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홍의 카르마-66화 (66/134)

00066 믿음(8) =========================

타셀군은 이번의 승전으로 페미도르 지역까지 세를 넓힐 수 있게 되었다. 페미도르는 기존에 케일런군이 차지하고 있던 땅이었기 때문에 황폐하다고 할 수 밖에 없을 만큼 모든 물자와 인력을 수탈당한 상태였다. 전투가 벌어지던 벌판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마을에도 젊은이라고는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고, 늙은이와 어린 아이들만이 오늘, 내일하며 가느다란 목숨줄을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상태가 심각하네요. 사람들이 먹고 살만한 건 남겨 뒀어야지, 빌어먹을 놈들…."

페미도르의 마을을 순찰하는 타셀의 곁에서 지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마을 사람들은 승전한 타셀이 저들을 죽일까봐 집안에 틀어박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미 케일런군에 수탈당했던 기억이 있는 그들은 타셀군의 기사들이 감자라도 나눠주기 위해 문을 두드려도 절대 나와 보지 않았다. 타셀이 마을 광장이라고 할 만한 곳에 주민들에게 나눠줄 물자를 쌓아두고 함께 이끌고 온 병사들을 적당히 주둔시켰다.

"다들 공포에 질려있군. 잠시 기다려보자. 우리가 왜 왔는지 궁금하기도 할 테니, 누군가는 나와 보겠지."

타셀은 병사들에게 함부로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 말도록 주의를 주고 커다란 나무 아래서 쉬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한낮쯤이 되자 마을의 장로 비슷한 이가 누렇게 뜬 얼굴을 하고 비척비척 다가왔다. 그의 뒤에는 죽음을 각오한 얼굴의 노인들이 간신히 지팡이에 의지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타셀 칸 아마리스 전하를 뵙습니다. 저는 이 마을의 대표인 아케인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소, 아케인."

부드럽게 마주 인사하는 타셀의 태도에 아케인이라는 노인은 조금 용기를 얻은 것 같았다.

"전하께서는 이 마을에 어인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대단히 황공하옵게도, 저희는 비축해둔 곡식이나 음식도 없고, 마을에는 젊은이도 없어 차출해 가실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부디… 이 늙은이들이 남아있는 아이들만이라도 키울 수 있도록… 제발 아량을 베풀어주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 그를 비롯한 노인들이 비실비실 바닥에 엎드려 빌었다. 그들의 주름지고 구부러진 손이 절망적으로 달달 떨리고 있었다. 마침 그들을 따라 나왔던 어린 아이 하나가 노인들의 절망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울기 시작하자, 그 아이의 보호자로 보이는 노인이 황급히 아이의 입을 틀어막으며 쉴 새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의 모습은 참담하고 슬프기 그지없었다.

"하아…. 1황자 군대가 어떤 식으로 왔다 갔는지 대충 알겠네요."

미하일이 어금니를 까득 깨물며 험악한 목소리를 냈다. 노인들은 그 목소리에 서린 분노만으로도 기절할 듯 몸을 떨며 눈치를 보았다.

타셀은 천천히 일어나 아케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어 바닥에 엎드린 그의 어깨를 일으켰다.

"아케인. 일어나시게. 우리는 그대들을 수탈하러 온 것이 아니니 두려워하지 말게. 그동안 고생 많았네.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 감자와 곡식을 받으러 나오라고 일러주게. 많은 양은 아니지만 굶주림을 면할 정도는 될 걸세."

황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자신의 어깨에 손을 대 일으켜주고 차분한 목소리로 달래주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 모양인지 아케인은 주름진 눈을 크게 뜨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는 타셀의 따뜻한 모습에 그는 곧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으… 으흐흐흑…. 전하…. 전하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의 뒤에서 엎드려있던 노인들도 곧 엉엉대며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 쌓여온 공포와 분노, 억울함과 비탄이 한꺼번에 폭발한 듯했다. 타셀은 그들이 울게 잠시 내버려두었다. 가슴에 쌓인 울분은 차라리 울어서 풀어내는 게 낫다는 걸, 그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자, 더 그렇게 울다가는 탈진하겠네. 진정하시게. 지크! 광장 가운데 솥을 걸어 감자를 삶도록 해라. 다들 오랫동안 굶주려 기력이 없는 것 같으니, 당장 먹을 것은 직접 삶아서 배급하는 게 나을 것 같구나."

타셀은 노인들을 달래고 지크에게 감자를 삶도록 지시했다. 감자 삶는 냄새가 마을에 퍼지면 다들 나와 보게 될 것이다. 노인들은 정말로 울다가 탈진할 것처럼 비틀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크와 미하일이 바쁘게 지휘를 해서 마을 한가운데 솥을 걸고 불을 뗐다. 물이 끓는 소리가 나자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이들이 하나, 둘 씩 창문틈새로 빼꼼이 내다보기 시작했다. 감자가 삶아지는 냄새가 피어나기 시작하니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아이들부터 밖으로 기어 나왔다. 어딜 보아도 살집이 오른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젖살로 포동포동해야할 아이들이 뼈가 다 드러날 만큼 앙상해져서는 두려움도 잊은 채 감자를 삶는 솥 근처로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칼이나 창을 든 병사는 안중에도 없이 삶아지고 있는 감자만 애타게 바라보았다. 타셀의 병사들은 마을을 뛰어다니며 나와서 감자를 받아가라고 소리쳤다.

냄새 덕분인지 마을 사람들이 광장으로 전부 다 몰려나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고 있는 노인들부터 앞으로 나오시오!"

배급은 아이를 데리고 있는 노인이나 병석에 있는 노인을 수발하는 사람-그 역시 노인이었지만-에게 먼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오랜만에 보는 뽀얀 감자덩이를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린 아이들은 너무도 배고픈 나머지 뜨거운 김도 채 가시지 않은 감자를 집어먹느라 입안을 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모두가 행복하고 감격스러워했다.

"아이들이 꽤 많은 걸 보니 젊은이들도 많았던 마을 같은데, 이렇게나 젊은 사람들이 없다는 건… 남아있는 이들은 죽으라고 했던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렇게 어린 아이들을 남겨두고 잡혀갔을 부모들 심정은 도대체 어땠을지…."

병사들은 자신의 이웃을 보는 듯 괴로워했다. 그들 역시 고향에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떠나온 몸이긴 했지만, 적어도 타셀을 따르는 데 강제성은 없었다. 타셀이 황제를 등지기로 마음먹었던 그날, 따르지 않을 자들은 돌아가도 좋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향으로 내려갔더라면 황제군이나 1황자군의 어느 쪽으로든 차출당했을 테니 차라리 타셀을 따르자 했던 것이지만, 마을의 상황을 보니 자신이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들 생각했다. 아울러 고향에 있을 자신의 가족이 걱정되기도 했다.

타셀을 따라 나온 카시야와 에르논 역시 마을의 광경을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케일런군은 언제나 이런 식입니까? 마을에 남겨둔 것이라고는 죽음 밖에 없군요."

카시야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마을에 노인과 아이들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타셀이 오지 않았더라면 며칠 내로 다 굶어죽었을 것이다. 식량도, 씨앗도, 일하거나 먹을 것을 구하러 갈 사람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식이지. 1황자는 겉으로 보기엔 거칠어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한 겁쟁이야. 혹시나 군량이나 자원이 모자랄까봐 지나는 지역을 다 털어내지. 남겨두면 2황자가 수복했을 때 그의 것이 될 거라고도 생각하니까."

마을에 감자의 고소한 냄새가 퍼지자 버석버석 말라비틀어진 것 같던 마을의 분위기가 한결 몽글몽글해졌다. 병사들은 환자들을 위해 감자에 밀가루를 섞은 스프를 끓여 나눠주기도 했다. 가족이나 이웃이 죽어가는 것을 눈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몇 번이고 엎드려 절하며 감사인사를 했다.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병사들 역시 눈가를 적셨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카시야는 자신의 결정으로 박살났던 중동의 크고 작은 마을들을 떠올렸다. 전쟁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르는 것은 언제나 전쟁과는 상관없는 이들이었다. 죄 없는 민간인들을 희생시켰다는 점에서 미군이나 연합군도 떳떳할 수 없었다.

물론 카시야는 지금도 ICS에 맞서 연합군이 형성되고 그들을 토벌했던 것이 옳다고는 생각했다. 그들이 주장하던 기치는 절대 그 종교의 신이 원했던 바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은 경전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 골라 제멋대로 해석했다. 결과적으로는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를 원했으니, 신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려던 것과 다름없다. 그대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자국을 지키기 위함이든 인류애를 위함이든 강대국이 나선 것은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죽을 때까지 연합군은 ICS 토벌에 애를 먹었고, 그러는 사이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리고 어제와 똑같은 평범한 하루를 보내려던 그들의 오늘을 폭파한 것은, 주인의 의지를 전달받은 카시야의 손끝이었다.

그녀는 그 종교를 믿는 선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었다. 연합군의 암살자인줄도 모르고, 그 마을을 폭파하려는 자인 줄도 모르고 이방인을 다정하게 대해줬던 크고 까만 눈동자의 사람들…. 지금 이 마을에서 살던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을 사람들이었다.

카시야는 자신이 케일런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점점 불쾌한 기분이 되었다. 케일런은 남아있는 이들이 어떻게 될지는 관심도 없었겠지. 남아있는 자들이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했겠지만 죽어가는 과정에서 느낄 고통은 굳이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안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자신도 거대한 폭발과 불덩이에 죽어갈 이들이 느꼈을 고통 따위, 생각해본 적 없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카시야는 전생의 자신이 저질렀던 짓들이 맹렬히 후회스러웠다. 이제는 도로 물릴 수도 없는 일들이 연이어 떠오르자 카시야는 기분이 아주, 아주 더러워졌다.

하지만 지금 이 삶에서라면, 자신은 전생의 과오를 대신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많은 이들이 의미도 없는 희생을 당하기 전에 이 전쟁을 멈춰야 했다. 에르논이 스스로 마음을 정해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조금 앞당길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카시야는 조금 억지를 부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에르논."

"응?"

"좀 더 기다리려고 했는데… 안 되겠습니다. 지금 뭘 고민하고 있을지 잘 알지만, 이만 저희 쪽으로 와 주십시오."

"…뭐?"

"그냥 저를 믿고, 저희 쪽으로 와 주십시오. 당신이 걱정하는 거….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에르논은 카시야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보다는 그녀의 그 변화 때문에 갑자기 시작된 자신의 두근거림이 더 당황스러웠다. 여자에게 이런 식으로 두근거려본 적이 없었다. 평소보다 훨씬 빨라진 심장 박동 때문에 그의 하얀 낯빛에 핏기가 확 돌았다. 에르논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완벽히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우선 모르는 척 해보았다.

"무, 무슨 말이야…?"

그 말에 카시야가 에르논을 돌아보았다.

"다른 걸 못 믿겠다면… 날 믿어요, 에르논."

카시야의 낮고 중성적인 목소리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우리와 함께 합시다."

카시야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래 줄 거죠?"

카시야의 매력적인 미소는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하아. 제기랄…. 너희 분대원들 말이 맞아. 넌, 마녀야."

에르논은 아마도 분홍빛이 됐을 얼굴을 살짝 모로 돌리며 못이기는 척 그녀에게 넘어가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 허락은 결코 분위기에 홀린 정도의 가벼운 결심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엄청난 고통을 수반할 수 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명치에 새겨진 문양이 아파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은 이미 그녀가 처음 제안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의 대답을 들은 카시야가 빙그레 웃었다. 에르논이 티를 낸 건 아니었지만 카시야는 그가 어떤 마음으로 수락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줄 수 있겠구나. 조금만 참아요, 에르논.'

그가 속박 마법의 필사본을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카시야는 정말로 기대됐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이 기다리셨던 연참을 가지고 왔습니다. 꼴랑 2연참이지마는...

네... 200개쯤이야... 금방 될 줄 알았죠.ㅎㅎㅎㅎ

+ 전느님 님, 사탕먹는인형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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