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0 믿음(2) =========================
에르논은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닌지 헷갈려서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 카시야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눈을 찌푸려도 보고, 비빈 뒤 보아도 타셀의 맞은편에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는 자는 에텔이 틀림없었다.
"…에텔?"
그 짧은 물음 안에는 많은 질문이 담겨있었다.
정말 네가 맞느냐는 것과 몸은 멀쩡하냐는 것, 그리고 정말 너는 타셀군의 첩자였냐는 것과 진짜 네 이름은 무엇이냐는 것.
타셀이 카시야에게 고갯짓을 하며 그에게 가보라는 뜻을 전했다. 카시야는 자세를 풀고 짧게 목례한 후 에르논이 누워있는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오는 모습을 눈도 못 떼고 가만 쳐다보고 있던 에르논은 카시야가 침상 근처까지 다가와 의자를 잡아당겨 앉는 모습을 보고는 경련이 일어날 것 같은 팔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의 목에 걸려있는 백금의 사슬 목걸이가 절걱, 하는 소리를 냈다.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그는 거친 숨을 쉬어야 했다. 그가 바로 일어나 앉아 그녀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된 것 같자 카시야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소개를 다시 하겠습니다. 저는 타셀 칸 아마리스 전하 휘하의 분대장, 카시야라고 합니다."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된 사실에 에르논의 눈은 크게 뜨였다가 곧 차가운 빛을 띠며 이지러졌다. 뭐라고 한바탕 쏟아내고 싶지만 무엇부터 말해야하는지 몰라 반쯤 벌린 입술만 바들바들 떨렸다. 루크의 예상을 들었을 때 이미 반쯤은 타셀군의 첩자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실제로 직접 그 사실을 마주하는 것은 예상만 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배신감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은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하! 하하! 카시야? 네 이름이, 카시야라고? 심지어 분대장? 미친… 으흐… 하하하!"
욕설을 내뱉고 싶었는데 웃음부터 터져버리고 말았다.
"와…. 2황자 전하께서는 군대 내에 대단한 배우를 두고 계셨구만. 수상한 녀석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아니다. 에르논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줄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전혀 다른 힘이 느껴지는 인간이었고, 보통의 인간이라면 보이지 않을 반응들을 보여준 그녀였다. 수상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곧 적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어져야 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호기심에 그 위험성을 눈감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처음으로 가진 '마음에 드는 인간'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나서, 그는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 거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투정 정도는 부리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의 마음에 한 줄기 할퀸 상처라도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재미있었겠네? 말로만 듣던 대마법사가 아주 머저리에 병신이라서 우스웠으려나? 사람의 호의를 배신하는 기분은 어땠어? 응? 아무것도 모르고 헤벌레 웃고 있는 내가 얼마나 웃겼냐고 묻잖아. 대답해봐. 어때? 지금 내 꼴을 보니까. …흐흐…흐흐흐. 나도 참 뭘 묻고 있는 거지…."
카시야의 얼굴은 밀알 한 톨만큼의 변화도 없었다. 내일은 날씨가 맑겠대요, 라는 말을 들은 것보다 더 감흥이 없어 보였다. 에르논은 고개를 떨군 채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인지 흐느낌인지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렸다. 그때, 카시야의 손이 그의 어깨 위에 가만히 얹어졌다. 흠칫 놀란 에르논은 순간 당황했다가 곧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대마법사를 우습게보지 마. 피엔의 뒷골목에서 태어났고 공작성에서 노예처럼 부려졌다고 해도, 난 대마법사다. 너 따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만져도 되는 사람이 아니야."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 빨간 분노가 흘러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카시야는 그의 그런 반응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았다.
"에르논."
그녀의 목소리로 불리는 자신의 이름이 생각보다 달콤하게 들려서 에르논은 여전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온힘을 다해 자신의 분노를 끌어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카시야만 있었더라면 금방 무너졌을지도 모르는 단단한 마음이, 그녀 뒤에 도사리고 앉아있는 타셀 덕분에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타셀의 눈빛은 도대체 뭘 생각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절대 그에게 호의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에르논. 우리와 함께 합시다."
다시금 그녀의 목소리가 세이렌의 유혹처럼 귓가에 와 닿았다. 에르논은 순간 그녀에게 기대버릴뻔 하다가 겨우 제정신을 붙들었다.
"차라리 날 죽여라. 내가 너희들을 도울 일은 없을 테니까."
에르논은 꼿꼿이 자존심을 세웠다. 하지만 카시야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저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군요. 당신이 1황자를 돕는 이유가 있습니까?"
"남이사."
"알리스타스 공작가를 좋아합니까? 아니면 1황자나 그가 내세우는 기치가 마음에 듭니까?"
알리스타스라는 이름이 나올 때부터 에르논은 이를 뿌득 갈았다. 하지만 카시야가 바라는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내 이름은 에르논 알리스타스다. 나에게 바랄 걸 바래라."
"에르논 알리스타스. 그래, 알리스타스 공작이 그 성을 당신에게 단 만큼의 대우를 해주던가요? 대마법사는 전 세계에 일곱 명이 있다던데, 그 일곱 명 중의 하나를 모시게 된 자가 그렇게 귀한 이를 모신 만큼의 대접을 해주던가요?"
에르논은 흐윽, 흐윽 하며 잇새로만 거친 숨을 내쉬었다.
"에르논. 당신은 알리스타스 공작이 낳은 아이가 아닙니다. 에스텔이라는 여인이 낳은 아이죠. 당신이 알리스타스라는 성을 달기 전, 당신에게 에르논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여인을 잊었습니까?"
에스텔에 대한 언급과 동시에 에르논의 표정이 쩡, 하고 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곧바로 맹렬한 분노의 불꽃을 일으켰다.
"네 년이 감히… 감히… 내 어머니의 이름을 입에 담아? 죽고 싶으냐?"
순식간에 흉흉해진 에르논의 태도에 카시야 뒤에 가만히 앉아 있던 타셀이 손바닥에 마력과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카시야는 아무런 긴장감도 없이 에르논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당신의 어머니는… 당신이 알리스타스 공작성에 들어간 뒤 5년 후에 죽었다더군요. 그녀가 고통스러운 병에 걸려 5년이라는 기간 동안 괴로움을 감당하다 죽기까지, 알리스타스 공작의 그 어떤 호의도 닿지 않았습니다. 괴롭게 죽어간 그녀의 침대 곁을 지킨 건, 어릴 적의 당신을 돌보아주던 뒷골목 창녀들이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당신의 어머니처럼 고통스럽게 죽는 창녀가 없게 하기 위해 애썼고, 지금 그녀는 황제도 구하지 못한 뒷골목의 굶주림을 구제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타셀 전하의 사람이고, 바로 그녀가 지금도 당신의 신변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잘도 입에 발린 거짓말을 하는구나. 어머니가 이미 죽었을 거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그녀의 죽음은 그대로 내버려 둬. 그것을 이용하려 하지 마라. 정말, 죽여버릴 테니까."
카시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나 가버리는 줄 안 에르논의 눈동자가 곧바로 흔들렸다. 하지만 카시야는 타셀에게 잠깐 갖고 올 것이 있다며 막사를 나갔고, 타셀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에르논을 주시했다. 그러나 둘의 어색한 적막은 오래가지 않았다. 카시야는 금방 돌아오더니 에르논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당신이 이걸 기억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말이, 그녀가 건네는 것을 받지 않으려던 에르논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의 빌어먹을 천성을 원망하며 그는 그녀의 손에 있는 낡은 손수건을 받았다. 그 안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침을 한 번 꼴깍 삼킨 그는 조심스레 손수건을 펴다가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이… 이건…."
"툴라가 말하길 에스텔의 유품이라더군요. 남길 게, 그것 밖에는 없었다고…. 그리고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되면 꼭 전해달라고요. 이래도 제 말을 못 믿으시겠습니까?"
툴라의 이름을 들은 에르논과 타셀이 동시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투… 툴라…? 툴라라고? 설마 그녀가…?"
에르논의 눈이 순간 타셀을 향했다가 카시야에게 돌아왔다.
"네. 그녀가 2황자 전하의 사람입니다. 2황자 전하 덕분에 목숨을 건진 사람이고요."
에르논의 눈동자가 다시 천천히 손수건 위의 낡은 나무 목걸이를 향했다. 하지만 그것을 가만 바라볼 뿐, 한참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괴롭게… 돌아가셨다고 했나?"
한참 만에 정적을 깬 에르논의 목소리는 이미 조금 갈라져있었다. 카시야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손에 있는 나무 목걸이를 같이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을 뿐이다. 에르논은 주먹을 꽉 쥐어 그 낡은 목걸이를 느꼈다. 그 목걸이를 잊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단 하나뿐인 장신구였으니까.
"에르논. 우리와 함께 합시다. 나는 현 상황에서 이 제국을 구제할 수 있는 사람은 타셀 전하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타셀 전하께서 세우실 나라에서 내 나름대로 행복이라는 것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왜?"
버석하게 말라버린 듯한 보랏빛 눈이 카시야를 마주보았다.
"나까지 챙길 만큼 마음이 너그러웠나? 내 손에 죽은 2황자 군대가 얼마인지는 알아? 안 그렇습니까, 2황자 전하."
에르논의 날 선 물음이 타셀을 향했다. 타셀 역시 싸늘한 얼굴로 에르논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보기에 지금 에르논은 카시야의 설득에 한풀 꺾인 상태였다. 아닌 척 목소리에 날을 세우고는 있지만, 그는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다. 카시야의 말 몇 마디에 너무도 쉽게 말이다. 물론 카시야가 에르논의 모친의 유품을 들고 왔던 게 카운터펀치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저 치가 카시야에게 무른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 사실로 인해 자신은 벌써 기분이 나빴다. 이렇게 조그만 일로도 적개심이 생기는데, 에르논의 말처럼 과연 자신은 그를 포용할 만큼 마음이 너그러운지 자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겨우 참아 포용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에게 전우와 가족을 잃은 병사들까지 저 에르논을 받아들이려할까. 여러모로 난감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카시야만은 자신이 있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기도 하고, 그 반대 역시 가능한 게 전쟁터입니다. 당신이 우리를 도와 승리를 앞당긴다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은 케일런군에 원해서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난 단순히 내 기분을 풀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어. 그건 내가 어느 진영을 원하고 말고를 떠난 문제일 거다."
그의 그 발언에 카시야 역시 그가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하는 데까지 해봅시다.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에르논은 결국 고집스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타셀은 체념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카시야는 물러나지 않았다. 에르논의 흔들림을 포착했으니,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어렵게 생각하실 거 없습니다. 당신 말대로 당신은 이 세계에 겨우 일곱 명 있다는 대마법사니까, 당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살아도 되는 사람이잖습니까. 당장 알리스타스 공작이 당신을 찾지는 못할 테니, 공작성 바깥의 세상을 먼저 좀 즐기시고요."
카시야의 입가에 살짝 스친 미소에 에르논의 꾹 다문 입매가 조금 떨렸다.
============================ 작품 후기 ============================
1. 죄송합니다. 저도 연참해드리고 싶은데요, 비축분이 없어요.oTL... 얼마전 내글구려병에 걸려가지고 며칠 못썼더니...ㅠㅗㅠ 내글구려병을 아직 다 극복하진 못했지만, 지금부터는 정말 열심히 쓸게요. 쪼금만 기다려주세요. 스토리라인은 거진 다 잡혔어요.
2. 가끔 제 전작을 궁금해해주시는 분들도 계시고해서(비겁한 변명입니다!) 뻔뻔한 듯하지만 홍보 한 토막만 할게요. 제 첫 작품인 <물들어가는 시간>이 노란 페이지에서 오늘부터 연재를 시작합니다.(몇시부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표지 구경이라도 하러 와주시면 감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