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6 악마의 계약자(3) =========================
그들은 헬라스가 쓴 책을 그대로 들고 나가보기로 하고 스윈델이 그 책을 옆구리에 꼈다. 이 저택의 물건을 밖에 갖고 나가지 못한다는 게 어떤 건지 확인해보고도 싶었다.
"나가자."
둘은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열었다. 카시야가 먼저 나가 주변을 살피는데 스윈델이 따라오지 않았다.
"스윈델?"
그의 이름을 부르며 뒤돌아본 카시야는 열려있는 서재 문의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스윈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 이상합니다, 분대장님. 나갈 수가… 없어요."
스윈델은 안간힘을 쓰며 서재 문 너머로 발을 디디려 했지만 마치 어떤 힘에 막힌 듯 넘어올 수가 없었다.
문 안쪽의 스윈델에게서 책만 건네받은 카시야가 문 밖에서 책을 쥔 손을 빼내려했지만 그 역시 불가능했다. 카시야는 결국 책을 바닥에 던져놓고 나서야 손을 뺄 수 있었다.
"이런 거였군. 물건을 저택 밖으로 빼내기는커녕, 그 물건이 있던 방에서부터 빼내갈 수가 없는 모양이야."
"정말… 오싹하네요. 어, 얼른 가요."
카시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해가 졌는데?"
방금까지는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어느새 창밖이 어둑어둑해져있었다.
"우리가 이 저택에 들어온 지는, 길어봐야 반나절이 좀 지났을 텐데…."
"부, 분대장님. 어, 얼른 나가요."
카시야에게 바짝 붙어선 스윈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도망친 마법사들의 말처럼 별로 기분이 좋은 저택은 아니었기 때문에 카시야 역시 뒷문을 향해 빠르게 발을 놀렸다. 그 때 창밖이 순식간에 완전히 어두워지는 것 같더니 저택의 물건들이 조금씩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에서 '스윽… 스윽…'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스윈델은 저도 모르게 카시야의 팔을 붙들었다.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꽉 다문 그의 입술 사이에서는, 그러나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2층 서재 문이 '쿵!'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쓰러진 의자가 바로 서는 듯 나무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법사들이 도망치며 열어둔 저택의 정문 역시 '끼이익'하는 소리를 내며 닫히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먼저 뒷문으로 뛰어간 스윈델은 아직 조금 열려있는 뒷문을 단단히 받친 뒤 카시야가 그 사이를 지나가길 기다리고는 재빨리 몸을 뺐다. 그가 버티는 힘에 닫히지 못하고 있던 뒷문이, 그가 몸을 빼자마자 '쾅!'하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뛰어!"
그 모습을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스윈델에게 카시야가 소리쳤고, 둘은 메어놓은 말을 향해 정신없이 달렸다. 신기한 건, 분명 저택 안에서는 창밖이 깜깜했는데 밖에 나와 보니 아직 낮인 듯 환했다는 것이다. 물론 진한 안개는 여전했다.
"이랴!"
말에 올라타 저택의 반대 방향으로 달려 저택 부근을 빠져나오자,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맑개 갠 파란 하늘이 그들을 반겼다. 스윈델의 얼굴에는 여전히 핏기가 없었고, 카시야조차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꿈이었나 싶었을 정도로 기괴한 저택이었지만 그녀의 품 안에는 열심히 필사했던 종이가 들어 있어, 그들이 꿈을 꾼 것은 아니라는 걸 일깨워주었다. 자신의 품에서 필사했던 종이를 꺼내 제대로 잘 쓰여 있는지 확인한 카시야는, 그 종이들을 다시 잘 접어 집어넣으며 저택에서 얻은 정보를 다시 곱씹었다.
첫 번째, 리치엘 백작가는 어떤 마법이 걸려있어 그 안의 물건을 갖고 나올 수 없고, 하룻밤(?)이 지나면 원상복구 된다. 즉, 황제가 리치엘 저택에 손을 '안' 댄 것이 아니라 '못' 댄 것일 확률이 높다.
두 번째, 황가의 마법사들이 헬라스가 쓴 마력 관련 책을 필사해서 빼내가고 있으며 곧 상주 마법사들을 파견해 대대적으로 필사할 계획을 갖고 있다.
세 번째, 필사해간 헬라스의 마법으로 황궁에서는 어떤 실험이 행해지는 듯 하고, 그에 따른 피해자가 생겨나고 있다.
네 번째, 헬라스는 황제에게 이용당했거나, 최소한 우호적인 관계였다.
다섯 번째, 에르논의 속박 마법은 헬라스가 고안한 마법이다. 고로, 알리스타스 공작은 헬라스와도 모종의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에르논 때문에 왔지만 예상 외의 수확이었어. 운이 좋았다. 어쨌든 일단 데런으로 돌아가자.'
카시야는 아직도 넋이 나가 있는 스윈델의 등을 쳐 정신을 차리게 한 뒤, 데런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
"언제쯤 정신을 차릴까요? 한번 때려볼까요?"
"아서라. 너한테 따귀라도 한 대 맞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거다."
에르논의 곁에서 미하일이 부루퉁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셀은 탁자에 앉아 각지에서 날아온 전령을 읽어보는 중이었다. 타셀 쪽으로 의탁하는 중소귀족들이 더 늘어났다. 하지만 그들의 박쥐같은 속내를 빤히 아는 타셀은 그들을 어떻게 이용하고 어떻게 다스려야할지 고민했다.
에르논은 포로로 잡혀온 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간호병이 그의 입에 물이나 미음을 흘려 넣어주고, 때때로 타셀이 마나를 불어넣어주었기 때문에 목숨을 붙이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안 그래도 마른 그의 몸은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는 게 눈에 보였다.
"이러다가 카시야가 올 때쯤엔 뼈밖에 안 남겠는데요. 우리가 괴롭힌 거라고 의심할까요?"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 인내심에 감사해야할 거야."
타셀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에르논을 잡아온 뒤로 타셀의 기분이 계속 저조한 것을, 미하일은 잘 알고 있었다.
"카시야네도 이제 슬슬 돌아올 때가 됐죠?"
"아르카나와 아르테비엔으로 갔던 분대원들은 오늘 아침 돌아왔더군."
"흐음. 또 어디 이상한 데 휘말린 건 아니겠지…."
혼잣말 같은 미하일의 중얼거림에 타셀이 고개를 들었다. 타셀 역시 돌아오지 않는 카시야가 걱정되었다. 만약 카시야와 같은 쪽으로 갔다는 스윈델이 이번에도 혼자만 돌아온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타셀은 고개를 돌려 미약한 숨을 쉬고 있는 에르논을 쳐다보았다.
케일런 진영의 구원자, 알리스타스 공작의 개, 공격 마법의 대가(大家), 이 세계에 일곱 명 남은 대마법사 중 하나, 수많은 타셀군 병사들의 원수가 거기 누워있었다.
타셀은 벌떡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미하일은 이번에야말로 타셀이 분을 못 이기고 에르논을 죽이려 하는 건가 싶어서 긴장했다. 하지만 창백한 얼굴의 에르논을 가만 내려다보던 타셀은 그의 가슴에 손을 대고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평소처럼 겨우 살아있을 정도의 마나만 주입하는 게 아니라, 그가 눈을 뜰 정도로 많은 양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에르논의 가슴에 오랫동안 손을 붙이고 있는 타셀을 보며 미하일은 제 허리에 달린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만약 눈을 뜬 에르논이 타셀에게 무슨 짓을 하려 한다면, 두 번 봐주지 않고 바로 베어버릴 심산이었다.
"으… 으윽… 쿨럭…."
시체같이 축 늘어졌던 에르논의 입에서 신음과 기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타셀은 마나 주입을 멈추지 않았다. 금방 채워지던 카시야와는 달리, 원래부터 마나의 양이 많던 에르논은 더 많은 마나를 채워야 했다. 그의 몸에 흘러들어가는 마나의 양이 많아지자 그의 고개가 좌우로 조금씩 흔들렸다. 백짓장 같던 얼굴에도 점점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크흑…. 쿨럭, 쿨럭…."
기침을 뱉던 에르논은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드디어 눈을 떴다. 타셀도, 미하일도 그 순간만큼은 숨을 들이 삼킬 수밖에 없었다. 탈색된 듯한 느낌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의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는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으아아아악! 끄으윽…."
에르논은 잠깐 눈을 떴지만 제 몸을 지배하는 통증으로 괴로운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마력폭발을 일으킬 때부터 정상은 아니던 몸이었는데, 남아있는 마력 거의 전부를 폭발시키면서 그의 몸은 괴수에게 후려쳐진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 후유증은 끔찍한 고통이었다. 심지어 지독한 충격을 받은 몸을 다스릴 마력까지 고갈된 상태에서, 그는 그 고통을 있는 그대로 다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신음과 함께 괴로운 숨을 할딱대고만 있는 에르논과는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타셀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는 다시 에르논의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마력을 포함한 마나를 조금 흘려 넣었다. 마력에 굶주린 에르논의 몸뚱이는 소량 흘러들어온 마력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는 더 달라는 듯 들러붙었다. 하지만 타셀은 곧 손을 치워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에르논이 차고 있는 마력 구속구 덕분에 더 넣을 수도 없었다.
"이봐. 죽을 것같이 고통스럽기야 하겠지만, 정신 좀 차려보지 그래. 정말 죽지 않으려면 말야."
타셀의 나직하고도 위협적인 음성 때문인지, 에르논의 눈동자에 겨우 초점이 맺혔다. 어지러이 흔들리던 눈동자가 타셀을 인지하고서도 한참 뒤, 드디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에르논이 숨을 들이켰다.
"만나서 반갑군, 대마법사 에르논. 나는 타셀 칸 아마리스다."
숨을 헐떡대고 진땀을 흘리며 바르작대고 있는 에르논의 상황은 별 관심도 없다는 듯이 타셀은 그의 보랏빛 눈동자만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아직 상황파악이 잘 안 될 것 같아서 '친절히' 설명해주자면, 너는 살아있고, 내게 포로로 잡혀있다. 그리고 지난번 전투는 우리 쪽의 대승으로 끝났어."
에르논은 여전히 '후욱, 후욱….'하는 숨소리만 내며 타셀을 쳐다보았다.
"네 목에는 마력 구속구가 걸려있다. 네 몸에 마력도 금방 차오르지 않을 거고, 마력이 있다 하더라도 쓸 수 없을 거다. 혹시 믿지 못하겠다면 한 번 시험해 봐도 좋아. 대마법사 카르가스가 만든 구속구의 명성을 모르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야."
어느새 땀 때문에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달라붙은 에르논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제 목 근처를 더듬다가 목걸이 같은 마력 구속구에 손이 닿자 마치 불에 닿은 것처럼 놀라 손을 떼었다.
"아, 만지지도 못할 거라는 말을 빠트렸군."
거의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이는 에르논과는 달리, 타셀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괴로워하는 에르논의 모습을 보자 분노로 얼룩졌던 그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던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우리에게 협조할 생각이 있나?"
타셀의 물음에도 에르논은 숨만 헐떡거리며 말이 없었다. 그가 말을 제대로 알아듣기는 했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타셀은 두 번 설명해줄 마음이 없었다.
"생각할 시간은 필요하겠지. 하루 기다려 주겠다. 하지만 정말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차가운 눈으로 에르논을 바라보던 타셀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일으켰다. 막 돌아서려는 그에게, 에르논이 다 쉬어버린 목소리를 처음으로 내어 물었다.
"에텔…. 에텔은… 어떻게 한 거냐…."
미간을 찌푸린 타셀이 에르논을 뒤돌아보았다.
"에텔? 그게 뭐지? 설마 지금 수작부리는 거라면 별로 좋은 꼴은 못 볼 텐데."
타셀은 손바닥으로 마력과 마나를 모으며 낮게 짓씹었다. 하지만 이어진 에르논의 말에 타셀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미하일… 메레디스가… 루크에게서부터 구했던… 여자 용병 말이다. 하아…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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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일 없이 저택에서 빠져나와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