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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68화 (68/134)

00068 뜻밖(1) =========================

타셀이 기사들과 더불어 수복 지역의 구호에 대한 회의를 거의 다 마칠 때쯤 하늘은 완전히 깜깜해져있었다. 기사들을 내보내고 지크, 미하일만을 남긴 타셀은 자세를 조금 풀었다.

"계속 무리하고 계십니다. 저쪽이 추스르는 것도 시간이 꽤 걸릴 테니, 전하께서도 조금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법을 사용한 전투 이후 타셀은 여유롭게 쉬기는커녕 오히려 더 바쁘게 일을 해야했다. 물론 그 전투 이전에도 타셀이 여유를 부려본 적은 없었다. 많은 이들의 운명과 미래가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자각하면 할수록, 그는 차라리 자신의 몸이 부서지도록 일해 그것을 이뤄낼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볼 때면 차오르던 동정심과 책임감과 무력감이 지금도 그에게 자신을 몰아붙이게 하고 있었다.

"후우…. 방심은 패배의 또 다른 이름이지. 별로 힘든 건 아니니까 걱정 마."

"전하께서 결정적인 순간에 쓰러지시면 그것이야말로 큰일입니다. 조금은 저희를 믿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크가 서운하다는 듯 눈썹을 끌어 모으며 타박하듯 말했다. 그들을 못 믿는다기보다는 그들 역시 힘들 텐데 자신 혼자 쉬기가 미안했던 것일 뿐인 타셀은, 하지만 지크의 청을 들어주는 게 그를 더 기쁘게 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이번만큼은 지크에게 져주기로 했다.

"알았다. 그렇게까지 걱정해주니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군. 내일 하루는 일정 없이 쉬도록 하지."

그의 말에 지크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그때 보초병이 아나클리프 백작과 영애의 방문을 알렸다.

"안으로 모셔라."

타셀의 허락에 들어온 아나클리프 백작과 영애는 타셀에게 예를 올리고 그가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알리시아의 아름다움은 전장의 척박함으로도 가릴 수 없는 것이었다. 지크와 미하일 형제는 그녀로 인해 막사 안이 환해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간호부대의 총책임자로서 보기와는 달리 똑부러지게 일을 해나가고 있었다. 과연 회색 늑대의 딸이라고 해야 할지, 고작 열여덟 살의 영애가 해내고 있다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끄럽고 열정적인 모습이었다. 엔드로스는 그런 자신의 딸을 반쯤은 자랑스럽게, 그러나 반쯤은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알리시아는 모자라는 약품의 수급을 논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타셀을 찾아온 참이었다.

"데런에서 수배할 수 있는 최대물량을 가지고 왔지만, 이번에 각 마을을 돌며 배급한 구호물자에 약품도 포함되어 있어 앞으로 또 전투가 벌어진다면 병사들에게 쓸 약품은 절대적으로 모자라게 됐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미 변경귀족 연합에 속해있는 알토냐 백작가와 벨린 백작가의 영지에 군수 물자가 꽤나 숨겨져 있다고 하는데 저희의 요청에는 굉장히 소극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전하께서 압박을 넣어주실 수 없으실런지요?"

파란 눈동자가 또랑또랑하게 빛나며 대담하게도 황자를 압박하고 있었다.

사실 알토냐 백작가와 벨린 백작가를 중심으로 몇몇 귀족들은 타셀 쪽에 의탁하기는 했으나 전세를 보며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었다. 모든 지원 요청에 소극적이었고 황제나 1황자와도 간간이 서신을 주고받는다는 첩보가 있었다. 그럼에도 귀족 하나가 아쉬운 타셀은 매섭게 내치지 못하고 주시하고만 있었다. 타셀의 고민을 눈치 챈 알리시아는 더욱 단호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전쟁에서 피를 흘리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황제 쪽이든 1황자 쪽이든 저희든 마찬가지지요. 모두가 어려운 이 마당에, 저런 식으로 자신들은 피해보는 것 하나 없이 승자에게 붙으려는 인간들은 전하께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지금이 적기입니다. 그들 역시 승기가 전하께 기울었다고 생각할 거예요. 승리의 단 꿀을 빨고 싶다면 그만큼의 성의를 보이라고 하십시오. 만약 그랬는데도 미적거리면 단호히 내치시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귀족들의 물자로 그들과 그들의 군대까지 입히고 먹이고 치료하는 중인데 전하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귀족들의 사기마저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아직 어린 탓에 분을 못 이기고 조금 씩씩거리기는 했지만, 곱디고운 외모와는 전혀 다르게 강단 있고 대범한 아가씨였다. 오히려 타셀보다 더 과감한 부분도 있는 것 같았다. 지크와 미하일은 동시에 그녀가 황후감이라고 생각했다. ‘제국 제일을 다투는 미모’라는 상징성 때문이라도 그녀가 황후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타셀의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그 성정이 더욱 탐났다.

"알겠네. 영애의 말대로 지금쯤 한 번 정리가 필요하긴 해. 안 그래도 주시하고 있던 자들이고, 이번 전투 때 가장 소극적으로 움직이던 군대여서 결단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했네. 구호물자 지원을 핑계 삼으면 되겠군. 고맙네, 영애."

타셀의 말에 알리시아는 만족스럽게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딸이 너무 되바라진 말을 하지 않았나 싶어 조마조마해 하던 엔드로스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요청이 있다면 무엇이든 편하게 해보게.”

"저…. 그럼 혹시… 제 호위 기사를 바꿀 수 있을까요?"

알리시아의 요청에 타셀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음? 지금 영애의 호위기사가 무슨 문제라도…?"

"아…. 그, 그게…."

알리시아는 난감한 태도로 엔드로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엔드로스는 아까까지와는 달리 단호한 태도로 타셀을 향했다.

"사내 녀석들은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차마 말씀드리기는 민망한 일들이 자꾸 벌어져서, 제가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타셀의 눈이 커졌다. 이 험한 전쟁터에 자원해서 찾아와준 알리시아가 기특해서 타셀 나름대로는 우수한 기사들로만 추려 그녀의 호위로 보내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주변을 살펴보니 지크는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크. 무슨 일인지 고해라."

"아, 뭐…. 혈기왕성한 젊은 사내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영애를 호위하게 되었으니 벌어질 일이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다들 상사병을 앓는답니다. 아침마다 저 뒤편의 산을 뒤져 꽃다발을 만들어 온다는 놈도 있고, 시를 쓴다는 놈도 있고, 일반 간호 병사마저 영애 앞에 다가오는 걸 막는 놈도 있다네요. 에효."

한숨 섞인 지크의 보고를 받고 타셀은 자신이 저지른 짓인 양 부끄러워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랫동안 여자를 못 본 사내놈들의 날뛰는 심장이 한 떨기 꽃송이 같은 미녀 앞에서 멀쩡할 리가 없었으니 자신이 만들어낸 일인지도 모른다. 타셀은 재빨리 얼굴을 쓸어 민망한 기운을 감추고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영애가 원하는 호위 기사가 있다면 말해주게. 누구든 붙여주겠네."

"저는 카시야 경께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카시야 경은 바쁘시다고 해서요…. 카시야 경과 비슷한 여기사 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입에서 카시야의 이름이 튀어나와 타셀과 쌍둥이 기사는 꽤나 놀랐다.

"영애가 카시야 경을 어떻게 알고…?"

"후훗. 저희 친해요~! 서로 알몸도 다 본 사이라구요."

말괄량이 소녀처럼 웃는 알리시아를 향해 엔드로스가 헛기침을 하며 저지했다. 그의 나무라는 듯한 눈빛을 본 알리시아는 장난스레 입술을 삐죽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화사하게 웃으며 카시야와의 인연을 말해주었다.

"데런에 도착하셨을 때 미르바하라 계곡에서 카시야 경과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같이 목욕도 했고요. 제가 보기에, 카시야 경은 여기사이지만 굉장히 강해 보였거든요. 제가 잘못 보았나요?"

알리시아의 물음에 타셀은 어깨를 으쓱하며 피식 웃었다.

"영애가 보는 눈이 좋군. 영애의 생각이 맞다. 우리 군의 웬만한 남자 기사보다 더 강하지."

"사실 그래서 저번에도 제 호위 기사를 부탁드려보긴 했습니다만, 분대원들의 훈련에 바쁘시다더군요. 억지를 부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카시야 경과 비슷한 실력을 지니신 여기사님이 계시다면 그분으로도 좋아요. 아니면 카시야 경이 바쁘신 일이 끝나시고 해주셔도 좋습니다. 그 분이 강하다는 것과 별개로, 왠지 저는 그 분이 좋거든요."

알리시아가 눈을 곱게 접어 미소를 짓자 타셀의 곁에 있던 미하일이 퉁명스레 사족을 덧붙였다.

"그 녀석 참, 남녀 불문하고 홀리고 다니나 봅니다. 연회 때도 영애들한테 손수건을 싹쓸이하더니…."

그는 여전히 저에게는 손수건 한 장 오지 않던 그날 밤의 연회를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카시야 경에게 내가 한 번 부탁해 보겠소. 영애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야말로 큰일이니까."

"죄송합니다. 저도 귀찮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는데…."

"아냐, 아냐. 오히려 영애가 와 주어서 군사들의 사기가 굉장히 높아졌네.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가 자신들을 위해 두 손 걷어붙였다는 게 그들에게는 상징적인 의미지. 윗사람들이 저들의 어려움을 못 본 체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주고 말이야. 영애에게 감사하는 바이네."

타셀의 치하에 알리시아는 수줍은 듯 볼을 발그레 물들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곱고 귀여운지, 미하일은 거의 침을 흘릴 듯 쳐다보고 있었다.

쉬기 위해 막사로 돌아온 타셀을, 에르논과 카시야가 기다리고 있었다.

"카시야 경.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잘 됐군. …그런데, 무슨 할 말이라도…?"

자신을 맞는 카시야의 눈빛이 이상해서 타셀은 다시 그녀를 되돌아보았다.

"의논드려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전하."

어딘지 모르게 긴장된 그녀의 분위기에 타셀은 저도 모르게 에르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에르논은 딴청 피우듯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카시야가 꺼낼 이야기가 그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타셀은 확신할 수 있었다. 타셀은 탁자의 의자를 빼내어 카시야에게 앉으라고 눈짓하고 에르논을 위해서도 의자를 하나 빼주었다. 그리고 침대 곁의 진열장에서 알리시아가 가지고 온 포도주와 잔 세 개를 꺼내 탁자 위에 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타셀이 포도주를 따고 잔에 따르기까지 셋은 아무 말도 없었다. 꼴꼴꼴 따라지는 포도주의 검붉은 액체로부터 야생 포도의 독특한 향이 피어날 뿐이었다. 채운 잔을 카시야와 에르논의 앞에 밀어놓은 타셀은 자신의 몫으로 따른 잔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카시야와 에르논 역시 잔을 가볍게 들어 올려 눈을 맞추고는 동시에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몇 번을 마셔도 기가 막힌 맛과 향이었다.

"카시야 경이 이렇게나 뜸 들이는 것을 보면, 내가 쉽게 허락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아마도, 카시야 경이 아니라 대마법사에 관한 일일 테고. 아닌가?"

타셀은 솔직히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니었다. 100% 확신하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카시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하고 계셨다니, 많이 놀라시진 않을 거라고 믿겠습니다."

그렇게 엄포를 하고도 말 꺼내기가 쉽지 않았는지, 카시야는 다시 포도주를 들이켰다. 피곤한 몸에 포도주의 알코올 기운이 순식간에 돌아 조금 대범한 기분이 되었다.

"전하. 에르논을… 알리스타스 공작에게 보내주실 수…. 하아…. 제가 생각해도 이건 미친 짓입니다."

카시야가 이정도로 깊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타셀은 묘하게 또 기분이 나빠졌다.

"무슨 얘긴지, 찬찬히 좀 해보겠나? 그렇게만 말하면 난 알아들을 수가 없어."

다시 한참 머뭇거리던 카시야는 잘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에르논과 알리스타스 공작과의 관계, 공작이 에르논에게 걸어둔 속박 마법과 그 때문에 공작에게 노예처럼 부려졌던 에르논의 과거, 그 속박 마법을 풀기 위해 헬라스 저택에서 자신이 그 마법을 필사해 온 것 등을 설명했다.

"…그리고 에르논은, 그 마법을 지금 해제하지 않고 겨우 도망쳐 나온 척 알리스타스 공작성으로 돌아가 그 안쪽부터 파괴하겠다고 합니다."

타셀은 경직된 눈동자를 겨우 돌려 에르논을 쳐다보았다.

"공작의… 노예… 라고? 대마법사가? 그게 말이 되나? 도대체 무슨 속박 마법이 걸려 있었기에…."

에르논이 눈을 뜨고 카시야를 처음 봤던 날 그가 자신을 노예 운운했었던 것은 기억하고 있지만, 그게 설마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노예를 뜻하는 것일 줄은 몰랐다. 놀란 타셀의 앞에서 에르논은 자신의 앞섶을 풀어 명치에 새겨진 문양을 직접 보여주었다. 타셀의 눈이 더 커졌다. 헬라스 마법 특유의 사악한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문양이었다.

============================ 작품 후기 ============================

1. 하양사슴 님 > 외전식으로 진행할 등장인물 프로필은 공지에도 올리기는 하겠습니다. 공지에만 올리면 못보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의외로 독자님들이 공지란은 잘 안 보셔서..)

2. |ARICIA| 님 > 지난 회차 후기에 언급했어야 했는데 깜빡해서요; 길고 긴 감상과 코멘트 정말 감사했습니다.

3. 여러분~! 시간나시면 서평도 부탁드려요~! 아직 소설 중반이지만...; 서평 선물은 자까에게 너무나 소듕한 것!(하지만 서평 쓰기가 쉬운 게 아니라 잘 받을 수 없는 선물이기도 하지요.ㅠㅗㅠ)

4. '잘 보고 갑니다.'라는 댓글이 텍본러가 남긴 발자국이라는 괴소문을 들었는데요.... 아니죠? 우리 도짜님들은 아니죠?

+ 징수니 님, 엘린s00 님, 나비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덕분에 예약아이템 사고 있습니다.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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