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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63화 (63/134)

00063 믿음(5) =========================

카시야로서는 밝힐 생각이 없던 사실을 밝히게 돼 조금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그에게 했던 말 그대로 기억이 전혀 없었으니 그에 대한 원한이 있었을 리 없다. 그리고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실 그에게 당한 현재 몸의 원래 주인은 죽고 없는 것일 테고, 자신의 정신만 이 몸에 들어와 있는 것이니, 그에게 죽을 뻔 했다고 말하기에도 조금 민망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제외하고는 전생의 자신과 꼭 닮은 현재의 몸이 남의 것이었다 생각하기도 이상했지만 말이다.

"제가 죽을 뻔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에르논. 어쨌든 지금 저는 살아 있잖습니까."

카시야 입장에서는 나름 달랜다고 달랜 것이었는데 우울한 표정의 에르논은 그녀를 흘끗 바라봤을 뿐, 거기에 대해서는 별 말을 하지 않고 그저 타셀의 막사에 가 쉬고 싶다고만 했을 뿐이다.

그를 타셀의 막사에 데려다주고 나와 뒷머리를 긁으면서 한숨을 쉬던 카시야의 뒤편에서 산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오랜만이에요, 카시야 경!"

"아, 아나클리프 영애."

뒤를 돌아보니 엔드로스 아나클리프와 함께 작전 회의 막사로 향하던 알리시아가 방긋 웃고 있었다. 카시야는 그들을 향해 인사를 하며 다가갔다. 어둑어둑해지던 병영이 환해지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던 알리시아는 성에서 입던 것보다 훨씬 단순하고 칙칙한 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드레스가 그녀 덕분에 아름답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엔드로스와 알리시아의 뒤를 호위기사도 아닌 이들이 졸졸 따르며 분대 수준의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험한 곳인데 영애께서 불편하시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어머, 왜 다들 그걸 걱정하죠? 저는 엔드로스 루벤 아나클리프 백작의 딸이에요! 고생하는 것엔 익숙하다구요! 데런으로도 쫓겨났었는데 이 정도 쯤이야."

그 말에 곁에 있던 엔드로스가 심장 쪽을 움켜쥐며 '으윽'하는 소리를 냈고, 제 아비를 보며 알리시아가 까르르 웃었다. 전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맑고 낭랑한 웃음소리라서 지금이 전쟁 중이라는 것조차 잊을 것만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알리시아는 보기와는 달리 정말 씩씩하고 소탈한 아가씨였다. 간호부대를 이끌고 왔기 때문에 분명 전투에서 다쳐 피칠갑을 한 병사들이 누운 막사도 돌아봤을 텐데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수도의 영애들이라면 아마 전쟁터에 오는 것조차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일 것이다. 카시야는 알리시아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타셀 전하께서 맞이하실 비는 이런 분이 좋을 것 같은데….'

머릿속에서 타셀과 알리시아가 함께 서있는 모습을 상상해 봐도 둘은 썩 잘 어울렸다. 검은 사자를 떠올리게 하는 용맹하고도 지혜로운 왕과 그 곁에서 밝고 맑은 기운을 내뿜는 요정 같은 왕비. 이 얼마나 그린 듯 어울리는 한 쌍인가. 카시야는 제가 한 상상이 꽤 이뤄질 법 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영애의 미모에 홀린 사내 녀석들이 무례한 짓을 벌일지도 모르니 걸음걸음마다 호위 기사를 꼭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어? 카시야 경이 제 호위 기사를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알리시아가 눈을 빛내며 카시야 곁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녀의 뒤를 졸졸 따르던 다른 기사들이 부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카시야를 응시했다.

"저로서는 영광스러운 말씀입니다만, 현재로서는 분대원들의 훈련이 더 급한 상황이라 조금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분대원의 훈련도 훈련이지만 에르논을 설득해야 하는 더 큰 임무가 있기 때문에 알리시아의 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에요! 제가 바쁘신 분께 응석을 부렸네요. 저는 괜찮으니까 걱정 마세요. 하지만 가끔 시간 나시면 저 보러 와주세요. 네?"

'알몸을 깐' 사이라 그런지 알리시아는 카시야에게 더없이 친근하게 굴었다. 엔드로스가 의아한 눈을 하고 쳐다볼 정도였다. 하지만 카시야는 알리시아의 태도에 이득 계산이나 위선이 깔려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러마고 흔쾌히 대답해주었다.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알리시아에게 다시 한 번 꾸벅 인사를 하고 카시야는 막사로 향했다.

막사에 들어선 카시야는 검대를 풀고 조끼를 벗으며 목을 돌렸다. 한창 때의 남자들인 분대원들보다 더 강인하게 단련된 카시야였지만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임무와 훈련에 조금 피곤한 것도 사실이었다. 루크에게 마나를 다 휘둘러 쓰러졌던 그 때 이후로 깊게 잠든 적이 없었다. 피로가 쌓여 좋을 것이 없는데도 몸에 밴 경계심이 깊은 잠을 방해했다.

'마나 운용 연습을 좀 세게 하면 또 그 때처럼 깊게 잠들 수 있으려나.'

에르논이 마나 운용법을 알려줬던 밤에 달게 잤던 기억이 떠올라 카시야는 막사 바닥에 정좌하고 앉아 제 몸 안에 쌓인 마나에 흐름을 만들었다. 평소에 하는 마나 운용 훈련보다 더 넓게 뻗어볼 생각이었다.

가슴 한가운데서부터 일렁이던 마나는 점점 그녀의 몸 전체로 번져나갔다. 훈련을 하면 할수록 마나가 늘어난다는 말대로 그녀의 마나는 최초의 훈련 당시보다 훨씬 늘어나 있었다. 가슴과 배, 등과 목을 따라 움직이던 마나는 팔, 다리를 거쳐 손끝과 발끝에까지 퍼졌다. 그리고 그 마나가, 카시야가 깔고 앉은 바닥에 스며들듯 번지며 점점 더 넓은 면적을 더듬어 나갔다.

그녀의 막사를 넘어 꽤 멀리까지 퍼져나간 마나의 망에는 그 위를 무심히 걸어가는 병사들의 정보를 그대로 전달해주었다. 방금 지나간 이가 몇 명이고, 그들의 체형이 어떤지, 그들이 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걸음걸이가 어떤지, 기사인지 종자인지 시종인지….

그렇게 뻗어가던 마나가 타셀이 쉬는 막사까지 번졌다. 그의 막사는 카시야의 막사와 가까웠기 때문에 금방 닿을 수 있었다. 타셀은 작전 회의 및 접견용으로 쓰는 막사에서 엔드로스와 알리시아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타셀의 막사 안에는 에르논 밖에 없을 터였다. 물론 그 막사를 둘러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카시야는 우울한 낯으로 들어간 에르논의 흔적을 더듬었다. 곧 미동도 없이 가만 누운 이의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가만 누웠던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밖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따라 나가봐야 하나?'

어차피 에르논의 일거수일투족은 타셀이 붙여놓은 기사들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었고, 마력이 구속된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다. 카시야는 조용히 그의 움직임만 느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의 발걸음은 곧장 그녀의 막사를 향해 다가왔다. 카시야가 뻗어놓은 마나를 거둬들이기도 전에 에르논이 카시야의 막사에 들이닥쳤다. 하지만 그가 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카시야는 놀라지도 않고 천천히 마나를 회수한 뒤 그것을 잘 갈무리까지 하고는 눈을 떴다.

"많이 늘었네."

눈을 뜬 카시야 앞에서 에르논이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 마나를 느끼고 오신 겁니까?"

"응. 많이 늘긴 했는데, 여태 내가 가르쳐준 방법 이상을 못 찾은 것 같아서. 그 다음 단계를 가르쳐주지."

에르논은 가볍게 한숨을 쉬는 것 같더니 카시야를 향해 다가와 곁에 앉았다.

"마나의 양은 꽤 늘어난 것 같고, 양이 늘어났으니 뻗을 수 있는 범위도 늘어났는데, 속도가 느려. 웬만한 중급 마법사 정도만 돼도 네 마나를 금방 느낄 거다."

"더 빨라질 수도 있습니까?"

"물론이지. 아, 훈련을 해야 빨라지는 거긴 하지만… 아마 넌 할 수 있을 거야. 마나를 네 몸 전체로 빨리 퍼트리는 연습부터 해봐. 처음엔 가슴 한가운데에서 저항 같은 게 느껴질 거야. 하지만 익숙해지면 어부가 바다로 그물을 던지는 것처럼 마나를 네 주변으로 한 순간에 퍼트릴 수 있어. 회수도 빨라지지. 자, 시작해봐."

카시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다시 가슴 한가운데로 정신을 집중했다.

사실 가슴 한가운데로 갈무리한 마나에 흐름을 일으키고 확산시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깊이 집중해야 그나마 천천히 일어나는 반응이었던 것이다. 마나를 빨리 움직이고 확산시키려니 어느새 이마에 땀이 맺혔다. 천천히 일렁이는 마나를 억지로 손끝까지 퍼트리려니 가슴 한가운데가 조금 뻐근하게 아파왔다. 마나에 집중하느라 단속이 덜 된 잇새에서 조그만 신음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그 신음소리에 집중이 끊겨 일렁이던 마나의 느낌이 순식간에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하아…. 하아…. 놓쳤어요."

뻐근한 가슴의 통증 때문에 미간을 찌푸린 카시야가 명치 쪽을 문지르며 힘겨운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마나 코어가 발달해야 좀 더 쉬워지는데, 아직 너무 약하려나?"

"마나 코어는 또 뭡니까?"

"네 가슴 한가운데에서 마나를 퍼트리고 다시 모으는 곳이지. 마나 운용을 연습하다보면 생겨. 사람마다 마나 코어를 만드는 곳은 제각각이긴 한데, 가슴 한가운데 만드는 게 가장 일반적이야. 몸 전체로 마나를 퍼트리기도 쉽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심장을 지키기도 쉬우니까."

"그게 생겼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마나 코어를 만들려고 단련한 부분, 그러니까 너 같은 경우에는 가슴 한가운데를 가만 만져보면 피부 안쪽으로 조금 딱딱한 뭔가가 만져질 거야. 지독하게 수련한 사람은 그게 단단한 결정체처럼 생겨서 피부 밖으로 드러나기도 한다던데 그건 미하일 메레디스나 루크 페레이아 정도는 돼야 가능한 소리겠지."

카시야는 제 가슴 한가운데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하지만 제 손에 만져지는 게 그냥 가슴뼈인지 마나 코어인지 알 길이 없었다.

"흐음…. 이게 마나 코어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요. 한번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그녀의 요청에 에르논은 크게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설마하니 제 가슴팍을 만져달라고 청할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역시 그녀는 자신이 여자임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시야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열심히 제 가슴팍을 더듬어댔다. 정말 궁금한 것 같았다.

"으흠. 크흠. 뭐…. 이건… 정말 네 마나 코어가 있는지만 확인하는 거야. 이상한 생각 전혀 없다."

"알고 있습니다."

뭘 그렇게 신경 쓰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카시야가 에르논을 쳐다보았다. 에르논은 머뭇거리면서 그녀의 가슴 근처로 손을 가져갔다. 손이 떨릴 것 같아서 그는 손을 한 번 꾹 쥐어 힘을 주었다.

"호흡은 편하게 해. 허리 똑바로 펴고."

자신의 호흡이야말로 형편없이 흐트러지는 게 느껴졌지만 에르논은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조심스레 손끝을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에 댔다. 양쪽으로 볼록 솟아있는 그녀의 가슴에 닿지 않으려고 손목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손끝에 따뜻하고 말랑한 살갗이 느껴져서 얼굴이 확 붉어졌지만 카시야는 이런 쪽에 무딘 것 같으니 혹시나 물어보면 몸이 좀 안 좋다고 둘러대야지, 생각하며 에르논은 최대한 빨리 그녀의 마나 코어를 찾았다. 손끝을 조금 위쪽으로 옮기니 그냥 가슴뼈와는 확실히 다른 딱딱한 느낌이 손끝에 걸렸다.

"아…! 여기 있다."

그 순간 카시야의 막사 입구가 활짝 열리며 미하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카시야! 술 마시러 가자! 알리시아 영애가 포도주를…!"

그리고 미하일, 에르논, 카시야 셋은 각각 다른 의미로 몸이 굳었다.

============================ 작품 후기 ============================

1. mongsong 님 > 플러팅(flirting) : 쉽게 말해 이성을 꼬시는 거에요.ㅎㅎㅎㅎㅎ

2. O렌지안먹은지O렌지 님 > 짝짝짝짝짝! 여기 진카 팬 간증 글이요~!

3. 전느님 님 > ......제주산 흑우랑 흑돼지요. 그렇게 먹여주신다면 제발로 와이파이 되는 단칸방에 노트북만 들고 들어가 문 걸어 잠그겠습니다.ㅎㅎㅎㅎㅎㅎ

4. 아까 예약글 올린다는 걸 이어쓰기로 올려버려서 이번 편이 8/23 오후 3시 24분쯤에 몇 초 동안 목록에 올라가 있었을텐데요. 그때 우연히 보게 되신 분들께는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 징수니 님, 쪼미다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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