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0 뜻밖(3) =========================
뭐라고 답해야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에르논을 남겨놓고 카시야는 그릇을 치운 뒤 자신의 막사로 들어가 버렸다.
멀어지는 카시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르논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산뜻하게 설명할 수가 없어 답답했다. 뜬금없이 눈물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가슴 끝이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기도 하고, 옆구리가 간질간질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감정에 무디고 어색한 그는 이름도 알 수 없는 감정 때문에 당황하다가 입을 꾹 닫고 말았다.
막사로 돌아온 카시야는 여전히 자신 때문에 에르논이 가장 위험한 길을 선택하게 됐다는 자책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그가 '네 믿음에 대한 보답을 해야지.'라고 했을 때는 조금 기뻤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곡해 없이 받아들여줘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이 나왔을 때, 카시야는 그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기껏 속박을 풀어줬더니 또 그 징그러운 곳으로 돌아간다고….'
카시야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속박을 풀고서도 공작을 따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행이긴 했지만, 교활한 인간 앞에서 어설프게 연기를 펼쳤다가 또다시 역으로 먹힐까봐 두려웠다. 만약 그가 속박 마법을 해제하기 전에 공작이 그 마법을 발동시킨다면, 에르논이 과연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까. 아니, 그러지 못할 것이다.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그것을 거부하고도 남았으리라. 하루빨리 그의 목에 걸린 구속구를 풀어주고 싶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 구속구가 벗겨지는 날이 두려웠다. 그 날이 바로 그가 공작성으로 돌아가는 날이 될 테니까.
머리가 복잡해진 카시야는 뭐라도 해서 이 답답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알리시아 영애를 만나러 가 볼까?'
이미 검대와 조끼를 벗고 편한 셔츠와 바지 차림이던 카시야는 조끼를 다시 입을까 하다가 관뒀다. 귀족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다시 잘 차려입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미 만사가 다 귀찮아진 참이었고, 알리시아가 그런 것을 가지고 꼬투리 잡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천막 밖으로 나와 간호 부대의 막사가 있는 쪽으로 향하는데 밤바람이 시원하게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늘 조끼로 단단하게 감싸고 있던 몸의 긴장이 조금 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알리시아의 막사 주위에는 이미 두 명의 기사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엔드로스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이라 카시야도 얼굴을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저 정도의 기사들을 붙여두었다면 굳이 자신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의아하긴 했다. 카시야가 방문했다는 얘기를 들은 알리시아는 깜짝 놀라면서도 굉장히 반갑게 반겨주었다.
"저녁 늦게 죄송합니다. 아까 전하께 영애를 호위하라는 명을 받아서 미리 인사차 들렀습니다."
"어머! 정말 맡아주시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조금 의외긴 하네요. 아나클리프 경의 기사들이라면, 꽤 믿을 만할 텐데요."
"아, 그게…. 사실은요…."
난처한 얼굴을 하던 알리시아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전하께나 지크 메레디스 경께는 차마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벌써 세 번째예요, 고백을 받은 게.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타셀 전하께서 보내주셨던 기사님, 세 번째는 아버님이 붙여주신 기사님이셨는데… 고백을 정중히 거절해도 달라지는 게 없더라구요. 오히려 말씀을 험하게 하시면서 협박을 하시는 분도 있었고, 하루 종일 꽃이나 음식이나 선물 같은 걸 주시는 분도 있었고요. 하아…. 자고 일어났는데 곁에서 제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마지막 기사님이 제일 무서웠죠. 정말… 무서웠어요."
카시야는 어이가 없어졌다. 전쟁터라는 곳이 워낙에 남성 호르몬을 뿜어내게 하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기사로서 훈련받은 이들이 그 따위로 자신의 이성을 차리지 못할 정도라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남자들이 보기엔 그렇게 미쳐버릴 정도로 알리시아가 아름다운 것인가 궁금하기도 했다. 물론 자신의 무딘 심미안으로 보기에도 그녀는 요정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 그녀는 육욕이 동한다기 보다는 그 순결함과 순수함을 언제까지고 지켜주고 싶은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아름다워도 골치가 아픈 거로군요."
전생에서도 아름답기 때문에 범죄나 거래나 편견의 대상이 된 이들이 있었다. 아름답지 못해서 차별받는 사람들만큼이나 아름다워서 차별받는 사람들 역시 괴롭다. 캠프 X에서도 가장 많이 강간을 당했던 아이는 가장 아름다운 아이였으니까.
'결국 자살했지, 아마?'
이제는 많이 가물가물한 기억이긴 하지만, 흐려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었다.
카시야의 말에 알리시아가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제가 오만하다고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제가 예쁜 것은 알고 있어요. 저희 어머니가 세기의 미인으로 칭송받으셨던 데다가 어린 시절부터 질리도록 예쁘다는 칭찬을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그 칭찬들이 점점 기분이 나쁘더라고요. 그들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든, 무엇에 흥미가 있든, 무엇을 하고 싶든 상관하지 않았어요. 오로지 제 외모에만 관심이 있어요. 그리고 제 안에 무엇이 들었든 간에 외모처럼 연약한 꽃송이로만 남길 바라더군요. 저는 그게 싫어요. 저는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여러 선생님들께 정치학과 외교, 무역에 대해 배웠어요. 웬만한 귀족가라면 당치도 않을 일이었지만, 저희 아버지는 허락해주셨거든요. 그래서 여자로 태어난 한계를 아직 몰랐던 어린 시절에는, 폐하 곁에서 외교를 맡고 싶다고 꿈꿨었어요. 외국어도 꽤 열심히 공부했죠. 그런데… 지금은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저는 그저 장식품에 불과할 인생을 살 거라는 걸."
점점 격해져 가던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토록 아름다운 백작 영애에게도 토해낼 울분이 있었구나 싶어서 카시야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저 장식품에 불과할'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영애치고는 행보가 대담했다. 그녀의 이성은 꿈을 버려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숨겨진 열정은 그 이성을 무시하고 그녀를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하나 싶던 그녀의 머릿속에, 타셀이 아까 막사에서 해주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타셀 전하께서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면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노력하실 거라고 합니다. 저에게 여기사의 훈련과 교육을 맡아달라는 말씀도 하셨고, 그녀들이 공을 세우면 높은 지위로의 진출도 허락하실 계획인 듯합니다. 그러니… 벌써부터 영애의 꿈을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전하의 곁에서 여기사로서는 최초로 인정받는 자가 될 테니, 영애께서는 여성 최초의 외무장관이 되시면 어떻겠습니까?"
카시야의 말에 알리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보다가 갑작스럽게 해사한 미소를 터트렸다.
"네! 네. 노력할게요. 우리 서로 응원해주기로 해요!"
카시야는 '저렇게 웃으면 안 반할 수가 없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보기보다 강단 있고 꿋꿋한 이 아가씨가 영지로 돌아갈 때까지만이라도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도록 돕자고 마음먹었다.
귀족 영애라 해도, 그리고 아비가 그 유명한 데런의 회색늑대라 해도, 이 세계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추행이나 강간을 당한다면 그녀의 명예는 끝도 없이 추락해버리고 만다. 자신을 강간한 남성이 귀족이라면 그와 혼인하는 수밖에 없고, 그게 아니라면 집안에 숨겨져 죽은 사람 취급을 당해야 했다. 그것을 아는 어떤 귀족 남자들은 일부러 납치와 강간을 결혼의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역겨운 얘기지만 이 시대보다 훨씬 발전했다고 느껴지는 전생에서도 그런 문화가 잔존하는 나라들이 있었으니, 지금 이 시대라면 말할 것도 없다. 아마 타셀과 엔드로스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에서 멈춘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알리시아가 무슨 짓을 당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처음에는 탐탁지 않은 임무였는데 알리시아와 얘기를 나누다보니 꽤나 적극적으로 임할 기분이 되었다.
"제 힘닿는 데까지 영애를 지켜드리겠습니다. 아예 오늘부터 제가 함께 머무르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는 정말 바랄 게 없겠어요."
제 곁에서 밤새 자신을 지켜봤다는 기사 이후로 알리시아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설핏 잠들었다 하더라도 누군가의 새카만 눈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악몽을 꾸다가 깨곤 했다. 그랬던 그녀로서는 카시야의 제안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
"알리스타스 공작께서 오고계시는 중이라고 합니다."
어깨의 붕대를 갓 풀어낸 루크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이의 방문 소식에 미간을 찌푸렸다. 1황자를 자신의 성에 숨겨두고 자신이 황자라도 된 양 모든 결정을 내리는 그는 만날 때마다 차갑고 축축한 뱀이 지나간 듯 불쾌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남자였다.
"왔다 간지 얼마나 됐다고. 왜 또 온다는 건지는 듣지 못했나?"
"페레이아 경을 직접 만나 뵈러 오신다고 합니다.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나를?"
루크는 여전히 미간을 구긴 채 그가 자신을 찾을 이유를 떠올려 보았다.
'보나마나 반가운 소식을 갖고 오는 건 아닐 테고…. 혹시 대마법사 때문인가?'
케네스 역시 루크를 가깝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으니 분명 부탁할 일이 있어 오는 것일 텐데, 그에게 지금 당장 생긴 어려운 일이라면 역시 에르논의 실종 외에는 답이 없었다. 다들 에르논이 죽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케네스처럼 루크 역시 에르논이 그렇게 쉽게 죽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인정하기는 싫어도 그는 대마법사. 루크 역시 그와 대적할 수는 없었으니까.
'마력을 다 소진했다면 위험했을 수도 있지만, 죽지만 않았다면 마음 약해 빠진 2황자가 포로로 잡은 그를 죽였을 리는 없어.'
거기까지 생각하니 케네스가 굳이 자신을 찾아오는 이유가 대충 짐작이 되어 짜증이 났다. 분명 에르논을 구출할 작전을 짜라고 할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1황자가 직접 와서 부탁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부상자 수가 엄청나서 그들이 나을 때까지는 몸을 사려야 했다. 아직 군사의 수 자체는 케일런군이 더 많다고 해도, 군사의 사기는 타셀군이 월등히 높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신마저도 부상을 입은 왼쪽 어깨가 완치된 것이 아니었다. 루크는 케네스더러 황제 쪽이나 더 압박해보라고 쏘아붙이자 마음을 먹었다.
반나절쯤 뒤에 루크의 막사에 도착한 케네스는 자신이 올 것임을 미리 알렸는데도 나와 보지 않은 루크가 괘씸해서 잔뜩 찡그린 표정이었다. 아무리 루크가 케일런군의 총지휘관이라 해도 그래봤자 귀족이라 부를 수도 없는 노예의 자식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케네스로서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채찍을 내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 차마 분노를 드러낼 수가 없어 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부상자들의 상황을 점검해야 해서."
심지어 막사에까지 늦게 들어온 루크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케네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케네스가 앉으라고 말하기도 전이었다. 귀족 작위를 쳐줘봐야 아직 자작에 지나지 않은 자가 감히 공작의 안전에서 방약무인한 태도를 보이는 데 케네스는 결국 노기를 드러내고 말았다.
"페레이아 경. 귀족의 예절을 다 잊어버리신 게요? 몸가짐이 상당히 거칠구려."
신경을 긁는 듯한 케네스의 말투에 루크는 오히려 조소를 띠었다.
"이거, 저 때문에 공작 각하께서 기분이 상하신 모양이군요. 제가 출신이 천해서 아무래도 예절에 밝지 못합니다. 예절에 밝은 백작가 기사님들을 모셔오도록 하죠. 저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러고는 진짜로 일어나서 막사를 나가려했다. '그 천한 기사에게 조아려야할 사람은 당신이다.'라는 명백한 조롱의 뜻이었다. 케네스는 배알이 심하게 뒤틀리는 듯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한 발 물러나야했다. 아닌 게 아니라 마음이 급한 쪽은 케네스였으니까.
============================ 작품 후기 ============================
1. 어제 말씀드린 21회차의 표현은 많은 분들이 매춘이나 난잡한 상황을 연상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오히려 마이너한 쪽이었나 싶네요. 많은 분들이 오해하실만한 표현이란 걸 알았으니 그 부분 앞뒤로 조금 수정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타셀 캐릭터에 영향을 끼쳤네요. 70화가 다 되어서야 알게되어 타셀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것땜에 타셀 주가가 하한가 친 것도 모르고... 타셀, 미안해;;;
2. 제가 8월말까지 일일연재를 하고 외전식으로 인물설정 올리면서 하루 땡땡이 치겠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알고보니 9월 1일이 금요일이더라고요. 그런데 여유로운 금요일 저녁에 본편이 아니고 설정부분 읽고 있기는 좀 그러실 것 같아서 날짜를 바꾸려고 합니다. 8월 31일(내일) 인물설정편 올리고요, 9월 1일에 본편 올리겠습니다. 그래도 일일연재 완주한 걸로 봐주실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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