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7 믿음(9) =========================
타셀은 페미도르 지역 내의 마을들을 돌며 긴급 구호 식량과 씨감자를 배급하고, 두려움에 떠는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각 마을에는 1분대 정도를 남겨 주민들이 사는 건물을 수리해주거나 감자를 파종하는 등의 일을 하도록 했다. 타셀군은 물자가 넉넉한 편은 아니라 마구 퍼줄 수는 없었지만, 주민들은 그 작은 도움만으로도 코앞에 들이닥쳤던 죽음에게서 꽤 멀리 도망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권력을 쥔 자가 자신들같이 힘없고 하찮은 이들을 돌보아줬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느끼는 동시에, 불안에 점철됐던 삶을 조금씩 추스를 용기를 내었다. 이미 카시야에게 수락의 말을 던진 에르논이었지만 타셀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가 백성들을 애틋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는 타셀이라는 지도자 자체에게도 꽤나 흔들렸다.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도 자꾸 생각났다.
'당신은 의지 없이 휘둘리는 도구가 아니야,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지.'
인간이라면 당연히 생각을 하며 지낸다. 머리를 다쳐 살지도, 죽지도 못하고 누워있는 사람이거나 끊임없이 잠만 자며 누워있는 아기나 노인 같은 이들을 제외한다면 그것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라는 게 어디로 얼마만큼 뻗어나가는가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그 범위를 넓히라는 것이나 다름없던 타셀의 제안이 에르논으로서는 어색하고 당황스러웠다. '딴 생각 하지 말고 시키는 것만 제대로 해.'라는 말을 밥 먹듯 들었던 그였으니 당연했다.
불편하면서도 간질거리는 것은 또 있었다. 케일런군에 있을 때는 자신을 두려운 존재나 괴물 같이만 보던 병사들이었는데, 카시야의 분대원들은 다들 거리낌 없이 다가왔다. 물론 자신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태도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근한 태도는 꽤나 마음을 흔들었다. 분명 자신이 세운 가시가 똑똑히 느껴질 텐데도 다들 모르는 척 어깨를 슬쩍 부딪치고, 미소를 보내왔다. 어떤 놈은 찡긋 윙크를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공작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남창처럼 여기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카시야 분대원들끼리의 전우애 같은 것이었다. 그걸 알았을 때 터져 나오던 웃음은 자신으로서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라 미처 막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그렇게 한 번 웃어버리니 분대원들은 다시 마주 웃으며 그를 여러모로 챙겼다. 에르논으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따뜻함이었다. 그의 정체를 들킴으로서 잃을 것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는 최근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대해줄까….'
카시야가 장담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곳이 전쟁터라고…. 그렇다면 분명 자신이 그들에게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할 것이다. 물론 손쉽게 할 수 있는 속죄가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타셀군의 병사들이 자신에게 그렇게 크게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자신을 알아보는 자가 없는 것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거리에 있던 자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루크 페레이아조차도 자신만큼 악명 높지는 않았다.
카시야의 제안을 수락하기로 마음먹은 에르논은 병영까지 돌아오는 내내 그 ‘속죄’에 대한 생각을 곱씹었다.
페미도르의 몇 개 없는 마을을 돌며 긴급 구호를 마친 타셀의 군대가 병영으로 돌아오는 데는 이틀이 더 걸렸다. 마을마다 1개의 분대를 남긴 탓에 떠날 때보다는 규모가 훨씬 간소해진 상태였다. 각 마을에 파견한 병사들은 일주일 후부터 차례로 돌아올 것이다.
타셀이 지크, 미하일과 함께 구호에 관한 회의를 하러 막사 안으로 들어간 사이, 카시야는 에르논을 이끌고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야. 그런데 너 혹시, 아무나 이렇게 너 혼자 있는 막사로 끌고 들어와?"
의심쩍다는 투로 묻는 에르논을 향해 카시야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정확히 어떤 걸 물어보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나, 라고 하면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건가요?"
"아니, 뭐…. 남자들…?"
"여긴 죄다 남자들인데, 그 중에서 누굴 말하는 겁니까?"
"…아니, 됐다."
카시야와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만 바보가 되는 것 같아 에르논은 허탈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 나는 왜 데리고 온 거냐?"
"드릴 게 있습니다."
"나한테? 잡아놓은 물고기한테는 먹이를 안 주는 거 아니었나? 이미 잡아놓고, 뭘 주려고?"
에르논은 답지 않게 농담조로 물었지만 카시야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비쳤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막사 밖을 한참 내다보더니 입구를 단단히 여미고 어리둥절한 표정의 에르논을 뒤돌아 보았다. 카시야는 이 세계에서 눈 뜬 뒤 처음으로 긴장과 흥분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동안 미처 생각지 못했던 걱정이 흘러들었다. 혹시 속박 마법의 필사본만으로는 저 마법을 못 푸는 게 아닐까, 이걸 갖고 있었으면서도 그동안 자신을 농락했다며 화내는 건 아닐까, 아니면 혹시 기억의 착오로 전혀 엉뚱한 마법 문양을 베껴온 게 아닐까….
카시야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에르논. 저기…."
카시야가 왠지 머뭇거렸다. 뺨에 홍조가 비치는 것도 같았고 호흡도 많이 흐트러져 있는 것 같았다. 에르논은 전혀 그녀답지 않은 태도에 점점 의아함을 느끼다가 언젠가 성의 하녀 하나가 이와 비슷한 행동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뭐지? 이거… 왠지… 뭐랄까… 그때 그 하녀처럼… 고, 고백하려는 것 같은 분위긴데….'
공작의 채찍질에 널브러진 그를 간호해주던 하녀 하나가 그의 외모에 반해 이런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며 고백했던 적이 있었더랬다. 공작의 아들로 진짜 인정을 받았더라면 하녀 따위가 감히 고백할 생각조차 못했겠지만, 공작성에서 그는 시종보다 못한 취급을 당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그 하녀 역시 그를 대단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물론 그는 연애놀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데다가, 어쨌든 알리스타스 공작가 호적에 이름을 올린 입장으로서 자존심이 상해 심한 말을 쏟아 붓고 그녀를 내쫓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왠지 엄청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카시야가 고백을 했을 때 어떤 대답을 하면 좋을지 여러 각도의 시뮬레이션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 어느 하나도 '거절'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았다. 에르논은 짐짓 태연한 척하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왜? 무슨 얘길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여?"
카시야가 긴장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아 축였다. 그걸 에르논이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일단… 편하게 앉으시죠. 후우…."
카시야는 에르논을 의자에 앉힌 뒤 축축해진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는 자신의 침상 밑 깊숙한 곳에 손을 찔러 넣었다. 기대감에 눈을 빛내던 에르논은 그 모습을 보고 눈썹을 살짝 찌그러트렸다. 침상 밑을 휘젓던 그녀의 손이 무언가를 찾은 듯 도로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네모반듯하게 접힌 종이 몇 장이 있었다.
'흐음…. 혹시… 말로 하기 부끄러워서 편지를 쓴 건가? 의외로 수줍음을 많이 타나 보네.'
에르논은 자신의 추측이 꽤나 그럴 듯한 것 같아서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밖에서는 무뚝뚝한 카시야가 제 막사에서는 혼자 뺨을 붉히며 사랑 고백 편지를 쓰다, 구겨 던지다, 다시 쓰는 모습이 자꾸만 상상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카시야의 얼굴에는 고백을 하려는 사람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긴장감과 비장함이 흘렀다. 그제야 자신이 착각했나 의심하기 시작한 에르논은, 그 순간 갑자기 들이밀어진 그녀의 손을 앞에 두고 그 종이와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게 뭐야?"
"일단… 열어 보십시오."
에르논은 미심쩍은 얼굴로 조심스레 그 종이를 받아든 뒤 다시 한 번 카시야의 얼굴을 살피다가 탐탁지 않은 태도로 종이를 폈다. 그러나 종이를 잠시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서서히 엄청난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아무 소리도 없이 찬찬히 종이를 읽었다. 한 장, 한 장 넘겨지는 종이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카시야는 그의 그 태도가 긍정적인 반응인지, 부정적인 반응인지 가늠하느라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지막장까지 꼼꼼히 다 읽은 에르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 벌어진 입은 무엇부터 말해야할지 헤매는 듯 굳어있었고, 눈동자는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에르논…. 이게… 맞습니까?"
카시야의 물음에 그제야 에르논이 거친 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흐윽, 흐윽, 흑…, 흐윽…."
"에르논…."
카시야가 다시 그를 불러보았지만 그는 고개를 떨어트린 채 계속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흐느낌이 섞인 것 같기도 했고, 아주 오랫동안 쌓인 울분이 섞인 것 같기도 했다. 그 소리는 점점 커져 신음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는 손에 쥐어진 종이를 꽉 쥐어 구겼다. 손가락이 종이의 나머지 부분을 그러모으자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모습에 카시야는 크게 당황했다. 저렇게 구겨버리는 것을 보면 필요 없는 것 취급인 듯 했으니까.
'이게… 아닌가…?'
카시야는 재빨리 다시 리치엘 저택에 갔다 올 계획을 머릿속으로 세우고 있었다. 이것이 아니라면 이번에는 제대로 준비해서 다녀오면 된다. 책이 꽂혀있던 위치도 대강 알고 있으니, 이번에는 그의 문양을 제대로 그리고 가서 똑같은 것을 찾아내면 될 것이다. 황제 밑에 있는 마법사들이 필사를 위해 파견될 거라고 했던 것이 조금 걱정이긴 했지만, 무슨 수를 쓰든 찾아내야 했다.
"이게 아닌가 보군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에르논. 제가 다시 가서 정확한 것을 베껴 오겠습니다."
카시야가 에르논을 달랬다. 하지만 그 순간 에르논의 손이 쥐고 있던 종이를 떨어트리고 카시야의 손목을 휘어잡았다.
"…어디서 찾았어, 저거."
"헬라스 리치엘의 저택에서요. 대마법사 헬라스가 쓴 책에 있었습니다."
"씨이…발…. 그래서… 못 찾았구나…. 끄으윽…."
카시야는 지금 이 반응이 가리키는 바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에르논. 괜찮은 겁니까? 저 좀 보세요, 에르논."
그래도 고개를 들지 않는 에르논 때문에 카시야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에게 잡히지 않은 쪽 손으로 그의 턱을 받치고 가볍게 위로 들었다. 의외로 힘없이 들린 그의 얼굴은 뭐라고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어느새 보라색으로 돌아온 그의 눈동자는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고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당신이 찾던 게… 맞습니까? 아니라면 말씀해주세요. 어떻게든 찾아다 드릴 테니까."
카시야의 반복된 물음에, 그제야 에르논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럴 필요 없어…. 저게… 맞으니까."
"예? 그럼…! 저렇게 구겨서 버리면 안 되는…!"
"괜찮아. 이미 다 외웠으니까."
그의 말에 이번에는 카시야가 말문이 막혔다.
'석장을 빽빽이 채운 술식을, 한 번 읽는 것으로 다 외웠다고….'
땅에 떨어진 종이를 가만 바라보고 있던 에르논은 그것을 다시 집어 들고는 작은 불을 일으켜 그 종이를 태워버렸다. 거기에 눈이 조금 커진 카시야를 향해, 아직 감정의 동요를 다 잠재우지는 못한 에르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날 위해 이런 걸 갖고 왔다는 거, 걸리면 네가 곤란해질 거 아냐?"
카시야는 잠시 공중에서 재가 되는 종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숨을 내쉬었다.
"맞다니 다행이군요. 아닌 줄 알고 내심 조마조마했는데…."
한동안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에르논이 완전히 감정을 갈무리한 듯해서 카시야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럼 이제… 속박을 풀 수 있는 겁니까?"
에르논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카시야는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기쁨이 차올라 조금 민망한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풀지 않으려고."
"예? 아니, 왜요?"
속박 마법의 술식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속박의 저주를 풀어낼 줄 알았던 에르논은 뜻밖의 말을 했다. 저 개목걸이가 지긋지긋한 게 아니었던가.
자신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카시야를 지긋이 마주보던 에르논이 뭔가를 단단히 결심한 듯 했다. 그의 눈에 떠오르는 불꽃이 느껴졌다.
"네 믿음에 대한 보답을 해야지."
에르논의 말뜻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찌푸리는 카시야를 보며 에르논은 덧붙였다.
"네 말대로 공작은 반드시 날 찾을 거다. 날 정말로 믿는다면, 일단 공작에게 보내줘. 그 안쪽부터 깨부숴주지."
============================ 작품 후기 ============================
1. 저는 사실 진카 연재 첫날부터 일일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7월 12일부터요. 하하하!
2. 노블레븐 님 > 그러니 아마... 8월 끝나도 일일연재 하지 않을까요? 가끔 넘어가는 날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요.
3. kyaram 님 "비축분이 떨어지거나 글이 잘 안 써질 때가 오면 본편 대신에 인물들 프로필 같은거 올려주실 수 있나요?되게 궁금하더구요ㅎㅎ" > 좋은 아이디어 감사합니다!! 8월말까지 일일연재 후 일일연재 자축 보상으로-_-;; 한 회차는 요렇게 올리겠습니다.
즐거운 일요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