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4 믿음(6) =========================
정적이 막사 안을 채웠다.
기세좋게 막사의 입구를 열어젖히던 미하일의 눈알은 거의 튀어나올 것 같았고, 카시야의 가슴에서 미처 손을 떼지 못한 에르논 역시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미하일을 응시했다. 카시야만이 '알리시아 영애가 가져온 포도주라면 연회 때 마셨던 그 산포도주일까? 그거 맛있었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그 때의 그 맛을 떠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너 이 새끼 지금 뭐하냐?"
험악해진 미하일의 목소리가 멈춘 시간을 깨트렸다. 에르논은 황급히 손을 뗐다. 하지만 미하일이 칭한 '너 이 새끼'가 자신이라고 생각한 카시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마나 코어를 찾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그 말에 미하일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너한테 물었냐? 저 새끼 말야, 저 새끼!"
그제서야 그의 분노의 방향이 에르논을 향했다는 걸 깨달은 카시야는, 그러나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하일을 빤히 쳐다보았다.
"제가 마나 코어를 잘 몰라서 좀 찾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미하일의 얼굴은 경악과 허탈에 범벅되었다. 그러다가 그녀에게 말만한 계집애가 지금 무슨 짓이냐고 쏘아붙이려던 찰나 카시야가 선수를 쳤다.
"참! 미하일 경의 마나 코어는 어떻습니까? 마나 수련을 지독하게 한 사람은 그게 겉으로 드러나기도 한다고 들었는데요."
순수한 호기심으로 차오른 카시야의 얼굴을 본 미하일은 방금 자신이 뭐라고 말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그의 가슴 한가운데 박혀있는 단단한 마나 코어의 결정은 그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그렇게 드러나도록 마나 코어가 발달한 사람은 굉장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어? 나? 하하, 참. 이거…. 자랑은 아니지만, 내 마나 코어는 뭐, 좀 독특하지."
"한번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카시야의 눈동자가 드물게도 반짝거려서 미하일은 점점 우쭐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방금까지 이 새끼, 저 새끼 주워섬겨가며 욕을 했던 에르논의 옆에 슬그머니 앉은 미하일은 한번 더 '자랑은 아니다.'라고 강조하며 제 앞섶을 풀어헤쳤다. 단단하면서도 엄청나게 부푼 근육이 깊은 골을 만들며 쪼개진 틈 사이로 붉은 보석 같은게 박혀 있었다. 크기는 미하일의 엄지손톱 두 개를 붙인 것만 했는데 반짝거리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게 정말 신기했다. 에르논 역시 겉으로 드러난 마나 코어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카시야와 함께 미하일의 가슴에 얼굴을 박을 기세로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상체를 살짝 젖혀 제 마나 코어를 드러낸 미하일은 그 대단하다는 대마법사까지 신기해하자 히죽 히죽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카시야 경! 미하일 여기 안 왔…."
세 사람의 고개가 천막을 열고 들어오는 타셀을 향해 날아가 박혔다.
또다시 정적이 막사 안을 채웠다.
"전하. 정말 오해십니다. 저는 그냥 카시야가 보여달래서…."
"살다 살다 이런 꼴을 보게 될 줄이야…."
시뻘개진 얼굴로 열심히 스스로를 변호하던 미하일이 뒤에 앉아있는 카시야와 에르논을 향해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눈빛을 던졌다. 카시야는 도대체 타셀이 왜 정색을 하는지, 미하일이 왜 저렇게 쩔쩔 매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안절부절 못하는 미하일의 꼴을 구경하는 건 꽤나 재미있었다. 속으로 웃음을 삼키던 카시야는 또 뭔가가 떠오른 듯 타셀을 향해 물었다.
"혹시… 전하께서도 마나 코어가 밖으로 드러나 있으십니까?"
"야, 당연하지. 전하야말로 마나 괴물인데."
타셀 대신 미하일이 냉큼 대답을 하며 카시야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카시야는 어떻게 할까 조금 고민하다가 실제로 타셀의 마나 코어가 궁금하기도 하고, 미하일이 오해를 받은 게 제 탓이기도 해서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미하일 경보다 더 크게 드러나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흐음…. 정말 궁금하네요. 에르논 역시 겉으로 드러난 마나 코어는 미하일 경의 것을 처음 본 거랍니다. 저는 아직… 속에서만 조금 자라 있는 것 같습니다만, 겉으로 드러난 마나 코어는 정말 신기하네요. 미하일 경의 마나 코어보다 크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정말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타셀은 마나 코어가 궁금하다며 고개를 갸웃하는 카시야 때문에 조금 난처해졌다. 지금 막사 안의 분위기가 '당신의 마나 코어를 구경해보고 싶어요.'임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고, 처음으로 보는 카시야의 호기심 어린 얼굴을 무시하고 나가버리기에도 왠지 미안했지만 방금 미하일더러 변태 같다는 눈길을 주었던 터라 낮게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에르논이 진지하게 턱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마나 코어가 드러난다는 건 인간의 한계를 이미 뛰어넘었다는 소리야. 미하일 경보다 더 크기는 아마 어려울 거다."
그러자 타셀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타셀과 오래 함께 지내온 미하일은 그의 심경의 변화를 귀신같이 눈치챘다. 미하일이 대뜸 그의 앞에 서더니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다 연구를 위한 겁니다."라며 그의 셔츠를 좌우로 확 열어젖혔다. 카시야와 에르논은 어느새 다가와 그의 가슴 한가운데 박혀있는 까만 보석을 휘둥그래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미하일과 마찬가지로 꽉꽉 들어찬 근육 사이에 미하일의 두 배 정도 되는 크기의 마나 코어가 까만 광택을 드러냈다. 에르논은 어느새 연구자의 입장에서 그 마나 코어를 관찰하고 있었고, 카시야는 제 가슴 한가운데를 더듬으며 자신의 미약한 마나 코어와 대비되는 타셀의 마나 코어에 부러움 반, 경외감 반을 느끼고 있었다. 타셀은 순식간에 희롱당하는 처녀의 기분이 되어 그 시선을 막지도 못하고 피하지도 못하며 귓불을 붉히다가 뒤늦게 미하일을 향해 험악한 눈길을 보냈다. 미하일은 통쾌하다는 듯이 낄낄대고 있었다.
그들이 타셀의 막사 근처에 피운 모닥불로 다가간 건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미하일은 결국 타셀에게 복부를 한 대 맞았고, 에르논에게 "어느 정도 수련을 하면 저렇게 드러날 수 있는 겁니까?"라고 물었던 카시야는 "꿈도 꾸지 마라."라는 대답을 듣고 조금 실망한 상태였다.
모닥불 근처에는 타셀군의 수뇌부와 그들이 아끼는 부하들만 모여 알리시아가 가져온 포도주를 맛보고 있었다. 카시야와 에르논의 등장에 잠시 대화가 멎었지만 타셀이 휘 둘러보는 눈빛에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포도주 칭찬을 해댔다. 타셀과 미하일, 카시야와 에르논 앞에도 곧 검붉은 빛깔의 향 좋은 포도주가 대접되었다.
카시야는 가볍게 향을 맡다가 곧 혀끝과 입안을 포도주로 적셨다. 역시나 마음에 드는 맛과 향이었다. 전생에서도 포도주를 좋아하던 카시야였지만 이렇게까지 마음에 드는 것을 마셔본 기억이 없었다. 알리시아가 있었다면 포도주 칭찬을 했겠지만 남자들만 득실대는 그 자리에 귀족 영애가 끼어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그냥 혼자 그 만족감을 즐기기로 하다가 곁에 앉은 에르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역시 포도주가 마음에 들었는지 꿀떡꿀떡 마셔대고 있었다.
"데런의 미르바하라 산에서 나는 산포도로 담근 포도주라고 하더군요. 맛있지 않습니까?"
에르논은 웬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제가 쥔 잔을 바라보았다.
"응. 차라리 이 포도주로 날 꼬이는 게 더 잘 먹힐 거 같은데? 이렇게 맛있는 포도주는 처음이야."
에르논은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인지도 모르지만 카시야는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이 포도주를 만든 포도가 미르바하라 산에서만 난답니다. 다른 데서는 못 마십니다."
카시야의 은근하고 끈덕진 설득의 눈빛을 느낀 에르논은 잠시 당황하다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카시야는 내심 빙그레 웃었다. 그의 단단하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게 느껴졌다.
애초에 가져온 수량 자체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데런 특산 포도주 시음회는 오래지 않아 끝났다. 하지만 혀끝에 남아 맴도는 포도주의 향이 길게 여운을 남겼다.
카시야는 에르논을 데리고 자신의 분대 근처의 모닥불가로 자리를 옮겼다. 에르논에게 불신 가득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수뇌부 앞에서는 여유롭게 앉아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르논은 마력이 허락된 양이 너무 적어 어딘지 불편해보였다. 저도 모르게 목에 걸린 백금 사슬을 잡아당기려다 전기라도 통하는 것처럼 깜짝 놀라며 손을 떼곤 했다.
"이거야말로 개목걸이 같네. 쯧."
한 몸에 개목걸이를 두 개나 걸게 된 대마법사는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 그 때마다 카시야는 '조금만 더….'라고 애타게 생각하며 자신의 침상 밑에 숨겨진 속박 마법 필사본을 떠올렸다. 그의 목줄을 쥐고 있는 인물은 알리스타스 공작도, 타셀도 아닌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이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얼른 그 열쇠를 넘겨주고 싶은데, 에르논은 아직도 고집스럽게 마지막 벽을 허물지 않고 있었다. 조금만 더 달래면 될 것 같은데, 그 조금이 굉장히 어려웠다.
카시야는 그가 지키고 있는 그 고집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에르논의 입장이라 하더라도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간단히 허물어버린다면 이제까지 참고 버틴 자신의 과거가 너무도 하찮아진다. 게다가 여태껏 자신이 죽여온 이들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 살 수 있을만큼 뻔뻔한 성격도 못된다. 또다른 노예 생활이 되지는 않을지, 어제까지 자신의 아군이었던 이들을 죽여대야 하는 건 아닌지도 두려울 터이다.
그렇다.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다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봤던 그녀이기 때문에 그가 세우고 있는 마지막 마음의 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무너뜨려야만 했다. 에르논이 그 벽을 무너뜨린다면, 그것은 아마 죽음을 각오한 마음일 것이다. 그렇게 된 다음에서야 속박 마법의 열쇠를 건네줄 수 있다는 게 미안했다. 아마 그는 또 한번 제게서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야만 해.'
에르논이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을 때 속박부터 풀어준다면 그는 폭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그렇게 풀려나길 원했으면서도 10여년 간 길들여진대로 알리스타스 공작에게 돌아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전생의 자신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카시야 델 로만에게 자유를 주었다고 치자. 과연 자신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인정하기 싫지만, 인간 병기로 키워져 살육의 도구로만 살았던 자신은 도로 자신의 주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이유? 그에게 돌아가는 것 외에 그녀가 해야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자유는 달콤하지만 억압에 오랫동안 지배당했던 이는 그 자유가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러니 에르논에게 자유와 행복감을 맛보여주고 자유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켜야 했다. 처음에는 촉박한 시간에 조바심이 났지만 그는 생각보다 빠르게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카시야는 자신이 에르논의 해방을 간절히 원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해방을 통해 전생의 자신 역시 해방되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기심이 발로가 된 자기만족일 뿐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애타게 원했다.
"에르논."
그녀의 부름에 에르논은 시선만 돌려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카시야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자유를 갈망하세요. 당신이 진정으로 자유를 원하기만 한다면, 내가 반드시 줄 테니까."
============================ 작품 후기 ============================
1. 제가 절단신공에 소질이 있는 건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전편 잘린 데서 다들 다음편 외칠 줄은 알고 있었어요. 하하하^ㅁ^;;
2. 여러분들의 코멘트 정말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다른 작가분들은 악플도 많이 달려서 힘드시다고들 하던데, 우리 독자님들은 다들 천사이신듯. ㅠㅗㅠ
+ 징수니 님, 롤링페이퍼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