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2 믿음(4) =========================
"크윽, 퉷."
"오웨에에엑!"
훈련이 끝난 호숫가에서는 게워내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카시야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 분대원을 호수에서 끄집어내 뭍에 던지고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차림 그대로 에르논을 향해 다가갔다.
"지루하셨을 텐데 신경써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흘러내리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그녀의 모습은, 방금까지의 훈련을 보지 못했다면 꽤나 유혹적으로 느껴졌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에르논은 이미 그녀의 정체를 알아버리고 말았다.
"…난 적어도 내가 모르는 인간들을 죽였어. 네가 더 지독해."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던 카시야는 제 뒤에서 토악질을 해대는 분대원들에게 시선을 던지는 에르논을 보며 의미를 깨닫고는 낮게 웃었다.
"그럴지도요. 식사 하러 내려가시죠."
앞서 산길을 내려가는 카시야의 뒤로 에르논과 반쯤 정신이 나간 분대원들이 비척비척 따라 걸었다.
"키샤스 경께서는 그럼 분대장님을 내내 감시하시는 겁니까?"
"키샤스 경께서는 고향이 어디십니까? 이전에는 뵌 적이 없는데 어느 부대에 계셨습니까?"
"키샤스 경. 만약 분대장님이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면 안 돼요! 싫어요! 라고 꼭 소리치셔야 합니다."
"키샤스 경은 칼을 쓰시는 것처럼은 안 보이시는데, 혹시 행정관리십니까?"
죽다 살아난 분대원들은 잠깐 낯을 가리나 싶더니 하나 둘씩 질문을 해댔다. 중간에 이상한 당부 하나가 들어있는 것 같아 신경 쓰였지만 워낙에 많은 질문이 쏟아져서 에르논은 전부 다 못들은 척 했다. 대답하기 곤란한 것들이었으니 함부로 입을 놀릴 수도 없었거니와 일일이 답을 해줄만큼 제가 벽을 허문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다들 말없이 식사만 하는 카시야와 에르논을 답답한 듯 쳐다봤지만, 카시야가 서늘한 눈빛을 들어 한번 둘러보자 재빨리 그릇에 코를 박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에르논으로서는 보면 볼수록 카시야가 악마 교관 같았다.
식사를 마치자 다들 막사 근처의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어디서 얻어온 옥수수나 감자를 익혀먹기도 하고 개인별로 지급된 술 한 잔씩을 홀짝이며 제 동료들과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 광경은 카시야가 가장 좋아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느른하고 흐뭇해서 옆구리가 왠지 간지러운 것 같은 느낌말이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주변의 도란거림만 듣고 있어도 마음이 뿌듯이 차오르고 코끝을 간질이는 나무 타는 냄새, 뭔가가 구워지는 냄새가 유래를 알 수 없는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오늘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게 저 혼자가 아니었다. 곁에 앉은 에르논 역시 그들의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카시야는 화톳불만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알리스타스 공작이 당신을 찾는 느낌이 있습니까?"
명치의 개목걸이 마법이 발동된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에르논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공작은 당신을 계속 찾을 겁니다. 그에게 있는 가장 귀중한 힘이 당신이니까요. 공작성에서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에르논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이 없었지만 카시야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주변에 쌓여있던 잔가지들을 그러모아 모닥불에 쏟아 넣고 돌아와 앉았다. 타닥타닥 나뭇가지가 타는 소리가 운치를 더했다. 마른 가지에서 튄 불티가 하늘로 날아오르다 사라지곤 했다.
"…마법을 연구하던가, 눈에 띄지 않고 숨어있던가, 매를 맞던가…. 그 중 하나지."
느릿한 에르논의 말투에는 그다지 기분 좋지 않은 대답이 얹혀있었다.
"그런 곳이라도 돌아가고 싶습니까? 핏줄…이라는 건, 그 정도로 끈끈한 건가요?"
다시 카시야가 물었다. 에르논은 이번에도 즉답하지 못했다. 깊은 한숨만이 흘러나왔다.
"굳이 그들이 좋다는 것도 아니고 돌아가고 싶다는 것도 아니야. 다만…. 알잖아. 난, 도망칠 수 없다는 거."
절망 섞인 그의 말에 카시야는 오히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게 그 개목걸이의 열쇠가 있다는 걸 빨리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군으로 완전히 끌어들이기 전에는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에르논은 예민하고 감정이 휙휙 바뀌는 사람이었고, 속박을 벗어난 그가 무슨 짓을 할지는 카시야도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쌓였던 울분이 엉뚱한 사람들에게 쏟아 부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의 절망을 조금 더 지켜만 봐야한다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카시야는 그게 오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제약이 없다면요? 그럼 타셀 전하를 도와주실 의향이 있습니까?"
"…글쎄. 이루어지지 않을 일을 '만약'이라는 말로 상상하는 건 괴로워. 그러니 너도 그만 포기해. 나중에 날 놓치고 나서 네 목 떨어지지 말고."
하지만 카시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아무 말도 없이 모닥불만 바라보았다. 진홍색 하늘 위로 어둠이 덮이고 있었다. 곧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스윈델은 카시야 곁의 남자를 갸웃거리며 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 때 그 남자 같은데….'
처음 봤을 때는 훈련에 정신이 팔려 몰랐는데, 식사 때 제대로 쳐다보니 굉장히 낯이 익었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은 달랐지만, 생김새 자체는 그때의 그 남창, 아니, 에르논을 꼭 닮은 남자였다. 하지만 에르논이라면 카시야나 타셀이 가만있을 리가 없다. 스윈델은 혼자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며 미간만 찌푸리고 있었다. 결국 그는 너무도 긴장감 없는 카시야의 태도를 보고 '내가 잘못 기억하나보다.'고 결론 내렸다. 세상에 참 닮은 사람 많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알리시아가 이끄는 간호병들과 여기사들이 도착한 것은 이틀 후였다.
전투가 끝나고 바로 데런을 출발한 간호 부대였지만 여성들이 대부분인 탓에 타셀군의 병영이 자리 잡은 페미도르 지역까지 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모자라던 약품과 간호 인력이 도착하자 병사들은 환호했다. 사실 그 간호 인력 대부분이 여자라는 게 더 큰 이유였지만 말이다.
그들의 방문에 카시야 역시 조금 들뜬 기분이 되었다. 카시야는 를뤼엔에서 샀던 빨간 리본을 품 안에 넣고 루나엔을 찾기 위해 간호막사가 꾸려진 후방을 열심히 뒤졌다. 루나엔의 머리카락은 흔한 갈색이었지만 주근깨 가득하고 착한 아가씨의 얼굴을 카시야는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루나엔!"
그녀의 부름에 정신없이 물건을 정리하던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 몇 달 사이에 루나엔은 꽤 소녀티를 벗은 것 같았다. 반가운 이를 본 그녀의 눈이 곱게 접히면서 환한 미소가 얼굴을 밝혔다.
"기사님!"
평소에는 거의 웃지 않는 카시야도 그녀를 보면서는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곁에 있던 에르논이 놀랄 정도로 풀어진 얼굴이었다. 카시야의 시선이 향하는 여자를 쳐다봤지만 에르논이 보기에는 별 감흥이 없는, 평범하디 평범한 여자일 뿐이었다.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누굴 찾아오셨나요?"
"루나엔 만나러 왔지. 자, 이거. 를뤼엔에 갔다가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
루나엔은 카시야가 품 안에서 꺼내어 내미는 선물을 보고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선물은 아주 얇은 종이로 포장되어 있어 그 안의 빨간 리본이 어렴풋이 비쳤다.
"저, 저한테요? 어…. 정말로요?"
루나엔은 저에게 내밀어지는 게 분명한 그것을 보고도 섣불리 손을 뻗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이런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나엔의 시선은 얇은 종이 안의 빨간 리본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비단 리본이자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빨간 물건이었다. 늘 거무튀튀하거나 흐리멍덩한 색의 물건만 가져봤던 여자아이에게 빨간 리본이란 꿈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
카시야는 여전히 리본을 바라만 보고 있는 루나엔을 위해 리본을 꺼내 머리에 직접 달아주려고 했다. 그제야 루나엔이 손사래를 치며 그 리본을 도로 종이봉투 안에 집어넣고는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기사님. 제가 뭐라고 이런 걸…. 저, 정말 고맙습니다."
몇 번이고 인사하는 루나엔을 카시야가 붙들어 멈췄다.
"무슨 소리야, 루나엔. 날 살려준 게 넌데, 그걸 보답하려면 아직 한참 부족해. 불편해하지 말고 받아줬으면 좋겠어."
"제가 살려드리다뇨! 저는 그냥… 제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카시야의 앞에서 말끝을 흐리는 아가씨를 보다 에르논이 문득 의문을 느끼고 물었다.
"이 아가씨가 살려줬다니? 너 언제 죽을 뻔했어?"
그제야 에르논의 존재를 눈치 챈 루나엔은 그의 외모에 한 번 더 얼굴을 붉히다가 머뭇거리며 아무 말 없는 카시야를 대신해 냉큼 대답하고 말았다.
"일전에 마법사 에르논의 마력폭발 때문에 거의 돌아가실 뻔했거든요."
"아…."
해맑게 웃는 루나엔의 입을 미처 막지 못한 카시야가 당황한 듯 얼굴을 굳혔다. 에르논 역시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루나엔은 무엇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얼어붙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저기…. 제가 혹시 뭔가 잘못 말씀드렸나요…?"
"아, 아냐, 루나엔. 건강한 모습 봐서 좋았어. 앞으로도 몸조심하고, 혹시 누가 괴롭히면 꼭 말해. 난 타셀 전하 근처의 막사에 있으니까. 알았지?"
불안에 떨던 루나엔은 카시야의 다정한 염려에 곧 흐물흐물해졌다. 제 부모도 이렇게 다정하게 말해주지는 않았는데, 이 여기사님은 정말로 친절하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루나엔을 돌려보내고 다시 병영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둘은 말이 없었다. 에르논의 얼굴이 창백해져 있어서 그가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침묵을 깬 쪽은 에르논이었다.
"…넌 처음부터 날 알고 있었구나?"
"아니오. 가까스로 살아나긴 했는데, 정신 들기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그 말에 에르논은 눈썹을 일그러뜨린 채 카시야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카시야는 늘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내가 원망스럽지도 않아? 네 원수나 다름없잖아. 내가 널… 죽이려고…."
에르논은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도대체 이 무슨 인연이란 말인가. 자신이 죽일 뻔했던 적군이 생전 처음 마음에 든 인간이라니. 마력폭발의 위력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상대는 내장이 터지고 살갗이 쓸리고 뼈가 부러진다. 그야말로 상대를 죽이기 위한 마법이었다. 거기에서 살아났다고 해도,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것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상상이 가능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기억이 없다고. 그리고 전쟁 중에야 최선을 다해 적군을 죽여야 하는 게 우리의 임무 아닙니까. 그때 당신이 우리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죽었겠죠.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아닙니다."
여상스러운 말투로, 마치 그것도 모르냐는 태도로 말하는 카시야 때문에 에르논은 오히려 가슴이 쥐어짜듯 아팠다. 조금이라도 잘못을 하면 채찍질을 당하는 게 당연했던 그의 인생에서, 자신이 죽을 뻔 했음에도 '그게 네 탓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카시야는 너무도 큰 다정과 용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녀를 거의 죽음으로 몰아넣었었다는 사실은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제기랄…. 제기랄!!'
병영으로 향하는 내내 에르논은 자신을 향해 욕설을 짓씹었다.
============================ 작품 후기 ============================
1. 에르논이 눈동자 색을 바꾸는 것과 관련하여 : 35회 의심(7) 참조해주세요. 일반 마법사들이 보라색 눈으로 변장할 수가 없는 것이지, 대마법사들은 다른 색 눈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합니다.
2. 창예 님> 플러팅이 숨쉬듯 자연스러운 카시얔ㅋㅋㅋㅋㅋㅋ 저도 생각지 못한 카시야의 일면이었습니다. 다른 의미로 죄 많은 여자였군요.
3. 늦더위가 진짜 장난 아니네요. 입추 지나고 좀 시원해지나 했더니 훼이크였어;; 독자님들 모두 건강 조심하세요~!
+ 징수니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