서는 한 가지 골치 아픈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고 말이다.
'여기 물건을 밖으로 갖고 나갈 수가 없다고? 필사할 종이나 펜도 없는데, 이걸 어쩐다…. 책을 찾아낸다 해도 필사할 도구가 없으면 말짱 헛수고라는 말이잖아.'
카시야와 스윈델은 가만 숨죽인 채 그들이 일을 끝내고 떠나기만을 기다렸다. 두 시간 가량이 지나자 테이블에서 필사를 하던 두 남자는 일이 거의 끝났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카시야는 그들이 어떤 책을 꺼냈는지 살펴보고 싶었지만 워낙에 주변이 조용해서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속이 바싹바싹 타는 와중에 그녀는 집게손가락의 반지를 습관적으로 만지작거리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머리를 짜냈다.
"야, 다 됐지? 얼른 가자."
"어, 잠깐. 이거 치우고."
"너 바보냐? 어차피 하룻밤이 지나면 이 집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잖아. 그냥 어질러놓고 가도 다음에 와보면 깔끔하게 정리돼있을 텐데 뭐 하러 이 집에서 더 있으려고 해? 그냥 둬. 얼른 가자. 여기 기분 나쁘다고."
"으…. 그게 더 기분 나빠. 내가 치워두고 가면 내가 치워둔 상태 그대로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이대로 두고 갔다가 다음번에 다 치워져있으면… 귀신이 있는 것 같잖아. 이거 치우고 갈래."
"아, 진짜 짜증나게 하네. 야. 내가 너 겁낼까봐 잠자코 있었는데…. 여기… 진짜로 뭔가 있는 거 같아. 미묘하게 숨소리 같은 게 난다고. 씨팔!"
남자의 속삭이는 듯한 말에 카시야와 스윈델은 순간 숨을 멈췄다. 말을 한 남자는 남들보다 청각이 좋은 건지, 감이 좋은 건지, 그들이 숨을 멈춘 것까지 느낀 것 같았다.
"으으…. 나, 나, 나는 나갈래. 수, 숨소리가… 머, 멈췄어…."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상대방은 이미 의자를 우당탕 쓰러트리며 서재의 문간으로 달렸다.
"같이 가, 개새끼야! 으아아아아악!!!!"
그들이 내는 비명소리는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도플러 효과처럼 점점 멀어지는 소리에 카시야와 스윈델은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으… 흐으으으…. 심장 멎는 줄 알았네."
스윈델은 주저앉은 채로 헉헉댔지만 카시야는 재빨리 아까 그 남자들이 어지럽히고 간 테이블로 다가갔다.
'하늘이 돕는구나.'
테이블 위에는 그들이 보던 책이 그들이 보던 페이지 그대로 펼쳐져 있었고, 종이와 펜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카시야는 그 책을 살펴보았다. 단단하게 바인딩 된 책의 두꺼운 가죽 표지에는 <마력과 마나의 외부 조작>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고 그 아래 '헬라스 알렌 리치엘'이라는 저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책은 두툼했으나 몇 장 뒤적여본 결과 카시야는 그녀가 찾던 책이 이것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에르논과 비쩍 말라 죽은 시체의 명치에 있는 것과 비슷한 문양이 몇 페이지에 하나씩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책이 너무 두꺼웠고, 문양들이 다 비슷비슷해보였다는 것이다. 카시야는 자신이 기억하는 에르논의 문양과 시체의 문양을 다급하게 종이에 그려 넣었다. 그리고는 책의 앞표지를 걷었다.
'목차가 있구나. 일을 좀 줄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두꺼운 책이라 그런지 목차가 세세하게 나뉘어있었다. 마력과 마나의 정의, 마력과 마나의 흐름, 마력의 부여, 마력 소유자의 확인 등 마력과 마나에 관해서는 자세히 서술된 듯해서 그 책 자체를 들고 나가고픈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에르논을 속박하고 있는 문양부터 빨리 찾아야 했다.
'마력의 속박, 마력과 마나의 흡수, 마력의 통제…. 굉장히 신경 쓰이는 제목들인데….'
카시야는 재빨리 '마력의 속박' 장을 펼쳤다. 목차와 간단한 설명은 그녀가 읽을 수 있는 글자였지만, 문양의 그림 아래로 쓰인 글자들은 읽을 수 없는 글자였다. 필사를 하려면 글자를 하나하나 보면서 따라 그려야 하는 수준이었다. 카시야는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그녀가 기억하는 그 문양을 찾기 위해 집중했다.
카시야가 책장을 넘기며 문양을 찾는 동안 스윈델은 주변을 살폈다. 책장의 책 몇 권을 꺼내 살펴보기도 했지만 그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책들이었다. 그는 거대한 서재를 돌아다니며 뭔가 특이한 것은 없는지 찾았다. 아까 왔던 남자들이 서재 2층에 있는 책을 뽑아왔던 것을 떠올리며 2층으로 올라가 책장을 살폈다.
서재 안을 걸어 다니는 스윈델의 발걸음 소리와 카시야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가득 찬 서재는 시간이 멈춘 듯 했지만, 카시야의 시간 감각은 한 시간 정도가 금방 흘렀음을 느끼고 있었다. 카시야는 초조하게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 드디어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멎었다.
'찾았다!'
잊을 수도 없는 문양이 한 페이지의 중간쯤에 그려져 있었다. 카시야는 서둘러 펜을 들고는 그 문양을 제대로 그린 뒤 그 아래 쓰인 글자들을 따라 그렸다. '글자'라기 보다는 '그림'으로 인식되는 그것들을 필사하느라 속도가 나지 않았지만 그녀로서는 최선을 다해 따라 그릴 뿐, 별다른 수가 없었다. 필사를 하다 보니 아까의 그 두 남자가 두 시간 만에 꽤나 많은 페이지를 필사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자들이라면… 마법사들이었군. 스승님 운운할 때부터 그런 것 같긴 했지만.'
'똥개 훈련'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던 데다가 갓 변성기를 지난 듯했던 그들의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분명 하급 마법사들이었을 것이다. 그건 카시야들로서는 정말 행운이었다. 상급 마법사였다면 카시야와 스윈델의 기척을 느꼈을 것이고, 카시야의 무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마법을 상대하기는 벅찼으니까.
카시야는 서둘러 에르논의 문양 아래 술식을 옮겨 적었다. 하지만 몇 페이지에 걸친 그 술식을 옮겨 적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창밖은 점점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몇 시간에 걸쳐 겨우 필사를 완료한 카시야는 그 종이를 품 안에 잘 넣어두었다. 그리고는 시체의 가슴에 있던 문양을 찾기 시작했다. 이 책의 목차를 처음 봤을 때부터 어디를 찾아야할지 감이 잡혔다.
'마력과 마나의 흡수…!'
'마력과 마나의 흡수' 장은 책의 마지막 부분이었고, 페이지가 많지 않았다. 그때 2층에서 스윈델이 카시야를 불렀다.
"분대장님. 하시는 일 끝나시면 이쪽으로 한 번 와보십시오."
카시야는 책에서 고개를 떼고 스윈델이 있는 쪽으로 뛰어 올라갔다.
"왜?"
"이거… 황가 문양 맞죠?"
스윈델은 서재의 제일 안쪽 책장열의 구석에서 책 모양의 비밀금고를 열어본 참이었다. 그 안에는 황가의 문장이 찍힌 편지봉투가 몇 장 들어있었다. 그 봉투 안에서 꺼낸 편지는 헬라스에게 온 황제의 친서였다.
「친애하는 대마법사 헬라스.
그대의 제안은 굉장히 흥미롭게 받아 보았소. 그대의 충심이 우리 칼리스토니아 제국의 부흥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오. 황실은 그대의 연구에 적극 지원할 것인 바, 원하는 바를 알려주기 바라오.
- 알테리온 타노스 에반 아마리스」
「친애하는 대마법사 헬라스.
그대의 서한은 잘 받아보았소만, 그대가 원하는 것을 다 맞추는 것은 무리요. 2/3 수준까지는 맞춰줄 터이니, 그대의 뛰어난 능력으로 부디 실험에 성공해주기 바라오. 그대의 충성심은 후세 대대로 칭송받을 것이오.
- 알테리온 타노스 에반 아마리스」
「친애하는 대마법사 헬라스.
그대의 여동생으로부터 실험에 성공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들었소. 왜 더 일찍 알리지 않은 것이오? 그대가 제국에 불충한 마음을 먹었을 리는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대를 안 좋게 보는 눈들이 있으니 하루라도 빨리 그대의 완성작을 제국의 품에 안겨주기를 바라오. 제국은 앞으로도 그대를 지원함에 최선을 다하겠소.
- 알테리온 타노스 에반 아마리스.」
"이건 왠지… 헬라스가 황제에게 이용당했다는 느낌을 주는 편지들이군."
카시야는 마지막 편지의 끝까지 읽은 뒤 도로 접어 넣으며 말했다. 스윈델 역시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이런 걸 찾아낸 거냐? 제법인데?"
"아, 아뇨. 그게…. 이 책이 꽂힌 책장 앞에만 먼지가 없더라고요."
비밀금고로 쓰인 책을 여러 번 꺼냈던 것인지 그 앞에만 먼지가 쓸려나가고 없었다. 스윈델이 찾아낼 정도라면 황제의 개들이 찾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황제에게 불리한 이 편지들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은, 아까 마법사들의 얘기가 사실이라는 데 무게를 두게 만들었다.
"하…. 이 집안의 모든 게 하룻밤 지나고 나면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아까 그 얘기가 사실인가 보구나. 황제의 개들이 여길 다 들쑤셨다면, 이 편지들을 태우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이 편지의 내용으로 보자면, 악마의 계약자는 헬라스가 아니라 황제였을 수도 있겠어."
황제가 벌인 짓에 대해 흥미를 느끼는 카시야와는 달리 스윈델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그나저나 진짜 꺼림칙한 저택이네요. 우리 얼른 나가면 안 될까요?"
"아직 더 찾아봐야 할 게 있다. 조금만 더 기다려."
그녀는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책의 마지막 장(章)을 뒤졌고 금방 시체에 새겨졌던 문양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곧 시체의 사망 원인을 찾아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시야는 그 문양 아래의 술식도 베끼기 시작했다. 그런데 술식의 나머지 부분이 있는 그 다음 페이지가 비어 있었다. 뭔가가 쓰였던 흔적은 있는데, 마치 잉크들만 증발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카시야는 책을 기울여 펜압에 의해 새겨진 글자를 살펴보려 했다. 어느 정도는 보였지만 완벽한 글자를 유추하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미완의 필사본이 되어버린 종이를 접어 품에 넣은 카시야는 곁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스윈델에게 드디어 그가 바라 마지않는 말을 해주었다.
"볼 일은 다 끝난 것 같으니 빠져나가자."
============================ 작품 후기 ============================
9월달은 공휴일이 없군요....
1. 1덤 님 "작가님 지금 비축분 없어서 일저지른 손꾸락 원망하고 계실듯 ㅋㅋㅋ" >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아....하하....하.
2. 손꾸락의 일탈로 연참을 한 후 코멘창이 마치 광복의 그날처럼 만세로 도배되는 것을 보고 광복절의 의미를 되새긴 연참이었다고 자평했습니다. 고생은 손꾸락이 하는 거니까요, 뭐.
+ 츄이 님, 일연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