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7 이유 =========================
타셀은 물론 미하일까지 경직된 얼굴로 에르논을 쳐다보았다. 에르논은 비 오듯 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면서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다가 이내 잠들듯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미하일과 타셀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침묵을 깨트린 것은 미하일이었다.
"방금 저 새끼가 말한 여자 용병이라는 게… 카시야 맞죠?"
"…그런 것 같군."
미하일은 도대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 뻐끔거렸다. 자신이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자신의 목숨보다 먼저 카시야의 신변을 걱정하는 듯하던 에르논의 태도는 그에게 엄청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에르논에게 마나 운용법을 배웠다던 카시야의 평온한 얼굴도 떠올랐다. 복잡한 생각에 혼란스럽던 그의 눈빛은, 그러나 곧 차갑게 가라앉았다.
"카시야가 돌아오면, 감시를 붙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순간에는 타셀보다 오히려 미하일이 냉정했다. 이럴 때마다 지크와 정말 구분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타셀은 그의 말에 곧바로 그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은 자꾸만 의심이 들던 그의 마음이, 미하일의 말을 듣자 오히려 "절대 배신하지 않겠습니다."라며 확고한 눈빛을 보내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게 만든 것이었다.
"…카시야 경이 우리를 배신했을 리 없다. 괜한 행동으로 그녀의 마음이 정말로 떠나게 만들지 마라."
"하지만, 에르논의 태도로 미루어보자면 두 사람은…."
"미하일. 어림짐작으로 귀중한 인재를 잃을 셈이냐? 카시야 경이 에르논을 완벽하게 속여 넘긴 것일 수도 있지 않나. 그 증거로 저 자는 아직도 카시야를 에텔이라는 이름의 용병으로 알고 있다."
타셀은 다시 한 번 에르논을 쏘아보다가 전령이 쌓여있는 탁자로 돌아가 앉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아까 보다 만 전령을 찾아 읽는 척 했지만, 그의 눈동자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가 지금 다른 생각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하일은 작게 한숨을 쉬었을 뿐, 주군의 의견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그 역시도 카시야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매우 드물게 등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를 안 지 오래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믿는 거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은 없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만약 그녀가 배신했다면, 미하일은 앞으로 그 누구도 믿지 못할 것 같았다.
타노버를 빠져나와 데런으로 향하면서부터 스윈델은 그들이 데런을 떠난 이후 벌어졌을 전투의 향방을 걱정했다. 카시야 역시 타셀군이 이겼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타셀군이 이겼다고 해도 에르논은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으니, 그건 그것대로 걱정이었고 말이다.
'타셀 전하나 에르논, 둘 중 하나는 무사하지 못했을 텐데…. 둘 다 죽지만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런 걱정을 곱씹다가 문득 자신이 누군가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시야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물론 쿠론이 다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했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절실한 걱정은 아니었다.
깨달아버린 자신의 변화는 생경하고 놀라웠지만 그 느낌이 싫지는 않았다. 왠지 이제는 자신을 걱정해주었던 루나엔이나 쿠론을 자신 역시 걱정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빚을 갚을 수 있게 되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걱정을 한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가 지금 고민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었다.
'속박 마법을 필사한 종이를 어떻게 그에게 전해야하지? 다시 케일런군 진영으로 숨어들어야 하나? 과연 타셀 전하가 그걸 허락할까?'
에르논이 이미 타셀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카시야는 여러 모로 생각을 했다. 하지만 확장되는 생각의 끝에 '내가 왜 이렇게까지 그를 위하는가.'하는 의문이 달렸다. 사실 카시야가 이제껏 계속 모른 척 해온 의문이기도 했다. 동정? 인류애? 동료애? 정의감? 그 어떤 것으로도 개운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의 망가져버린 인간성 때문에 모호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카시야는 말 위에서 졸고 있는 스윈델에게 물었다.
"스윈델. 어떤 사람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 아니, 어쩌면 적에 가까울 수도 있는 사람을 도우려고 애쓰게 된다면 그건 무엇 때문일 것 같아?"
졸다가 화들짝 깬 스윈델은 잠깐 동안 카시야가 한 말이 납득이 되지 않아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어…. 둘 다 남자예요? 여자? 아니면 남녀?"
"음? 그게 중요한 문제가 되나?"
"허…! 당연하죠. 제일 중요한 겁니다만."
"그래? 만약 남녀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가장 설득력 있고 의심되는 이유는 바로 사랑이죠. 거기까지 안 갔더라도 뭐, 애정, 호감, 호기심 같은 것일 수도 있고요."
스윈델의 대답을 들은 카시야는 썩은 고기를 씹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전혀 상관없고 적에 가까울 수도 있는 사람인데? 그게 가능해?"
"부모 죽인 원수하고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게 인간인 걸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는 스윈델의 모습에 카시야는 처음으로 스윈델이 자신보다 아는 게 많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아니라면 그 다음은?"
"그 다음으로는 상대방이 불쌍하거나, 인간적으로 이해할만한 구석이 있거나, 아니면 상대로부터 도움을 받은 적이 있거나. 뭐, 그런 거 아닐까요? 아! 그 사람을 도와줘서 얻을 게 있는 경우도 있겠네요."
카시야는 결국 스윈델이 한 두 번째 대답을 이유로 납득하기로 했다. 여전히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로서는 그나마 그 이유가 가장 납득 가능했다. 에르논이 불쌍했고, 전생의 자신을 떠올려 인간적으로도 이해할만한 구석도 있었고, 그로부터 마나 운용법을 배운 건 고마워할만한 일이었고, 그를 도우면 타셀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졌으니까.
"너도 그런 감정이 든 적이 있나? 네 적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 말에 스윈델의 시선이 카시야의 얼굴에 머물렀다.
"…예. 있습니다."
"그래? 그 사람은 여자였나?"
"…예."
"그럼 그게 사랑이었어?"
카시야가 스윈델에게 배운 대로 '가장 설득력 있고 의심되는 이유'를 대자 그는 갑자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 아, 아, 아니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아까는 그게 제일 의심되는 이유라며? 그게 아니라면, 동정이었어? 아니면 도움을 받아서?"
"도, 도움을 받아서 그랬습니다! 맞아요. 그것 때문이었죠!"
"그래? 흐음…."
카시야가 왜 그런 질문을 자신에게 했는지 알 리가 없는 스윈델은 눈꺼풀에 남아있던 졸음이 싹 가신 것 같았다.
그렇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카시야와 스윈델이 데런의 끝자락에 닿은 것은 에르논이 눈 떴던 날의 늦은 저녁이었다.
"승전했던 모양이에요!"
떠나기 전과 크게 다름없는 병영의 모습을 멀리서부터 확인한 스윈델이 신난 듯 외쳤다. 카시야가 보기에도 병영 전체적인 분위기가 안정적인 것 같았다. 패전했다면 저렇게 평화로운 분위기일 리가 없다. 카시야는 타셀이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게 조금 아쉬웠다. 과연 그가 어떻게 마법을 휘둘렀을지 굉장히 궁금했다. 그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병영을 향해 박차를 가했다.
"전하! 카시야 경과 스윈델 경이 도착했습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난 뒤, 타셀의 막사를 걷고 지크가 낮게 외쳤다. 타셀의 시선은 순간적으로 누워있는 에르논을 향했다. 그는 도로 기절한 뒤 계속 신음만 흘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작전 회의실에서 맞겠다. 준비해."
타셀은 자신이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 죽어가는 에르논을 볼 때마다 적군을 향한 분노 이외의 짜증이 치솟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카시야에게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자신을 탓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작전 회의실에서 지크와 미하일, 아나클리프 백작과 갤리언 백작까지 좌우에 두고 앉아있으려니 곧 카시야와 스윈델이 들어와 허리를 굽히며 예를 취했다. 떠나기 전보다 약간 더 턱 선이 날카로워진 것 같은 카시야를 보자 늦은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취사병을 닦달해 음식을 만들라고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 드는군, 카시야 경, 스윈델 경.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맙네."
"지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셨다고 들었습니다. 전하의 용맹하신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보지 못해 아쉽습니다."
카시야의 말에 타셀 좌우에 앉아있던 이들이 껄껄 웃으며 그 날 정말 대단했다는 얘기를 하느라 잠시 시끌시끌해졌다. 덕분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만들 하게. 나는 자네가 갖고 올 정보가 더 궁금했네. 자리에 앉지."
카시야와 스윈델은 그들과 함께 탁자를 공유하게 되었다.
"신전은 분위기가 어떻던가?"
"신전에서는 대신관이 황제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바로 황제가 가졌다는 신검에 의해서 말입니다."
"뭐? 화, 황제가 정말로…!"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지른 갤리언 백작은 설마 하던 일이 사실이라는 얘기를 듣고 적잖이 놀란 것 같았지만 타셀은 그저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신전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리고 알리나 성녀가 차기 대신관을 지목했습니다. 그는 바로 신성 치료사 아르헨 님입니다."
카시야가 아르헨이라고 못 박듯이 얘기하자 스윈델은 놀랍다는 눈으로 카시야를 바라보았다. 신관회는 누구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았는데 카시야가 어떻게 알고 있나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카시야에게는 머뭇거림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의 인연에 발을 들인 신성 치료사는 아르헨 밖에 없으니까.
"뭐라고? 신성 치료사가 대신관에 지명됐단 말인가?"
"그것 때문에 신관회에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만, 성녀가 지명을 했는데 신관회가 거부할 수는 없었겠지요. 지금쯤 두 달 동안의 검증기간에 들어갔을 겁니다. "
"그 외에는?"
"신전은 중립을 지키겠다고 합니다. 물론 대신관을 죽인 황제에게 좋은 감정은 없겠지만, 황궁 바로 근처가 를뤼엔이니 황제의 힘을 무시하지는 못해서 그러는 것 같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르헨을 좀 더 극진히 모실걸 그랬어."
타셀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황제가 대신관을 죽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 뒤로 내심 신전의 지원을 바라고 있었는데 신전은 소극적으로 몸을 사리고 있다. 차기 대신관으로 지목됐다는 아르헨과 좀 더 단단한 연줄을 만들어뒀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피엔에서는 어땠나?"
그 물음에 이제까지는 막힘없이 답하던 카시야가 막사의 입구 쪽에서 엿듣는 이가 없는지 기감을 넓혀 확인하느라 잠시 침묵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타셀은 물론 다른 이들 역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막사를 지키는 병사들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황제가…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지?"
"1황자와 협상이 타결된 이후, 황제는 황궁으로 마법사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황궁에서 나오는 사형수의 시체를 묻는 언덕에 가보니, 마법사로 보이는 시체가 묻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상이… 마치 무엇엔가 완전히 빨린 것 같이 바싹 말라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막사 안의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웠다.
"…그게 마법사의 시체라는 건 어떻게 알았나?"
"눈동자에 분명 보라색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명치 쪽에 괴이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문양을 대마법사 헬라스의 저서에서 찾았습니다. 자세한 술식의 뒷부분은 다 지워져버려서 여기까지밖에 베껴 쓸 수가 없었습니다만, 이 문양이 있었던 장(章)의 소제목이 '마력의 흡수'였습니다."
카시야가 품속에서 꺼내 건넨 종이를 펴든 타셀의 눈동자가 술식을 따라 읽느라 좌우로 움직이다가 다시 카시야를 향해 날아와 박혔다.
"자네…. 이건 도대체 어떻게…?"
============================ 작품 후기 ============================
타셀과 에르논의 만남을 쓰면서 왜 자꾸 이것들을 공, 수로 보게 되는 건지... 정말 심란합니다....ㅠㅗㅠ(조합 좋지 않나요? 카시야는 솔로잉하고 이것들을 엮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아, 그런데 이런 말하면 진짜로 그렇게 밀고 가달라고 조를 독자분들이 분명 있을 것 같아서 무섭네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진카는 BL장르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