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9 믿음(1) =========================
케네스에게 황제의 밀사가 도착한 것은 그가 전장을 살펴보고 막 공작성에 도착했을 때였다. 안 그래도 에르논을 잃은 것 때문에 불안해져 있는 케네스는 황제로부터 온 밀사를 보고 잔뜩 경계심을 돋웠다. 그러나 밀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황제의 제의는 뜻 밖에도 달콤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에르논을 잠시 빌려 달라…?"
"예.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공작께서 에르논 님께 속박을 걸어두셨음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어차피 그 속박의 주인은 공작이시니, 황제께서는 정말로 잠시의 '대여'를 원하시는 겁니다."
"에르논을 어디다 쓰려고 그러는 거요? 정확한 용도를 말해주기 전에는 허락지 않겠소."
날카롭게 쏘아보는 케네스의 눈빛에도 밀사는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여유로운 태도로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보다 먼저… 전장의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만…."
안 그래도 고민인 문제를 후벼 파니 케네스의 눈빛은 더욱 흉흉해졌다.
"지금 우릴 조롱하는 거요? 애초에 황제가 군사를 더욱 충분히 내 주었더라면…!"
"아, 물론입니다. 에르논 님의 대여에 대한 대가 중에는 군사와 용병의 추가 파병도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밀사는 주변을 가만 살피다가 거의 속삭이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에 하나, 케일런군이 타셀군에게 패하는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알리스타스 공작가의 안위만큼은 보장하신다는 조건도 있습니다. 그것을 황가의 문장이 찍힌 공식 문서로 남겨주실 것입니다."
밀사의 말에 케네스의 귀가 쫑긋거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에르논이 만약 죽었다면 지금 이 대화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시간낭비겠지만 케네스는 에르논이 살아있다 믿었다. 그를 타셀군으로부터 어떻게 되찾느냐가 문제이긴 하지만, 제 앞에 들이밀어진 탐스러운 제안을 거절할 마음은 없었다. 황제에게 최대한 이익을 취한 뒤 그 다음 에르논을 찾아봐도 될 것이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병사의 추가 파병이야 황제가 당연히 제공해야할 일이고, 나는 우리 가문의 완전한 안전과 더불어 충분한 금전적 보상을 바라는 바요."
"당연하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저희 쪽에서는 에르논 님을 언제쯤 모셔갈 수 있을지요?"
거기에서는 케네스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없는 물건 갖고 장사하는 장사치나 다름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전선의 상황이 급박하여 당장 에르논을 빼내올 수 없소. 한 달… 아니, 두 달 내로는 무슨 핑계를 대서든 데려올 테니."
"흐음…. 알겠습니다, 공작각하. 폐하께는 그리 전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현재 성 안의 마법사들도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서, 만약 그게 성공한다면 에르논 님을 모셔가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방금의 제안들도 없던 일이 되는 것이니, 그 점은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한 마디로 최대한 빨리 에르논을 준비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케네스는 자신을 재촉하는 밀사의 태도가 괘씸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렇다고 뭘 어찌할 수는 없었다.
"알… 았네. 최대한 노력하지."
밀사는 휘어진 눈초리와 그린 듯 길게 찢어진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케네스는 다시 한 번 품 안의 비단을 꺼내 주문을 외워보았다. 역시나 에르논의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다.
'아니야. 죽었을 리 없어! 죽어서는 안 돼!'
어차피 한두 달 안으로 성공할 마법 연구였다면 황제가 굳이 자신까지 찾아오지는 않았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직 시간은 있다. 어떻게든 에르논을 찾아와야해…!'
케네스의 뱀 같은 눈알이 좌우로 오가며 방법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
"뭐어? 그것이 정말이여?"
"아, 그랬다니까! 저택 안에서 창밖을 봤을 때는 깜깜했는데, 나오니까 아직 낮인 거야. 와…. 그때는 진짜 무서워서 뒈지는 줄 알았다. 오줌까지 쌀 뻔했는데 차마 분대장한테 무섭다는 소리는 못하겠고."
"으하하하하하하! 꼴에 자존심은 살았네."
"형님 같았으면 아마 쌌을 거야. 음. 그럼."
"웃기고 자빠졌네. 인마, 그 정도가 무서우면 아직 엄마 젖을 덜 뗀 거지!"
다시 와하하-하는 웃음의 파도가 일었다.
스윈델과 분대원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었던 일들을 떠벌이느라 정신없었다. 물론 그 얘기에는 과장이 듬뿍 들어가 있었다.
"근데 진짜 분대장은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르겠다니까. 모르는 것도 없는 거 같고, 겁이라는 것도 없는 거 같고…. 하여간에 우리랑은 어딘가 좀 달러."
"그 소문 아직 못 들었어? 분대장이 왜, 안개숲에서 죽다 살아났잖아. 그런데 그 전이랑 후가 완전 딴 사람이라는 거야. …또 모르지. 저기야말로 귀신이 씐 건지."
분대원들이 수군대는 걸 들으면서 스윈델은 저가 곁에서 보고 들은 카시야를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귀신이 씌었다기에는 너무도 멀쩡해 보였다. 인간사 자체에 무심한 듯해 보여도 드물게 자신을 흘끗 바라보는 눈에는 약한 짐승을 염려하는 빛이 담겨있어, 그녀가 사실은 속이 따뜻한 사람일 거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그녀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되었고, 스스로가 강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스윈델은 어느새 그녀를 마음 깊이 담아두게 되었다. 물론 그녀가 물었던 '사랑'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기에는 너무도 높은 곳에 있는 별 같았다. 그는 다만 성별을 떠나 한 사람의 기사로서 그녀를 동경하고 있었다. 그녀처럼 강해지고 싶었고, 무심해지고 싶었고, 멋있어지고 싶었다. 그는 어느새 카시야가 웃는 것처럼 피식 웃는 버릇이 생겨있었다. 사실 의식하고 만들어낸 버릇이었지만, 그는 그 버릇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랬던 스윈델조차도 다시 시작된 훈련에는 이를 박박 갈았다. 애틋했던 전우애나 동경심이 깡그리 잊힐 정도의 고된 훈련이 그들에게 들이밀어진 것이다. 카시야의 독설 역시 한층 악랄해져 있었다.
"내가 전하께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남들은 칼 들고 전장에서 적들을 베는데 너희들은 편안하게 도성 유람이나 하고 있었지? 어떻게 된 게 쓸모 있는 정보를 모아온 놈이 하나도 없나?"
물론 분대원들은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르카나와 아르테비엔의 곳곳을 누비며 정보를 찾았지만, 황궁에서는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오히려 이전보다 더 소문이 없었다. 황궁에 들어가는 물자며 사람들을 관찰했지만 전쟁 전보다 물자의 양이 조금 늘어났고 마법사들이 자주 오간다는 느낌이 있을 뿐, 콕 집어 '이상하다'고 여길만한 게 없었다. 그것은 카리나 궁이 있는 아르테비엔도 마찬가지였다. 아르테비엔 같은 경우는 황제가 황궁으로 돌아간 뒤 더더욱 아무 소문이 없었다. 물론 아르카나나 아르테비엔 내에서도 타셀의 모후인 엘레나 황비가 죽었다는 소문은 돌았다. 황제가 죽였다는 이도 있었고, 자살했다는 이도 있었지만 결국은 '바로 그것 때문에 2황자가 꼭지가 돌았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사실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고 말이다.
백성들 사이에서 2황자에게 동정표가 몰린다는 것을 빼면 아르카나나 아르테비엔에서는 특별할 정보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쓸모 있는 정보를 물어오라는 게 도둑놈 심보 아닌가!
분대원들이 이를 박박 갈며 끝도 없는 달음박질을 하고 있을 때, 카시야는 이제 슬슬 그들에게 암살과 관련된 훈련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어떤 훈련을 시킬지 머릿속에서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좀 더 강하고, 좀 더 스스로의 기척을 지울 줄 알고, 좀 더 머리를 굴릴 줄 알았다면 아무 것도 건질 것 없었다는 아르카나나 아르테비엔에서도 충분히 괜찮은 정보를 물고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들을 거기까지 만들지 못한 것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짧은 훈련 기간 동안 거기까지의 발전은 불가능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카시야는 제 탓을 했다. 이제는 그들이 이전의 자신을 마녀라 불렀던 게 응석이었다고 느껴질 정도로 모진 훈련을 이어가야 했다. 카시야는 눈앞의 스무 명 중 죽는 이가 없기만을 바랐다.
"전하! 저 미친 녀…가 아니고, 카시야 경 좀 말려 주십시오! 저러다 애꿎은 병사들이 다 죽습니다!"
타셀의 막사를 걷고 한 연대장이 외쳤다. 카시야를 말려 달라며 들이닥친 게 벌써 네 명 째였다.
처음에는 듣도 보도 못한, 고문인가 싶을 정도의 훈련 내용을 들은 타셀도 내심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현장을 보러 갔다 온 미하일이 별 말이 없자 그는 그냥 카시야를 믿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 연대장을 달래 보낸 후 타셀은 작게 한숨 쉬며 미하일에게 말했다.
"카시야 경이 적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
그 말을 들은 미하일이 킥킥댔다.
"카시야가 상관이 아니라서 다행이죠. 훈련이랍시고 물고문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같은 시각 카시야의 분대원들은 팬티 한 장 달랑 입고 호수에 빠져 숨 참는 훈련, 물결을 크게 일으키지 않고 잠수로 이동하는 훈련 등을 하고 있었다. 물론 말이 좋아서 훈련이고, 실제로는 카시야에 의해 머리통이 물에 처박히고 있는 중이었다.
"당황하지 마라! 숨 쉬는 박자를 놓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내가 너희 머리를 물에 처박든 말든 네 놈들은 그 박자만 잊지 말란 말이다!"
이미 한계에 부딪혀 뭍으로 기어 나와 그동안 실컷 들이킨 호수 물과 제 위액과 침을 게워내고 있는 분대원들 귀에는 그녀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가 않았다. 그저 죽을 뻔했다는 공포심 때문에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내려가서 식사하고 쉬도록."
자신 역시 물속을 누비느라 흠뻑 젖은 카시야는 수건으로 물기만 조금 말리고는 그 꼴 그대로 타셀의 막사를 찾았다. 그녀 역시 그동안 자신의 훈련장을 찾아온 기사들이 별별 욕을 다 해대다가 타셀에게 일러바치러 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믿어준 타셀에게 자신의 훈련으로 죽은 병사는 없다는 것 정도는 보고해야할 것 같았다.
"전하. 카시야 경입니다."
그녀의 도착을 알리는 병사의 목소리 뒤로 그녀의 방문을 허락하는 타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시야의 방문에 고개를 든 타셀은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셔츠를 입고 있는데도 그녀의 굴곡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았고, 그걸 자신이 훑고 있었다는 사실에 민망해져 귀밑이 슬쩍 붉어졌다.
"제 훈련방식을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이 아직 죽은 이는 없습니다."
타셀은 '아직'이라는 말에 소름이 돋았지만 설마 진담은 아니겠거니 하고 넘겨버렸다.
"무엇을 위한 훈련이었는지 정도는 말해줄 수 있겠지?"
"들으셨던바 그대로입니다. 숨을 참는 훈련이지요. 기척을 지우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뭍에서 하면 힘들 때 저도 모르게 숨을 쉬게 되어버리거든요. 아울러 자신의 몸을 조용히 놀리는 것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물 안에서 물결을 최대한 일으키지 않게 하려면 잠시라도 방심할 수가 없지요. 이 역시 뭍에서 하면 스스로 깨닫지를 못합니다."
"…듣기에는 물고문이었다던데."
타셀은 쿡쿡 웃으며 놀리듯 말했지만 카시야는 전혀 감흥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오늘 그 난리를 쳤으니, 내일부터는 무서워서라도 잘 하겠죠."
카시야는 제가 받았던 캠프 X에서의 교육 분위기를 어느 정도는 갖고 오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언제 또 전투가 시작될지 모르는 다급한 와중에 세월아 네월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타셀이 정말 대단하다며 큭큭 웃던 그 순간, 막사의 안에서 타셀과 카시야의 목소리가 아닌 음성이 들렸다. 아니, 음성이라기보다는 신음이다. 카시야의 시선이 에르논을 향해 휘었다. 그녀의 시선을 바라보던 타셀 역시 천천히 에르논을 바라보았다.
신음을 흘리던 에르논은 두 눈을 뜨고 여러 번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한참을 바르작거리던 에르논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느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곧 자신을 바라보는 카시야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는 눈 뜬 채로 기절했나 싶을 정도로 미동조차 없었다. 카시야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입니다, 에르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에르논이 기억하는 에텔의 말투 그대로였다. 예전 같았으면 '주인님'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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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눕방(?) 에르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