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1 믿음(3) =========================
조금 얼떨떨해 보이는 에르논의 곁에서 일어난 카시야는 타셀을 향해 제안했다.
"전하. 우리 군 입장에서도 에르논 님이 적이겠지만, 에르논 님의 입장에서도 우리 군은 믿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에르논 님께 우리 쪽을 경험할 수 있는 배려를 베풀어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 후에도 그가 1황자를 선택한다면,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요."
겨우 분대장 정도의 인물이 감히 총사령관이자 주군에게 할 수 있을만한 제안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굳이 죽여 달라는 에르논을 카시야가 어떻게든 살리려 드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진 타셀은 삐딱한 어조로 물었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도 설득해보겠나?"
"늦든 빠르든 이런 일은 벌어질 겁니다. 전하의 나라에 전하의 마음에 드는 이만 남기실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어차피 적군이었던 이들까지 포용해야 하실 테니, 그 일환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치 미리 준비했었던 것처럼 술술 나오는 그녀의 대답에 타셀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녀가 타셀의 승리를 당연스레 여기는 것 같아 속이 간질거리기도 했다.
하긴, 에르논에 대한 적개심을 빼고 생각해본다면 지금 그에게 우리 쪽으로 와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이긴 했다. 황자가 빌어야겠다 생각할 만큼 대마법사의 힘이란 대단했다. 일반 마법사가 아무리 뛰어나봤자 그 뛰어난 마법사 열 명이 대마법사 하나를 이기는 게 불가능했다. 피 안에 흐르며 끊임없이 생산되는 마력과 마나는 이해의 범주를 넘어설 만큼 엄청난 양이었고, 마치 신에게 선택받은 존재임을 증명이라도 하는 건지, 대마법사라면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마법 지식 습득에도 엄청난 속도와 이해를 자랑했다.
이번에 에르논을 생포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전투에 임할 당시부터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지, 만약 그가 멀쩡했다면 타셀이 마법을 썼다 해도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을 거라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런 대마법사가 이쪽으로 넘어와 주기만 한다면 이 전쟁의 승패는 싱거울 정도로 금방 정해져버릴지도 모른다.
타셀은 뻔뻔하다 할 만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카시야에게 새삼스레 감탄했다. 도대체 어떻게 저 예민한 대마법사의 마음을 그 짧은 시간에 얻을 수 있었는지, 또 어떻게 자신에게조차 에르논과의 관계를 말하지 않았던 툴라를 구워삶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신마저 그녀를 타박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게 만들 수 있는지 말이다. 확실히 그녀에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있었다.
"…어째 맹수를 토끼우리에 풀어놓자는 것 같은 의견이네만, 알겠네. 카시야 경, 자네를 믿기로 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만약 저 자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자네 목이 먼저 날아갈 것을 각오해야 할 거야. 누군가 책임은 져야할 게 아닌가."
타셀은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일부러 카시야에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에르논에게 두었다. 만약 자신의 짐작이 맞다면, '에르논이 문제를 일으키면 카시야가 죽는다.'는 규칙은 그 무엇보다도 훌륭한 에르논의 마력 구속구가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에르논의 눈이 어느새 커져서는 타셀과 카시야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카시야는 산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말을 꺼냈으니 당연히 책임을 져야죠. 대신 에르논 님을 제 곁에 붙여주십시오. 제가 모시고 다니면서 설득하고 싶습니다. 제 목숨이 달린 것이니, 이 정도는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번 역시 대담한 요구였다. 만약 타셀이 그녀를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절대 허락지 않을 요구이기도 했다. 사실 이 요구는 타셀이 저를 얼마나 믿고 있는지 가늠하기 위해 카시야가 일부러 억지를 부려본 것이기도 했다.
타셀의 날카로운 시선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카시야는 피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에르논의 속박을 풀고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가 타셀을 돕지 않더라도 최소한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다. 케일런이나 황제의 수하가 아니기만 해도 좋았다. 그 정도만 되어도 이 전쟁에서 타셀이 이길 확률은 꽤나 높아진다. 물론 그가 타셀의 편에 서준다면 그 확률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하지만 그것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에르논을 설득하다가 정 안 되면 그때는 멀리 떠나라고 말해 볼 생각이었다. 속박만 아니라면 그가 알리스타스 공작에게 매여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다.
"알겠네, 카시야 경. 믿겠네. 자네의 선택이 다른 이들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는 선택이길 바라네."
"감사합니다."
당사자의 의견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에르논의 거취가 결정되었다.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고 있던 에르논 마저 어이없어 할 정도로 굉장히 파격적인 요구와 허락에 의해서 말이다.
카시야는 아직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에르논을 향해 다가가더니 그의 모습을 살폈다.
"아무래도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마력 구속구 때문에 어려우시려나요?"
에르논 대신 그녀의 뒤에서 타셀이 대답했다.
"그 정도의 마력 사용은 허락해주지. 그 구속구는 내가 조절할 수 있으니까."
그러고는 곧장 다가오더니 목걸이나 다름없는 마력 구속구를 잡고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력 구속구는 그 백금 사슬 안에 흐르는 마력의 양 만큼만 구속자에게 마력 사용을 허락했다. 그 전까지는 마력이 전혀 깃들지 않아 에르논 역시 꼼짝달싹할 수 없었는데 타셀이 마력을 어느 정도 불어넣자 에르논의 몸 역시 훨씬 편안해졌다. 마치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에르논은 의심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카시야를 쳐다보았다.
"전부터 느꼈지만 너…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냐?"
배신감에 떠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너무도 쉽게 제 목숨을 걸었다. 조금 허락된 마력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죄다 끌어 모아 누군가를 공격한다면 그 즉시 자신보다 먼저 카시야의 목이 떨어질 것이다. 아니,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병사들 사이에 앉아 제 정체를 밝히기만 해도 주변 병사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곧 소란으로 번질 것이다. 그렇게 되기만 해도 카시야의 신변은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카시야의 얼굴은 그따위 것을 걱정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심드렁하기 그지없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부터 그녀가 보통 사람 같지 않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너무나 위험이 큰 일을 맡으면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는 그녀를 보면 자신이 뭔가 말리고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 힘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살기등등한 타셀의 모습을 보면 둘이 뭔가 짜고 치는 느낌은 아니었다.
학대당하던 어린 시절을 보낸 터라 에르논 역시 타인의 감정, 특히 화를 내거나 혐오하는 감정에 대해서는 굉장히 눈치가 빨랐다. 그런 자신의 감이, 타셀은 지금 카시야의 제안을 전혀 반기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카시야는 정말로 자신을 포섭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말인가. 사람의 감정에 눈치 빠른 그라 하더라도 카시야의 감정을 가늠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자신을 '흐음….'하는 소리를 내며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카시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전혀 알 수가 없다. 심각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떼려하지 에르논은 긴장했다.
"밤색 머리카락과 파란색 눈동자 정도로 바꾸실 수 있겠습니까? 그 정도면 흔해 보일 것 같아서요."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다가 뱉는다는 말이 그런 것이었다. 에르논은 맥이 풀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땅바닥을 쳐다보았다. 다시 고개가 들린 그는 카시야를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의 눈동자 색을 쉴 새 없이 바꾸었다. 마치 무지개가 그의 눈동자를 차례대로 물들이는 것 같았다.
"골라. 원하시는 색으로 바꿔 드리지."
전생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광경에 카시야는 신기한 기분이 들어 그의 눈동자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당신의 원래 눈동자 색만큼 아름답지는 않겠지만 대충 보통 사람들과 비슷한 색으로 해주세요."
그 말에 쉴 새 없이 변하던 에르논의 눈동자가 올리브 색에 정착했다. 어느새 새하얗던 머리카락과 눈썹은 흔하디흔한 밤색으로 바뀌어있었다. 카시야는 거기에 만족했지만 방금 자신이 내뱉었던 말에 에르논이 두근거렸음을, 타셀은 조금 기분이 상했음을 깨닫지는 못했다.
다음날 타셀이 에르논의 생포 사실을 알고 있는 수뇌부를 불러 한 차례 설득을 한 이후, 카시야의 곁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하나가 붙어 다니게 되었다. 당연히 모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꽤나 미남자였던 데다 기사처럼은 보이지 않아 카시야가 애인을 데리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물론 실제 그렇다고 믿는 이는 없었다. 이미 다들 카시야가 연애 감정 따위를 가질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놈들이 하도 징징거려서 앞으로는 이 분도 훈련을 참관하실 거다. 내가 네 놈들 죽이지 않게 감시하실 분이니, 알아서들 잘 모셔."
카시야의 말에 분대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전날 윗분들 몇몇이 그녀를 말리느라고 타셀 전하께도 가서 그녀의 만행을 일러바쳤다는 소문이 헛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다들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에르논을 쳐다보았다.
"저, 저희가 어떻게 불러드려야 할지…."
누군가의 물음에 카시야가 에르논을 쳐다보다가 그들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키샤스 경이라고 부르면 된다. 자, 어제 복습을 해볼까?"
에르논의 시선이 카시야의 뒤통수에 달라붙었지만 카시야는 개의치 않고 파랗게 질린 분대원들을 호수 속에 빠트렸다.
"키샤스…? 하…! 누구 맘대로…."
에르논은 구시렁댔지만 뺨에는 숨기지 못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녀와 자신이 서로의 이름을 지어주게 된 게 왠지 굉장한 인연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설렘도 잠시. 그는 곧 하얗게 질려갔다. 자신의 기억으로는 고분고분하고 담백하던 카시야가 그녀에게 감히 반항도 못하는 병사들의 머리통을 물에 처박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쿠에엑!"
"박자 놓치지 말라고 했다! 숨을 못 쉰다는 공포심에 지지 말라고! 물속에서는 최대한 빨리 이완하라고 했잖아! 내가 네 놈들 죽이기 전에 알아서 익사할 셈이냐?"
몇몇은 열심히 그녀의 지도에 따랐으나 모두가 물에 대한 공포, 질식에 대한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머리를 누르고 있는 그녀의 손 때문에 혹시 자신이 질식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이기지 못하는 녀석들은 스스로 당황해 금방 숨이 차고 말았다. 그러다보면 물을 실컷 먹고 첨벙대기 마련이었고, 그랬던 녀석들은 속을 다 게워내기도 전에 카시야에게 얻어맞았다.
에르논은 카시야에 대한 이미지를 대폭 수정했다. 어제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처럼 보였던 그녀가, 지금은 그저 자신보다 더한 악마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력이 억제된 자신 따위는 그녀의 발길질 한 번에 나동그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리고 그녀에 의해 물에 처박히는 생판 모르던 적군이, 그 꼴을 계속 봐야하는 지금으로서는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 작품 후기 ============================
1. 으허허허헝!! 여러분들의 사랑과 응원으로 내글구려병은 극복! 감기기운도 극복!
2. 창예 님 > 무병장수하고 매일 5만원씩 주우시라는 댓글 보고 빵 터졌습니다.ㅎㅎㅎㅎ 구체적인 기원, 감사합니다. 저도 그랬으면 정말 좋겠습니다.ㅎㅎㅎㅎㅎ
3. <물들어가는 시간>은 이 제목 그대로 노란 페이지에서 연재 시작됐습니다. 현대 로맨스고요. 무료 13회 나갑니다^^;;
조아라에서 무료 연재 후 완결까지 본 다음에 계약 후 습작 처리한 거라서 지금으로서는 조아라 재연재는 어렵습니다. 머리털나고 처음 쓰던 소설이라 다가가기 쉬운 할리퀸 스타일로 썼는데 조금씩 변주를 주었습니다. ㅎㅎ 제입으로 말하려니 이거 되게 부꾸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