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홍의 카르마-58화 (58/134)

00058 재회 =========================

타셀은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카시야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더 자세한 설명을 원했다.

"묻혀있던 시체의 명치에 마법의 문양같은 게 있기에 피엔의 툴라에게 마법 서적을 볼 수 있을만한 곳을 물었더니, 타노버 경계 부근의 리치엘 백작가를 얘기해주더군요."

에르논에 대한 것을 최대한 빼고 설명하느라 할 수 없이 선후 관계가 뒤바뀐 얘기를 하며 카시야는 타셀이 의심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시체의 가슴에 있는 문양을 보고 어떻게 마법 문양인지 알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궁색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하게 스윈델이 끼어들어 가늘어지던 타셀의 눈이 그를 향해 돌아갔다.

"헬라스의 저택은 정말 괴기스러웠습니다! 으으으….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아, 그리고 황제가 보낸 듯한 마법사들이 헬라스의 책을 필사해 갔습니다. 헬라스 저택 내의 물건은 그 저택 밖으로 갖고 나갈 수 없는 마법이 걸려있었거든요. 아, 그리고 그것도 있지 않습니까, 분대장님. 황제의 서신!"

모든 이들의 관심은 리치엘 저택과 황제가 보낸 마법사, 그리고 황제의 서신으로 완전히 돌려졌다.

"천천히 얘기해보게."

"스윈델의 말처럼 리치엘 저택은 헬라스의 마법에 의해 그 안에 있는 물건이 저택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었고 하룻밤이 지나면 전날과 똑같이 원상복구 됩니다. 그 때문에 헬라스의 책을 황제의 마법사들이 와 필사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필사하던 책이 제가 방금 드린 문양이 들어있던 <마력과 마나의 외부조작>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윈델이 황제가 헬라스에게 보냈던 서신들을 찾아냈습니다. 서신의 내용으로만 보자면 황제는 헬라스의 마법 연구를 지원하고 있었지만, 그 결과물을 자신에게 바치길 원했던 것 같았습니다."

타셀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 그 곁에 있던 지크가 입을 열었다.

"설마 죽음의 기사를… 황제가…?"

카시야는 자신이 기억하는 그대로 세 통의 편지 내용을 읊었다. 그러자 옆에서 스윈델도 카시야의 기억력이 대단하다며 맞장구를 쳤다.

타셀은 복잡한 눈으로 카시야가 건넨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중간에 끊겼지만 어느 모로 보나 마력의 흡수를 위한 술식이었다. 그것도 대상자의 마력을 최대한 뽑아내기 위해 그 대상자의 죽음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죽음의 기사 사건에 황제가 배후라는 것은 납득이 가능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군사라는 것은, 권력을 쥔 이라면 누구나 탐낼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무엇을 위해서 마력을 뽑아내려 하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군."

"황궁은 대마법사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연줄이 닿은 자조차 없지요. 뭔가 엄청난 마력이 필요한 마법을 시전하려 하는데 마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나클리프 백작이 추측해보았지만 타셀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뽑아낸 마력을 제 안에 담고 있을 수 있는 마법사가 필요하다는 말인데,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타인의 마나를 받아들이는 것만 해도 힘이 드는데 하물며 마력이라는데야. 대마법사 수준이 아니고서는 많은 양의 타인의 마력을 몸에 받아들이기 어려워."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타셀은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답 없는 고민을 하고 있어봤자 소용없지. 일단 오늘은 이만 자리를 파하겠네. 둘 다, 정말 수고 많았네."

타셀의 치하에 카시야와 스윈델은 가볍게 고개 숙였고, 막사의 모두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났다. 하지만 타셀의 눈짓에 카시야는 그대로 자리에 남아있었다. 막사에는 타셀과 카시야, 미하일만이 남았다.

타셀은 가만 앉아 카시야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카시야 경. 나는 경을 믿겠네."

뜬금없는 말에 의아해하는 카시야를 데리고 타셀과 미하일은 타셀의 막사로 자리를 옮겼다.

"어떻게 된 겁니까? 생포하신 겁니까?"

카시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염려하던 타셀과 미하일은, 그녀가 신음을 흘리고 있는 에르논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물어오자 오히려 당황했다.

"전투 때 마력폭발을 일으키고 쓰러진 그를 생포했네. 자네가 죽이지 말라고 해서 목숨을 붙여두긴 했네만."

그녀의 의견 때문에 에르논을 살려두었다고 하는 타셀의 말에 카시야가 놀란 눈을 하고 타셀을 쳐다보았다.

"…제 의견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아냐. 나 역시 생포하고 싶었으니까."

그날 오전까지만 해도 겨우 죽이지 않고 참았던 타셀이지만 굳이 그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하일은 타셀보다는 더 직접적으로 물었다.

"카시야. 너 도대체 이 새끼하고 무슨 사이였냐?"

"…굳이 무슨 사이였냐고 물어보신다면, 표면적으로는 주인과 용병처럼 지냈고, 실질적으로는 적군의 대마법사와 첩자의 사이였죠. 알고 계셨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아, 아니, 그게 아니고…. 하아…. 이거, 뭐라고 말해야 되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빛을 하는 카시야 때문에 미하일은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그 때 곁에서 타셀이 대신 말해주었다.

"저 자가 잠깐 정신을 차렸었는데, 제 코가 석 자이면서도 자네 걱정부터 하더군. 에텔? 그게 자네의 가명이었나?"

"그가 저에게 붙여준 이름이었습니다."

에르논이 그녀의 이름까지 지어줬다는 말에 미하일과 타셀은 서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카시야는 에르논이 그녀를 걱정했다는 말에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동동 떠다녔다. 자신은 그를 도와 얻을 게 있어서 그랬다 치지만, 그는 왜 자신을 걱정했을까. 한참 고민하던 카시야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지어주던 당시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아마… 저를 애완동물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농담인가 했는데 그렇다기에는 너무나 진지한 카시야의 얼굴을 본 미하일과 타셀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처음으로, 에르논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시야는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에르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수척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꼴이라 하더라도 알리스타스 공작성에 있는 것보다는 여기에 있는 게 나을 거라고 믿는 카시야는 지난 전투의 결과가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전투 자체는 타셀군이 대승했고, 타셀은 물론이거니와 에르논 역시 죽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품 안에는 에르논이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속박 마법의 술식이 들어 있다. 카시야는 에르논이 얼른 정신을 차려서 그 개목걸이를 끊어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타셀을 돕겠다고 마음을 돌려야 했지만 그녀는 그가 마음을 돌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다가 에르논의 목에 걸린 백금 사슬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카시야가 마력 구속구를 가리키며 타셀을 쳐다보았다. 타셀은 그녀가 에르논에게 핑크빛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방금 확인했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서늘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물론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한 그가 그것을 들킬 리는 없었다.

"…마력 구속구야. 지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대마법사임은 변하지 않아. 그런 위험인물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하지만… 저 목걸이 같은 것으로 충분한 겁니까?"

카시야로서는 제가 살려달라고 부탁한 에르논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마법을 휘두르며 말썽을 일으키면 면목이 없어질뿐더러 기껏 구해온 속박 마법 술식을 그에게 건네기도 어려워졌기 때문에 그가 타셀 쪽으로 마음을 돌리기 전에는 그의 마력을 확실히 제어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보기랑은 다르게 이 제국 내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마력 구속구일 거다. 외국에 있는 대마법사까지 불러 들여 만든 거니까 말이야."

'겨우 저거 갖고 되겠냐'는 카시야의 말에 미하일이 어이없이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미하일은 카시야를 조금이나마 의심했던 게 미안해졌다. 카시야의 담백한 태도를 보니, 아무래도 에르논이 저 혼자 카시야에게 반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죽여 버리고 싶었던 에르논에게 뜻 모를 전우애 같은 게 생겨났다. 아름다운 영애들에게 연심을 가졌다가 차인 경험은 미하일 역시 충분했으니까.

'예쁘장하게 생긴 대마법사도 별 수 없네.'

미하일은 속으로 낄낄댔다.

하지만 타셀은 카시야가 에르논 곁에 더 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배고플 텐데, 가서 뭐라도 좀 먹지 그래? 그 사이 더 말랐어."

"아,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카시야는 갑자기 부드럽게 변한 분위기에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타셀의 조언대로 식당 막사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배가 많이 고팠다.

'에르논 문제는 에르논이 깨어나면 생각하자.'

카시야는 품안에 숨긴 종이의 감촉을 느끼며 막사에서 나갔다.

*

챙그랑!

알테리온이 집어던진 고급 유리잔이 고개를 조아리고 서있는 한 남자의 머리에 맞고 산산이 부서졌다. 그의 이마의 상처에서는 곧 피가 배어나왔다. 그의 뒤에 같이 열 지어 서있던 그의 제자들은 두려움에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었다.

"네 놈이 저번에 분명 말했었지?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말이야."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궁정 마법사 제롬은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황제의 분노를 받아내고 있어야 했다. 전 세계에 일곱 명 있는 대마법사를 제외하면, 일반 마법사 중에서는 최고의 실력을 가진 자였다.

사실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화가 나는 건 제롬이었다. 그 역시 도대체 왜 실험이 번번이 실패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헬라스는 성공했던 실험이었고 그의 책을 베껴온 대로 행했으니 자신 역시 성공해야 했다. 하지만 마치 조그만 무엇인가가 빠진 것처럼 늘 성공 직전에서 실패해버리고 말았다. 황제는 벌써 자신에게 꽤 여러 번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니 그가 저렇게 화를 내고 있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목숨을 부지해야 하고, 다행이 황제가 소유한 마법사 중에서는 제가 으뜸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평소처럼 사죄했고 다음번에는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황제는 더 이상 여유롭지가 못했다.

"지난번 케일런과 타셀 간의 전투에서 타셀이 승리했다더군. 흐흐흐. 빌어먹을 놈 같으니. …날 죽이러 놈이 오고 있다. 하루빨리 카라볼그를 들 수 있어야 해."

알테리온의 갈색 눈동자가 왠지 핏빛을 띄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갑자기 나긋나긋해졌다.

"제롬. 자네는 일반 마법사들 중에서는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자가 아닌가. 그런 자네가 실수를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언제나 문제는 실험체들이 마지막까지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거야.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는 실험체가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폐하. 그렇다고 어디서 대마법사 급이 되는 실험체를 구해올 수 있겠습니까? 지금 있는 실험체들을 충분히 강화시킨 뒤 실험을 진행하면 될 것으로 사료되옵…."

"없기는 왜 없어? 알리스타스 공작의 사생아가 있잖은가. 대마법사 에르논 말이야."

알테리온의 말에 고개를 조아리던 모두가 자기도 모르게 그를 쳐다보다가 황급히 눈을 내리 깔았다. 황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도대체 그 어떤 미친놈이 대마법사를 잡으러 간단 말인가. 그것도 공격 마법의 정점인 그를.

하지만 황제는 알리스타스 공작과 에르논의 정확한 관계를 알고 있는 몇 되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가 아는 알리스타스 공작은 교활하고 제 명성과 이득 밖에 생각할 줄 몰랐다. 그리고 그에게 에르논은 가치있는 노예나 다름없었다. 그를 어떻게든 구슬려서 에르논을 빌려오는 셈 치면 될 것이다. 대마법사쯤 되면 이 정도 실험을 견디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닐지 모르고, 어차피 그가 살아있기만 하면 마력은 다시 차오를 테니, 알리스타스 공작에게 후한 값만 쳐준다면 공작에게도 나쁘지 않은 거래일 것이다.

남들은 대마법사를 한낱 실험체로 쓰려는 알테리온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제롬은 황제라면 저런 생각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황제에게 중요한 것은 대마법사의 희귀성 따위가 아니라, 자신의 몸 안에 카라볼그를 들 수 있는 마력이 흘러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전 세계에 있는 일곱 명의 대마법사를 다 실험체로 쓰자고도 할 수 있는 이가 황제였다.

"카르고!"

황제가 그의 충실한 재상을 찾았다.

"알리스타스 공작에게 밀사를 보내라! 케일런에게 절대 들키면 안 된다. 그쪽 상황도 별로 좋지 않을 테니, 지금이야말로 기회다."

알테리온이 히죽 웃었다.

============================ 작품 후기 ============================

기대와 우려를 모두 다 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진카는 BL장르로는 가지 않습니다.^^;;;(제가 그럴 내공이 못됩니다;;)

즐거운 주말이네요. 비축분이 저엉말로 간당간당해진 자까는 주말동안 열심히 비축분을 쌓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ㅠㅗ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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